2013. 12. 13. 19:45ㆍ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0)
須菩提 忍辱波羅密 如來說非忍辱波羅密 是名忍辱波羅密
수보리 인욕바라밀 여래설비인욕바라밀 시명인욕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我相 人相衆生相壽者相應生瞋恨
무수자상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응생진한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無壽者相
무수자상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 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생애동안 인욕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전번에는 제일반야밀에 대해서 말씀하셨읍니다. 즉 제일 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고 이름이 제일 바라밀인데, 이 말은 제일바라밀을 얻었어도 제일바라밀을 얻었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제일바라밀이라는 것이 보살의 수행실천 사항인 육바라밀 중에서 맨 마지막 최종 성취단계인 반야바라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이렇게 보살이 처음에 보시행으로 시작해서 순서대로 6단계의 바라밀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인데, 제일바라밀은 맨 마지막 최종단계인 반야 바라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야지혜를 완성하면서도 보살은 반야지혜를 얻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옳바른 반야지혜를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지혜를 통해서 "나"가 없어져야 반야바라밀을 완성한 것이죠.
그럼 잠깐, 여기서 대승불교에서 보살행의 핵심인 육바라밀에 대해서 좀 기본적인 일반상식 수준정도의 개념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른 책자의 자료를 인용해서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바라밀은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준말로, 저 언덕 [彼岸] 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룩해 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완성시켜 정토(淨土)를 건설해 간다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의 실천행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대승보살의 실천수행법인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의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자기의 인격완성을 위하여서는 초기원시불교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으로 충분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팔정도를 채택하지 않고, 육바라밀이라는 독자적인 수행법을 제시했읍니다.
그것은 팔정도가 자기완성을 위한 항목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타(利他)를 위하여는 충분하지 않으며, 보시와 인욕과 같은 대사회적인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수행법으로 알맞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것 같읍니다.
육바라밀의 수행법에서 보시를 제일 먼저 둔 까닭도 사회의 모든 사람이 상호협조적인 보시자선을 행하는 것이 대승불교로서는 가장 필요한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팔정도와 육바라밀의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팔정도--> 정견(正見), 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 정명(正命), 정근(正勤), 정념(正念),정정(正定)
* 육바라밀-->보시(布施),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반야(般若)
* 팔정도와 육바라밀이 유사한 점
정견(正見),정사(正思) = 반야(般若)
정어(正語), 정업(正業),정명(正命) = 지계(持戒)
정근(正勤) = 정진(精進)
정념(正念),정정(正定) = 선정(禪定)
* 팔정도와 육바라밀이 다른점
팔정도에는 없지만, 육바라밀에는 보시(布施), 인욕(忍辱)이 추가되었읍니다.
위에서 육바라밀에는 팔정도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이외에 팔정도에 없는 보시와 인욕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만은 대사회적인 것으로서 이타적인 대승불교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보시]는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의 세 종류로 나누어지는데,재시는 자비심으로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것이고, 법시는 다른 사람에게 부처의 법을 말하여 선근(善根)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무외시는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고 다른 이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지계]는 부처가 제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막기 위하여 설정해 놓은 법규를 지키고 범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여러가지 선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합니다.
[인욕]은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안주하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 성나고 언짢은 마음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 인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복인(伏忍)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먼저 성나는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경만 참아서는 안 되며, 자기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순경(順境)도 참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역경을 참지 못하면 분노가 치밀어서 싸우기 쉽고, 순경을 참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순인(柔順忍)으로, 사람이 참기를 많이 하면 저절로 조복이 되어서 역경이나 순경을 만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무생인(無生忍)으로, 참고 견디어 보살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인욕행입니다. 인생이 무상하며 세상이 허황함을 깨닫고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으로 흩어지는 진리를 깨닫고 보면 별로 성낼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적멸인(寂滅忍)으로, 이것은 부처의 지위에 있어서의 인욕행입니다. 생사고해에 뛰어나서 본래부터 적멸한 열반의 경지에 서서 볼 때 한 물건도 없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욕행을 닦음이 아니라, 본래부터 한 생각도 일으킴이 없는 곳에 참된 인욕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진]은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 마음으로 항상 부지런히 닦아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닦는다는 생각과 닦을 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精)은 순일무잡(純一無雜)을 의미하고 진(進)은 용맹무퇴를 말합니다. 이 정진에는 두 가지가 있읍니다. 첫째는 몸과 입으로써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고 배우며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을 항상 진리에 머무르게 하여 모든 생각이 착한 진리를 떠나지 않게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사정진(事精進)과 이정진(理精進)이 있는데, 사정진은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막론하고 그것을 한번 이루려고 결심하였으면 그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정진은 악한 생각을 없애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여러 사람이 이롭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거든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기어이 성취하도록 노력, 정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정]은 수행인이 반야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하여 마음을 닦는 것이며, 생각을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생활이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되는 까닭은 잡다한 생각을 쉬지 못하고 어리석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로서 망념과 사념과 허영심과 분별심을 버리게 합니다.
[반야]는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모든 사물이나 이치를 밝게 꿰뚫어보는 깊은 슬기로서, 지식과 다른 점은 지식이 분별지(分別智)인 데 반하여 지혜는 무분별지입니다. 보살이 피안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는 육바라밀 중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 하며, 다른 5바라밀을 형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반야는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읍니다.
① 문자반야(文字般若)는 부처님이 설한 경(經)·율(律)·논(論)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고, ② 관조반야(觀照般若)는 경·율·논의 문자반야를 통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이며, ③ 실상반야(實相般若)는 부처가 체득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에 서술한 육바라밀에 대한 요약자료는 인터넷에 공개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논 것입니다.
이 자료로써 대략 육바라밀에 대한 기본설명은 된 것 같습니다.
다시 금강경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금강경에서 보살의 보시(布施)바라밀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었으며,
또한 반야 바라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읍니다.
이번에는 인욕바라밀에 대해서 말씀하셨읍니다.
위의 6개 바라밀은 각 단계별로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지만, 또한 각 바라밀이 독립적인 완성의 의미도 있는데, 그 완성의 의미는 무엇으로 알수 있느냐 하면 바로 어떤 바라밀을 성취했어도 그 바라밀을 성취했다는 생각이나 성취감을 느끼고, 그 수행하고 있는 "나"가 아직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 바라밀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자기가 보시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나"라는 것이 보시행을 통해서 없어져야 되고, 마찬가지로 지계,인욕, 정진, 선정, 반야, 이 나머지 바라밀들도 이 바라밀을 통해 "나"가 사라져서, 바라밀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이나 무엇을 행한다는 생각이 전혀 나오지 않아야 비로소 나라는 개체성이 사라져서 바라밀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서 반야 바라밀인 제일바라밀은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고, 이번에는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라밀은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건너서 저 언덕에 도달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개체적인 "나"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초월한 상태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야 바라밀이 완성된다는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이 아니라는 것은,억지로 참는 "나"가 있으면 억지로 참는 '나'가 있기 때문에 그냥 "인욕(忍辱)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인욕바라밀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는 "나"마저 사라져서 참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었졌을 때에 바로 인욕바라밀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인욕(忍辱)이란 단순히 남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체의 것, 즉 자신이 당하는 일체의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는 몇천년전의 자기 전생을 되돌려서 자기가 인욕선인으로 수행할 당시에 가리왕으로부터 사지를 절단 당하던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본생담에 나오는 부처의 전생 이야기입니다.
그 옛날 옛적에 석가모니 부처가 샨띠바딘 리쉬(인욕선인)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의 부처 이름이 찬디바리(인욕의 수행자라는 뜻) 였읍니다.
찬디바리는 인욕을 실천하기 위하여 산중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었읍니다.
때마침 그 시대의 왕인 가리왕이 신하와 궁녀를 데리고 이 산으로 사냥을 나왔읍니다. 왕은 점심을 먹은 후 노곤하여 낯잠에 들었읍니다. 궁녀들은 이틈을 타서 산주변에 산책을 나갔는데 한참가다보니 찬디바리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읍니다. 그 순간 가슴에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꽃을 꺽어 찬디바리 주위에 뿌리고 그 앞에 앉아 조용히 앉아서 법을 듣게 되었읍니다.
한편 왕은 잠을 깨어 사방을 둘러 보니 궁녀들이 보이지 않아서 몇몇 대신들을 대동하고 궁녀들을 찾아 나서 여인들과 찬다바리가 같이 앉아 있는 곳에 이르렀읍니다. 그런데 여인들과 함께 앉아서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찬디바라를 보는 순간 가리왕은 질투심이 치솟아 올랐읍니다.
가리왕이 찬디바라에게 물었읍니다.
"너는 사공정(四空定)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읍니다."
"그럼 너는 사무량심(四無量心)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읍니다."
"그럼 너는 사선사(四禪事)에서 얻은 바가 있느냐?"
"없읍니다."
"그럼 너는 아무런 도(道)얻은 바 없다면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는 놈이로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궁녀들을 데리고 폼 잡으며 설법하고 야단이냐? 도데체 너는 뭘 하는 놈이냐?"
"인욕(忍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때 가리왕은 날카로운 칼을 쑤욱 빼들었읍니다.
"네 이놈, 네가 정말로 인욕을 수행하는 자라면, 네 인욕을 내가 당장 시험하리라"하고 양팔을 싹뚝 짤라 버렸읍니다.
"너 진짜 뭐하는 놈이냐?"
"인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왕은 다시 찬다바리의 양 다리를 싹뚝 베어버렸읍니다.
"다시 묻겠다. 너 정말 뭐 하는 놈이냐?"
"인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가리왕은 찬디바리의 머리카락을 웅켜쥐고 찬디바리의 코를 싸악 베어버렸읍니다.
이때도 찬디바리는 표정이 하나도 동요함없이 인욕을 수행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때, 하늘과 땅이 여섯번 크게 다른 모습으로 진동하더니,이때에 선인(仙人)의 오백제자들이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더니 찬디바리에게 묻는 것이었읍니다.
"찬디바리님이시여 ! 이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고도 인욕의 마음을 잃지 않으셨나이까?"
"내 마음 한치의 변화도 없다."
가리왕은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경악하였읍니다. 그래서 찬디바리에게 다시 물었읍니다. "네가 아직도 인욕을 운운한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내 진실로 인욕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거짓됨이 없다면, 내 흘린 피가 모두 젖이 될 것이오.그리고 모든 잘린 몸이 제자리에 돌아올 것이오"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피가 드디어 우유빛 같은 젖이 되고, 예전과 같이 몸이 온전하게 돌아왔읍니다.
이에 찬디바리의 인욕바라밀이 인증되는 것을 보고 가리왕의 공포는 더욱 짙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제가 내가 대도인을 능욕하였으나 그대는 나를 오직 가엾게 여겼을 뿐이외다. 나의 참회를 받으소서."
이에 찬디바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읍니다.
"그대, 여색(女色)으로 인하여 나의 형체를 도륙하였도다. 나는 이와같이 참었노라. 내 훗날 성불케 되면 반야지혜의 검으로 너의 삼독(三毒)을 짤라버리리라.
이때 산중의 제용(諸龍)과 귀신들이 가리왕이 찬디바리 선인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큰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번개와 벼락을 내리쳐 가리왕과 그 모든 권속을 죽이고자 하였읍니다.
이때 찬디성인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외치기를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진정으로 날 위한다면 이들을 해치지 말아라"
이때 비로소 가리국왕이 크게 뉘우치고 선인을 궁으로 모셔다가 잘 공양했다고 합니다. - 이상은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위의 부처의 전생담에서 인욕선인일 때의 체험이야기와 같이 인욕바라밀은 인욕을 행하는 "나"가 완전히 사라져야 인욕바라밀의 완성을 본다는 것입니다.
즉 '바라밀'이라는 것은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간 것이므로 그 생사(生死)의 강이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감을 말하며, 이 "나"라는 존재감을 벗어나야 바라밀의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욕하는 나"가 남아 있는 한에는 어디까지나 생사의 고해 안에서의 인욕수행(忍辱修行)" 일뿐이며, 생사의 고해를 벗어난 인욕바라밀의 완성이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나"가 사라져야만 인욕바라밀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바라밀도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야 바라밀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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