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금강경의 "상(相)을 떠나면 적멸(寂滅)이다"에 대하여(5)

2013. 12. 19. 19:54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1) 

 

是故 須菩提 菩薩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시고 수보리 보살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菩薩心 不應住色布施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보살심 불응주색보시

須菩提 菩薩爲利益 一切衆生 應如是包施

수보리 보살위이익 일체중생 응여시보시

如來說一切諸相 即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即非衆生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삼막삼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마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삼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니> 라는 문장에서, 깨달음의 염원을 일으키려면 모든 상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는 "내가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라는 에고가 항상 붙어 다닙니다. 나라는 아상(我相)을 그대로 지니고 깨달음의 그 언덕 넘어로 넘어 갈 수는 없읍니다. 나라는 상을 비롯해서 모든 상을 버려야 그 언덕에 오를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자기가 깨달았다는 것을 남에게 내보이기 위해서 어떤 희안한 체험내용을 증표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모든 상을 떠나서 깨달았다는 상(相)조차 버려야 합니다. 하물며 마치 꿈 속의 일같은 어떤 의식상의 체험내용을 내세우며 자기가 깨달았다고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의 꿈에 취해있을 뿐,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뇩삼보리심을 얻은 것과는 다릅니다.

깨달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특히 이 문장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모든 상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실제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았다고 여기는 "나"가 있는 한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나"가 없어져야 모든 상(相)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여기면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눈,귀,코,혀,육체촉감,마음이라는 6개 감각기관의 대상인 빛(형상),소리, 냄새, 맛, 감촉,법을 말합니다. 즉 육체를 가진 한 에고가 감각과 마음으로 감지하는 모든 내외부 현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 모든 인간은 이 6개 감각기관과 그 감각기관이 비추어 주는 대상들에 의해서 마음을 내고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외모에 미혹되고, 듣기좋은 소리에 이끌리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향기로운 꽃냄새를 좋아하고 똥냄새는 싫어하는 둥, 자기가 좋은 것에는 머무르고, 싫은 것은 피하는 등, 감각대상에 따라서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사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구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감각의 대상에 대하여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낸다면 마음이 그 대상들에 이끌려 다니게 됩니다.

사실,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것들은 단일한 존재의식이 6개 감각기관에 의하여 나누어져서 비추어진 상(相)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 색갈없는 투명의 태양광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주노초파남보라는 7개 무지개색으로 나누어져 보이는데, 이것은 빛이 프리즘의 삼각유리를 통과 할때에 유리의 두께를 통과하는 빛이 각각 빛의 파장에 따라서 빛의 속도가 달라져서 7개 스펙트럼으로 나누어져 보이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사람의 눈으로 7가지 색갈로 규정한 것일 뿐, 분류하기에 따라서는 5가지에서 수백가지 색갈(주파수 파장) 스펙트럼으로 분류될 수가 있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6개 감각기관과 육식에 비쳐 보이는 이 다양한 형태의 의식의 스펙트럼인 현상세계도 실은 단 하나의 존재의식이 6개 감각기관과 마음을 통해서 비쳐져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존재의식은 마치 무색의 투명한 태양광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인데, 이 공(空)한 존재의식으로부터 6개의 감각기관과 육식에 비추어져 보이는 모든 현상과 마음내용물들도 한마디로 단일한 존재의식이라고 볼 수가 있고 또한 아무 것도 없는 공(空)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색성향미촉이 공(空)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바른 지혜(正念)이며, 이 바른 지혜로 탐진치 삼독심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만 한다면 적어도 대상이 실제한다는 믿음이 없질 뿐 아니라, 점차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꿈 같은 의식이 그려낸 환상이라는 깨침을 얻어서 삼독심으로부터 벗어 나게 되어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감각기관에 비쳐진 색성향미촉법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수행을 통해서 무지한 마음의 집착심을 벗어나야 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관(觀,위파사나)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즉 경계를 따라다니는 마음을 잘 감시하면서 내면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면서 전개되는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대상(名色,색성향미촉의 六境) --> 육감각기관(六入,안이비설신의 六根) --> 접촉(觸,육감각기관이 6개 대상과 접촉) --> 수용(受, 느낌,감정을 마음으로 받아들임) --> 애욕(愛, 좋아함,習을 만듬) --> 집착(取, 대상에 대한 집착,습의 부착)

대략 십이연기법에서는 감각기관과 대상이 접촉하면서 위와 같은 과정이 일어나면서 대상에 대한 집착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따라서 색성향미촉법이 이비인후촉의와 접촉할 때에 어떻게 하면 수용과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어떻게 하면 색성향미촉법의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바로 구도자들의 큰 당면 문제입니다. 

이런 대상에 대한 집착심에 대한 탈착(脫着)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행법에 바로 "지켜보기" 또는 "주시하기"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즉 감각기관이 대상을 접촉할 때 바르게 깨어서 올곳이 지켜보며 감시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이것을 단 한마디로 "말없이 깨어서 지켜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짝 깨어만 있으면 지켜보는 것은 자동으로 되니깐, 억지로 지켜본다는 의도적인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억지로 대상을 지켜보는 행위를 하므로서 오히려 대상에 더욱 접착하는 경우가 많읍니다.

자연스럽게 전체적으로 깨어만 있으면, 바로 말없이 지켜보는 행위(자연주시)가 저절로 이루어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인 사념처(四念處)에서는 몸과 감각기관,그리고 느낌, 마음, 마음의 반응,그리고 움직임없는 주시자 자체를 관(觀)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즉 항상 깨어 있어서 감각기관에 비추어진 대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감시하며 지켜보는 수행을 권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빈틈없이 자신의 마음의 반응을 깨어서 감시하며 지켜보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고 합니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 문장은 원래 구라마집본에는 빠진 문장인데, 산스크리트 원본을 비롯해서 현장본이나 티벳본 같은데서는 모두 있는 문장이며, 대부분의 금강경 해설서들도 이 문장을 삽입해서 해설을 하고 있어서 여기서도 그대로 삽입했읍니다만, 사실 구라마집본에는 자세히 보면 바로 위의 문장에서-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라는 문장에서 법(法)자 들어가 있으므로 이중으로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법(法)은 진리, 근본 존재를 말하기도 하고, 또한 현상화된 만물, 대상, 또는 경전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의 가르침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하는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읍니다. 즉 부처님의 경전에서 말하는 진리의 개념에 집착하지도 말며, 그런 경전의 진리개념에 집착하지 말라니깐 또한 혹시 진리가 아닌 것을 찾아 다닐지 몰라서 , "진리가 아님"에도 집착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경전에도 집착하지 말고 부처나 조사가 가르쳐 준 가르침조차도 머물지 말고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씀처럼, 아무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 속에 담긴 진리의 개념도 역시 언어로 된 개념일 뿐이므로 그것도 일종의 망상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 부처님의 진리말씀도 버리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이원화 대상으로 나타난 마음이라는 것은 꿈과 같은 허상인데, 허상에 머문다면 그것은 진실한 머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면, 곧 마무름 아님이 된다.(若心有住 卽爲非住) >

이 문장은 어떤 주시수행이나 집중수행하는 구도자들이 어떤 경지에 들어가 마음이 청정해지고 침묵상태가 되었을 때에 "아! 지금 이 상태가 바로 마음이 청정해진 상태로 들어가 있구나 !"하고 느낀다면, 즉 마음이 청정한데 머물러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청정한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존재가 작은 점 속에 흡수되어 공(空)상태가 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진실된 공(空)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가상(假相)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럼 진짜 상(상)은 뭔가요? 바로 상(相)이 아닌 것이 진짜 상(相)입니다.

즉 마음이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여긴다면 바로 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도자들, 또는 이미 깨달았다는 사람들도 이러한 마음의 어떤 상태 속에 머물게 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들도 속이는 일이 많읍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끝까지 추적하며, 만약 마음이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진실한 머무름이 아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렇겠읍니까?

마음은 그 본체는 절대로 밖으로 나타날 수가 없고, 오직 이원화로 비쳐진 그림자만 환상처럼 밖으로 나타나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상(相)들은 거울에 비친 상(相)일 뿐이며, 그 상(相)에 머무른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집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도자는 "공(空)을 체험했다"라는 말은 거울면에 비친 공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말과 같읍니다. 그런 공(空)은 종이봉지 우유의 빨대구멍보다도 더 작은 공(空)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아무리 공의 체험일지라도 마음에 나타난 어떤 현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도하는 보살은 색(형태)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않고, 또한 성향미촉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보시하는 보살이 형태나 소리 등 오감각기관에 나타난 대상에 의존해서 보살도를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6바라밀의 보시,지계,인욕,정진, 선정,지혜 바라밀은 모두가 색성향미촉을 벗어난 행위를 말합니다

보살이 그렇게 아무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바로 진실한 보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대승보살의 정신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자기 자신은 희생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보살행을 하려면 아상,중생상,인상,수자상 등, "내가 있다"라는 상이 없어져야 진실한 보시행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상(相)도 없어야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보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상(相)이란 마치 모양없는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상(相)은 오직 대상일 뿐이며, 보이는 대상은 보는 자가 있어야 되는데, 보는 대상과 보는 자가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의식이 둘로 나누어진 이원화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이원화 상태에서는 보는자도 헛것이고, 보여지는 대상(相)도 또한 헛것입니다. 따라서 헛것인 보는자가 헛것인 보여지는 대상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읍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은 서로 의존하여 생겨나고 유지되므로, 보여지는 대상을 무시하면 자연적으로 보는 자도 없어지므로 결국은 바탕인 실재(實在)만 남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보여지는 상(相)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相)이란 진실한 상(相)이 아니라, 보는 자로 인해서 6감각기관에 의하여 그림자인 색성향미촉으로 잠깐 나타난 허상임을 깨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그런 것도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라는 관념조차 바로 이원화로 대상화된 말로 된 관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고, 깨달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相)들이 모두 생각으로 만들어진 망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상(相)을 깨야 된다는 것도 하나의 상(相), 즉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이라는 말조차도 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직접 상(相)을 깨버리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망상만 없애버리면 홀로 말없이 깨어있음만 있을 뿐이지요.

말없이 깨어있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주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구 보니 억지로 해야 할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네요.

그러나 다시 반조(返照)해 보세요.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