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상(相)을 떠난 그 자리가 적멸(寂滅)이다"에 대하여(2)

2013. 12. 3. 20:01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29)  

 

爾時 須菩提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이시 수보리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希有 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 聞如是之經

"희유 세존 불설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 문여시지경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히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있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히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 -

이 문장에서 <그 뜻을 깊히 깨달아>(深解義趣)라는 문구에 깊은 의미가 있읍니다.

금강경의 뜻을 깊히 이해했다는 말은 완전히 지적인 이해를 넘어섰다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표면적인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말이 표현한 뜻의 그 넘어까지 넘어가 깨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문장에 <눈물을 흘리면서>라고 이어지고 있읍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단순히 슬픔과 기쁨의 감정적인 눈물이 아니라, 수보리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어나온 공명의 메아리이며, 즉 부처님의 가르침 말씀에 완전히 감격하여 공명(共鳴)이 됬다는 표현입니다.

 

수행을 좀 오래 해서 여러가지 체험을 해본 사람들은 아마도 수보리의 눈물을 이해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깊히 감동을 받아 저절로 눈물이 난다는 것은 소위 마음의 뿌리인 공(空)의 맛을 슬쩍 맛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본인은 처음에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눈물로써 스스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갑자기 울었다고 깨달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잠시 의식 넘어를 스쳐지나갔다고 말할 수가 있겠읍니다.

이러한 유사한 체험을 하고나서 "아 ! 내가 드디어 울었다,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라고 헤치면서 자기가 대오한 것으로 착각하면 안되겠지요.

저절로 울음이 나왔다고 깨달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울음같은 체험을 겪지 못했다고 깨닫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우연하게 어떤 설법을 듣던가, 또는 수행 중에, 기도 중에, 이러한 마음의 공명현상이 스쳐가며 일어날 수도 있는 현상입니다.

 

위에서 말한 수보리의 눈물과는 좀 다른 양상이지만,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꼭 불교수행뿐 아니라, 기도, 다라니, 염불수행이나 명상수행 중에 좀 깊히 들어가게 되면 어느 때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쏫아지며 콧물이 줄줄 나오는 경우가 있읍니다.

명상 중에 무슨 생각이 회상이 되어 슬프거나 기뻐서 감정을 자극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감정없이 저절로 뒤퉁수가 훤하게 뚫리면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어떤 기운으로 인해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릅니다. 얼뜬 느끼는 것은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 머리로 올라온 무슨 강한 기운(氣運)이 머리상부에서 흘러내려와서 눈과 코를 자극해서 눈물과 콧물을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은 그것은 생각일 뿐, 아무 원인도 없이 수행 중에 갑자기 저절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때로는 통곡하며 우는 경우가 있읍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경우를 구도자가 잠깐동안 공(空)을 맛을 본 흔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읍니다만, 그것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읍니다. 

이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예이지만, 어떤 종교 신도들은 기도하다가 격한 감정이 올라와서 스스로 통곡하며 우는 경우도 있는데, 대개 시골지방의 조그만 개신교 교회 부흥회 때에 이런 장면들을 흔하게 보게 됩니다. 

 

위에서 예를 든 <눈물이 저절로 난다>는 체험 말고도 또 유사한 체험이 있는데, 구도자가 구도생활 중에 가끔 우울증 비슷하게 슬퍼지는 경우가 있읍니다.

특히 일상생활을 하면서 구도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 갑자기 모든 것이 슬퍼지고 평범한 일상사에서 어떤 아련한 추억같은 흔적을 느끼며 슬픔 비슷한 아스런한 감정이 일어나는데, 이런 경우의 구도자는 마음의 뿌리, 즉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경계 근방에서 들락날락 오르락 내리락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읍니다.

즉 수행을 열심히 할 때는 "존재의식" 경계근방까지 깊히 들어 갔다가, 주변 여건때문에 계속 깊히 명상을 지속하지 못하고 외부 일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다시 일상 분별심으로 떨어져 존재의식의 평탄한 맛을 잃어버리므로 이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의 슬픈 감정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이죠. 간혹 명상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 흔하게 나타나는 잠시동안 일어나는 마음의 슬픈 감정입니다.

마치 두서너살 어린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찾아 다니는 슬픈 감정과도 비슷합니다. 마음이 자기가 나온 근원고향인 존재의식에 잠깐 들어 갔다가 이내 거기서 빠져나와서는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향수)가 슬픈 마음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읍니다.

이것은 마치 잠시 일어나는 원인없는 우울증세와도 비슷하므로 명상하는 사람들이 간혹 이러한 멜랑꼴리의 감정에 젖을 때는 자기의 의식상태가 존재의식의 뿌리 근방에서 들락 날락하다가 떨어져 나와서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빨리 존재의식의 핵점에 안정되게끔 열심으로 수행을 해야 되겠지요. 

다시 말하면 마음의 뿌리 속(모름)에 완전히 주의가 집중되어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있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지금까지 설한 부처님의 금강경 가르침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상(相)을 상(相)이 아님으로 보라"라는 금강지혜를 말씀한 것인데, 수보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일찍히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는 말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그 동안 구도자로서의 소승의 좁은 견해에서 벗어나서 부처님의 대승적인 가르침의 깊은 뜻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가 있겠읍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 수보리가 제일 출중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해공(解空)제일이라고 해서 공의 도리에 대하여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깊은 깨달음을 가진 수보리조차도 눈물을 흘리면서 처음 듣는 깊은 법문이라고 말하니,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 소승을 벗어나는 대승의 첫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世尊 若復有人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 希有功德

세존 약부유인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시인 성취제일 희유공덕

世尊 是實相者 則是非相 是故如來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여래설명실상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읍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읍니다.

 

위의 문장에서 "믿는 마음이 청정해져서 실상이 생겼다"(信心淸淨 卽生實相)"는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읍니다.

믿는 마음이 청정해진다(信心淸淨)이라는 의미는 믿는 주체의 마음이 믿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로 공진되어서 일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심명(信心銘)에 보면 "믿는 마음(信心)은 불이(不二)요, 불이(不二)가 신심이다"라는 구절이 있읍니다.

누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둘로 나누어져서 이원화 상태가 되어 있으면 믿음이 청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도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어서 '나'의식을 버리고 부처님 말씀에 완전히 공진되어 일체가 된다면 믿는 자와 믿는 대상이 합일되어,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새는 것(有漏)가 없이, 샘이 없는 무루(無漏)가 되므로, 믿는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육조 혜능대사는 청정한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읍니다.

"비록 청정한 행을 행하나 만약 더러움과 깨끗함의 두 가지 상이 마음에 있으면 이것은 아울러 때 묻은 마음이어서 곧 청정심이 아닌 것이니 다만 마음이 얻은 바가 있으면 실상이 아니다." 라고 했읍니다.

즉 마음에 어떤 상(相)이 나타나 새어나온 유루(有漏)가 있으면 실상(實相)이 될 수가 없고, 마음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샘이 없는 무루(無漏)상태가 바로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상이란 일체 만법의 원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상태, 불생불멸하는 존재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금강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깨끗해지면 실상을 깨닫는다고 하고,

마땅히 이런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상이라는 것은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획득하여 성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상(相)은 상(相)이 아닌 것을 실상이라고 말하므로, 실상을 깨닫는 다는 것은 모든 상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상(相)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실상(實相)이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즉 대상적인 상(相)이 일체 없는 비이원화 상태를 실상(實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만일 대상적인 상(相)이 있다면,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므로 실상(實相)이라고 부를 수가 없겠죠.

따라서 희유한 공덕을 성취했다는 것은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이므로 사실 공덕을 얻었다는 것은 말이 좀 안되고, 그래서 아마도 희유한 공덕을 얻었다고 특별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얻은 바 없는 것을 얻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