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금강경의 "상(相)을 떠난 자리가 적멸(寂滅)이다"에 대하여(3)

2013. 12. 9. 10:2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29)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부족위난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信解受持不足爲難 若當來世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신해수지부족위난 약당래세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是人則爲第一希有

시인즉위제일희유

何以故 此人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하이고 차인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소이자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것, 즉 신해수지(信解受持)라는 단어는 단순히 경전의 글귀를 읽고 외워서 독송한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믿고 해오(解悟)하고 수행을 해서 도를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신해수지(信解受持)는 불교 경전을 통해서 수행하는데 있어서 4가지의 수행 단계 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信)은 불경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얻는다는 것이고, 해(解)는 불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완전히 지적인 이해를 넘어선다(解悟)는 것이고, 수(受)란 그 이해한 것을 수행으로서 실천하고, 지(持)란 실천으로써 도의 열매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해수지(信解受持)는 경전을 깊히 공부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자기는 부처님이 생존하고 계실 때에 직접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니 금강경의 가르침을 깊히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미래의 후오백세에 부처님의 경전 가르침들이 쇠퇴해 있을 때에 어떤 중생이 과연 이 경전의 가르침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아주 희유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부처가 세상에 생존하던 시기를 정법주세(正法住世)라고 하는데, 부처가 열반에 든 후에도 몇몇 대제자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으므로 정법주세라고도 합니다. 

그후 500년 이후는 상법주세(像法住世)라고 합니다. 이때는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들은 대제자는 한명도 살아 있지 않고, 단지 전해오는 경전이나 불사리탑, 불상만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상법시대라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상법시대 역시 오백년에서 천년정도까지이고, 이후에는 말법(末法)시대가 된답니다.

이 말법시대에는 불법이 쇠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불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보리의 말은 이렇게 불경의 가르침이 쇠퇴한 시대에 어떤 중생이 금강경을 믿고 해오하고 수행해서 도를 증득한다면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아주 희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희유한 사람이라는 뜻은 보통 범인을 초월한 초인(超人)의 경지, 즉 부처님과 같은 레벨의 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에게 직접 기르침을 들은 대제자들도 없고, 불경의 가르침이 점점 쇠퇴하는 말법시대에 혼자서 경전을 공부하여 도를 증득했다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나"라는 아상(我相)을 비롯해서 여기에 딸린 인상(人相), 중생상, 수자상인 사상(四相)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상,인상, 중생상,수자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은 실상(實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있다"라는 우주적 자아의식은 원래는 우주적 보편의식이지만, 육체를 자기라고 동일화 함으로써 육체를 가진 한 작은 개체를 "나"라고 축소시켜서 "자기"라고 여깁니다. 바로 허상을 자기라고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육체란 단순히 의식 안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 원소가 어떤 조건으로 형성된 인연에 의하여 이산집합되어 어느 기간 동안만 임시로 그 형태를 유지를 시킵니다.

이 육체가 태어날 때부터 항상 그대로 몸이 자라기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의 온갖 세포는 계속 수시로 죽으며 새로 생성되면서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손톱마저도 1년전의 손톱이 없읍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몇칠을 기준으로 계속 몸을 바꾸는 것이죠. 그래서 딱 짤라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읍니다. 왜냐하면 모든 몸의 각 조직은 항상 변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수만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음식이라는 연료로 계속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을 유지하는 것과 같읍니다. 이것은 상(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변하는 허상(虛相)이죠.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세포가 계속 연속해서 죽고 살고 하는 것은 파동성 에너지를 가지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음식이라는 연료에 의지하여 계속 파동성 에너지를 만들어서 마치 석유연료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4대 원소에 의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육체라는 것은 음식의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지,즉 지수화풍의 원소파동들이 스스로 인연작용으로 항상 변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언제나 변함없는 "나"라든가 "내것"이라고 지적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읍니다.

 

그렇다면 의식이나 생각이  "나"인가?

의식은 순시적으로 유(有),무(無)로 교대하며 움직이는 파동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따라서 항상 有,無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있다,없다로 변하는 극극초초단파 파동이 의식인데, 생각이란 것도 또한 이러한 기본 미세한 의식파동에 다시 덮어 쒸어서 변조된 거친 파동이 역시 생각이므로 이렇게 수시로 변하는 파동성은 항상 변함없는 내가 될 수가 없겠죠. 이것이 "나"다 라고 지적하면  그 지적한 순간에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읍니다. 말하자면 잠시 보이는 허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는 우주적 자아의식도 미세한 파동성이므로 "나"라고 말할 수 없읍니다. 미세하지만 항상 변하므로 허상입니다.

그렇다면 가짜 "나"에 딸린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러한 것들도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가짜 나, 허상이라는 것이죠.

인상(人相)은 자기가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고, 중생상(衆生相)이란 자기가 살아있다는 생명체 중의 하나라는 고정관념이며, 수자상(壽者相)이란 자기의 영혼은 영원히 영생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나"라는 기본 생각에서 파생된 고정관념인데, 이것들이 모두 "나"라는 허상(虛相)에 만들어 낸 부수적인 고정관념들입니다.

 

따라서 "내가 있다"는 생각과 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원래는 없는 상(相)이라고 수보리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實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항상 순시적으로 변하고 있는 파동성의 생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월 대보름날 쥐불놀이 할 때에 불깡통을 돌리면 불꽃으로 그려진 커다란 원을 보며 진짜 불꽃 원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읍니다.

불꽃 원은 실상(實相)이 아니라, 깡통을 돌려서 가짜로 생긴 허상(虛相)이죠.

이러한 실상(實相)이 아니다는 것을 바로 깨친 사람이 바로 희유한 사람, 초인(超人), 즉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오백세 이후에 어떤 중생이 금강경을 혼자서 신해수지(信解受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보통 범부와는 다른 초인(超人),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佛告須菩提 "如是 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 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불고수보리 "여시 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 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密 是名第一 波羅密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파라밀 시명제일 파라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수보리의 말에 전적으로 "그러하다,그러하다"고 맞장구를 치셨읍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을 듣고 놀래거나 겁내지 않으면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희유한 사람은 금강경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허상(虛相)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읍니다. 그래서 그 아상을 강화하고 키우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하고, 인생의 목적 자체가 자기가 생각한 상(相)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심지어 깨달음을 구하는 것 조차도 일종의 상(相)을 쫏는 것이죠.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相)은 허상이며 없다고 하므로 이런 말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겠죠. 놀라지 않으면 아예 무시하고 피해버리겠죠. 자기의 커다란 인생의 목표, 삶의 목표가 아무 것도 아닌 허깨비상이라는 것에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가 쌓아논 명예와 인기, 재산, 실력, 권위, 세력 등을 단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지는데, 겁내지 않을 사람이 권력자나 재산가나 유명인 중에서 몇명이나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일부러 외면하겠지요.  따라서 금강경을 읽으며 겁내지 않고 놀래지 않고 만고의 진리라고 이해를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이미 보통 범부와는 다른 희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속세를 초월한 초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부처님이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이야기 주제와는 좀 다른 엉뚱한 제일 바라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은데, 실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제일바라밀이라는 것은 불교의 핵심,즉 반야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읍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 상(相)을 상(相)으로 보지 않는다"라는 금강반야지혜를 제일바라밀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금강경에서 가르쳐 주는 주요 주제는 "언제나 어디에나 머물지 않고"(無住)", "상(相)에 집착하지 않으며"(無相)", "언제든지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無欲)"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일바라밀이라는 금강같은 반야지혜일지라도 머물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제일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 바라밀일 뿐이다,라고 금강경의 반야지혜조차도 공(空)으로 돌려 버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금강경의 귀한 가르침을 듣고도 놀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는 희유한 사람은 금강경의 주요 가르침인 제일 바라밀, 즉 반야지혜조차도 공(空)으로 돌려 버리고, 그 공(空)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보통 범부와는 다른 희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속세를 초월한 부처 경지에 올라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떤 것에도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이며, 심지어 지금 여기 당처(當處)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이 금강경의 반야지혜조차도 이름일 뿐이니 집착하지 말고 버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