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9. 20:12ㆍ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마두카르 : 우리는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닙니다. 지고의 힘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닙니다.
란지트 : 무지는 탐구와 이해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탐구하고 이해하면 무지는 사라진다. 하나의 성냥개비에서 나오는 빛으로 어둠은 사라진다. 그처럼 지식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그대는 어떤 것을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존재의 관찰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잊는 것을 넘어서 영화의 스크린처럼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이 그 위에 비쳐졌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스크린은 자기 위에 펼쳐지는 장면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꿈과 상관이 없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는 모든 것이 꿈이었고 실제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두카르 : 이러한 가르침을 깨우치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때 깨닫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은 그저 잘못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인식입니다.
란지트 :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전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 존재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세상 전체가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우주의 자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육체에 한정된 자아는 남지 않게 된다.
소금 알맹이가 바다에 떨어지면 녹아서 바다가 된다. 바다와 분리된 소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란 자신이 외부와 분리된 하나의 실체라는 믿음이다.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무지이다. "나는 육체다"하는 믿음이 바로 무지이다. 그대는 육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만일 육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분리된 '나'라는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통해 이러한 통찰을 깊게 할 수 있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눈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본다. 귀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듣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꿈일 뿐이다.'
우주의 힘은 이러한 모든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아무도 잠자고 있지 않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궁극의 지혜를 점점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는 많은 것이 지나가지만 스크린은 스크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끝'이라는 자막이 오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은 극장을 떠난다.
마두카르 : 이 순간의 대화도 삶의 꿈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야기는 펼쳐졌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체의 스크린은 그대로 남아 있읍니다.
란지트 : 내가 말할 때, 나는 꿈의 한 부분으로서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꿈에 영향받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사람만이 꿈에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순간에 살인자는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에는 옳은 일을 한다고 느낀다. 그는 상대방이 살해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육체와 함께 하면서 모든 꿈이 시작된다. 육체는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것도 꿈의 한 부분이다. 30분 후에 나는 병원에 가서 심전도의 결과를 봐야한다. 만일 육체에서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단지 그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반응을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의 한 부분이며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가 잠들지 않고 먹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음은 자신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내가 하고 있다. 내가 먹고 있다" 그러나 거기 '나'라는 것이 없다면 '하는 것'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라.
우리는 꿈 속에서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그 사람은 잠을 자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깨어있는 꿈'에서도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알고 이해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크라데스가 말했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면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마두카르 : 선생님이 설명하신 것을 구도자들이 수행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읍니다. 우리는 그러한 수행도 꿈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란지트 : 모든 것이 꿈의 일부이다. 구도자들의 수행 역시 꿈의 일부이다. 그러한 사실에 귀를 기울이면 구도자는 자신이 꿈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행은 그러한 깨달음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한 깨달음이 일어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아간다. 마치 바람 속의 나뭇닢처럼 산다. 욕망이나 의지를 가지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인다. 그러한 사람은 걱정할 일이 아부 것도 없다.
마두카르 : 그러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여기에 앉거나 앉지 않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란지트 :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사람이 무엇을 하겠는가?
마두카르 : 최선의 수행법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란지트 : 진정한 스승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최선의 수행이다. 무지는 진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진리를 듣고 그것을 되새기면 무지는 사라지게 된다. 진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되새겨야 한다. 그대는 태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그대에게 무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그대의 진아는 무지로 가득 찼다. 너무나 많은 무지가 그대의 자아에 부어졋다. 그래서 그대의 진정한 모습을 가려 버렸다. 그대는 자신의 진아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스승의 말을 들음으로써 그러한 무지는 사라진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교사가 가르친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학생은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듣는 것만으로 그의 무지는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설명한 것을 수행하여야 한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스스로 스승이 된다. 그때 제자가 스승이다.
마두카르 : 진정한 스승은 누구입니까?
란지트 : 스승은 살아 있어야 한다. 진정한 스승은 구도자의 삶에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변화가 없다면 그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학교에 다닌 학생은 자신의 지식을 증명하는 학위를 받고 학교를 떠난다. 그래서 의사가 되고 기술자나 교수가 된다. 이제 학생들이 그를 찾아와 배우게 된다. 이것으로 내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다. 이제 이야기를 마치자. -끝-
* 란지트 마하리지에 대하여
슈리 란지트 마하리지는 1912년 봄베이에서 의류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던 1924년 스승, 슈리 사라르타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를 만났다. 슈리 싯다라 메쉬바르는 193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바로 깨달은 스승, 슈리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1887~1981)이다.
란지트 마하리지는 술집 지배인을 포함한 여러가지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회계원이 되었고 1992년 은퇴할 때까지 40년 동안 회계원으로 일했다. 그는 슈리 싯다르메쉬바르의 친척이 와서 만트라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던 1983년 부터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그는 봄베이에 있는 그란트 로드에서 한 칸짜리 방에 살고 있다. 그 방에서 그는 구도자와 제자를 맞이한다. 그 방은 하나의 아슈람이 되었다. 하루에 두 차례 사트상이 열리고 다른 아슈람과 마찬가지로 '바잔'이라는 찬가를 부른다. 일요일이면 마하리지는 봄베이 북부에 있는 강당에서 200명의 제자를 모아놓고 마하라슈트라주의 언어인 마라티어로 사트상을 연다.
그의 사트상에 참석하는 서양인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슈리 마하리지는 해외에 나가 가르침을 펴기도 했다. 그는 1996년 미국과 몇몇 유럽 국가를 방문했다.
-마두카르의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얻은 자유"에서 발췌-
<란지트 마하리지>
<란지트 마하리지 및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스승인 싯따르 메쉬와르 마하리지>
<싯따르 마하리지의 스승인 님바지 마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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