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는 죽지만 그대는 죽지 않는다.(1)

2013. 6. 30. 09:37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이글은 독일인이면서 구도자인 마두카르 톰슨이라는 사람이 인도의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찾은 자유]라는 책에서 란지트 마하리지와의 대화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은 2003년도에 '정신세계사'에서 손민규씨의 번역으로 출판된 책입니다>

 

- 란지트 마하리지를 처음 만난 것은 라메쉬발세카의 스승인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와 같은 스승을 모신 그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2년반 후인 1996년 4월에 다시 한번 그를 찾아 갔다. 그때에는 슈리 안나말라이 스와미의 제자인 순더람과 함께였다.

안나 말라이 스와미가 세상을 떠난 후 순더람은 스승을 찾아다니는 순례에 나와 동행하고 싶다고 청했다. 나는 찬성했다. 파파지의 경우에는 순더람만 넉나우로 보냈다. 다음의 대화는 우리가 란지트 마하리지를 방문했을 때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다. 그의 제자 두명도 함께 있었다. 

 

마두카르 : 선생님은 1983년부터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의 제자가 깨달은 일이 있습니까?

 

란지트 : 나는 지식을 전달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제자의 문제이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마두카르 : 이제까지 선생님의 제자 중 에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선언한 사람이 있습니까?

 

란지트 : 나는 그들에게 그런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가 깨달았다고 말한 제자는 없었다.

 

마두카르 : 만일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란지트 : 인도의 전통에 따르면 제자는 스승이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존재 앞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선언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일상생활에서 제자의 행동을 보고 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

 

마두카르 : 지금 말씀과는 반대로 어떤 스승들은 자신의 제자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란지트 :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왜 스승이 제자가 깨달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염려해야 하는가?

 

마두카르 : 어떻게 보면 깨달음 역시 꿈의 일부라는 말씀입니까?

 

란지트 : 그렇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증명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스승이 제자를 깨닫게 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실이 아니다. 스승이건 제자이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 모든 현상은 그저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어떤 조작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삶이 그저 꿈에 불과하다면 어떤 조작이 필요하겠는가?

깨달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제자가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은 그 하나의 일부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하나이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말하는가?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도, 깨달음을 얻지 못햇다는 말도 필요하지 않다. 드러나는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이는 것은 모두 꿈이다. 그리고 꿈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환상이다. 어떤 사람이 백만장자가 된 꿈을 꾼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는 일순간에 거지가 된다. 그러한 꿈과 깨어난 상태 모두가 꿈이다.

 

마두카르 :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아무 소용도 없습니까?

 

란지트 : 물론이다. 깨달음에 쓸모가 있다면 단 한가지다. 깨달은 이는 평화롭게 산다.

 

마두카르 : 만일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을 전할 수 없다면 스승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란지트 : 스승에게는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밖에 없다.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제자는 스승이 하는 이야기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와 별개로 다가온다. 제자는 그일이 닥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과 이해가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알고 느끼게 된다.

자신이 깨달았는지 알지 못하는 그러한 깨달음이 있을 수 있는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스승들은 모두 무지한 것이다.

공부를 마친 후에야 사람들은 변호사나 의사가 되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 나간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이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해가 완성되면 사람은 그러한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된다.

지식을 나눌 때가 되면 그의 마음에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난다. 공개적인 강연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두카르 : 그것은 설교가 되겠군요.

 

란지트 : 구도자는 다만 스승에게 와서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으면 된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찾아 나서면 된다.

 

마두카르 : 선과 악에 대한 설교는 꿈에 불과한 현상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은 꿈 속의 선한 부분에 욕심을 내게 하고 악한 부분은 없애려고 애쓰게 합니다. 그러나 욕심이나 기피 역시 꿈의 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삶이라는 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꿈에서 깨어난 사람만이 바꿀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 날 수 없습니다. '나'라고 불리우는 몸과 마음의 유기체가 변하고 있는 꿈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의 본성은 변화없는 의식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란지트 : 꿈을 바꾸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이 꿈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마두카르 : 어떤 스승은 구도자의 그릇된 꿈이 수행을 통해 올바른 꿈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스승은 구도자들에게 그릇된 인생을 올바른 인생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떤 스승은 세상의 모든 그릇된 꿈을 올바르고 선한 꿈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합니다.

 

란지트 : 나도 그러한 약속을 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가능하지 않다.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귀를 기울인다. 그것만이 제자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꿈을 바꾸겠다는 것도 꿈의 한 부분이다.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무 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알았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 역시 꿈의 한 부분이다. 꿈은 생각이다. 그리고 생각은 무지를 의미한다. 그러한 무지는 올바른 지식에 의해서만 제거 될 수 있다. 어둠은 빛의 존재에 의해서만 사라진다. 어둠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둠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스승의 힘, 지혜의 힘에 의해서만 사라진다.

 

마두카르 : 라마나 마하리쉬는 '나'라고 하는 첫번째 생각에서 다른 모든 생각과 온 세상이 비롯된다고 하셨읍니다.

 

란지트 : 근원은 '하나'이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그 하나이다.

 

마두카르 : 따라서 모든 생각은 그 하나의 일부입니다. 그렇습니까?

 

란지트 :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파도는 물 위에서 움직인다.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 간다. 물은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생각은 변하지 않는 그 하나의 내부에서 밀려오고 밀려간다.

 

마두카르 : 저의 생각이나 순더람의 생각, 그리고 선생님의 생각이 모두 그 하나의 생각이라는 뜻입니까?

 

란지트 :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깨달았겠는가? 왜 누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모든 사람은 그것이다. 모든 존재가 그것이다. 왜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그가 깨달았다고 말하는가? 그런 일은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어떤 사람을 지목하는 것도 그대의 꿈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한 부분이다. 깨어나면 그 꿈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그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연기를 하고 있다. 그대는 무대에 선 배우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육체가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 깨달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경전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 가장 위대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진다. 만일 그들이 유명해지면 라마신이나 크리슈나신도 이류 영웅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다. 사람들은 태어나지만 머지않아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은 사라지지만 그 하나의 생각은 계속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그 하나의 생각이며 그 언어다. 자신이 절대의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최상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말은 자신의 자아에서 나온다. 그들의 자아가 스스로를 스승이라고 믿게 한다. 그들의 자아는 자신들이 알고 있으므로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누구도 스승이 아니고 누구도 제자가 아니다. 모든 것은 그 하나이다. 나의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햇다.

"존재하는 것은 그 하나 뿐이다. 매일 한 시간씩 나는 나의 진아에서 걸어나와 강의를 한다. 그 시간 동안 그대는 나의 제자이고 나는 그대의 스승이다. 스승으로서 나는 가르침을 편다. 그러나 나머지 스물세시간 동안 나는 나의 진아 안에 존재한다."

그 하나는 진아에 있다. 그 하나는 진아이다. 가르칠 때, 가르치는 사람은 스승이된다. 무지한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스승이 된다. 자신의 무지를 내몰고 싶어하지 않으면 스승은 웃고 말한다. "좋다, 무지 속에 머물러 있어라.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 우리는 만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떤 정해진 방식대로 행동하고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은 내게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두 종류의 사람 모두 개인으로서의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다. 더 이상 이해해야 할 것은 없다. 일어나는 일은 존재의 근원에서 일어난다.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분리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분리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리된 실체라는 것은 관념에 불과하다. 그런 존재는 없다. 분리된 실체는 삶이라는 꿈 같은 환상 속의 더 큰 환상이다.

실제로 사람을 만난 후에 주소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주소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대는 주소를 보고 그 도움을 받아 나를 찾아 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르침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불필요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것은 신이나 진정한 본성,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언어의 개념과 의미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가리킬 뿐이다.

그대는 스승의 언어를 실존적으로 체험하여야 한다. 그대는 가르치기 위해서 동원된 언어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언어는 머리에서 나온다. 경험은 머리를 넘어선다. 그대는 경험이다. 스승은 그대에게 진정한 것을 줄 수가 없다. 그대는 그와 함께 그곳으로 갈 수가 없다. 그저 그대에게 길을 가리키며 저 곳으로 가라고 할 뿐이다. 그대가 스승의 말을 받아들이면 그 체험은 더 이상 언어나 관념이 아니다. 그때 모든 언어는 거짓된 것이 된다. 일단 그곳에 가면 모든 설명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장소'에 대한 실존적인 경험만이 진정한 것이다. 그대 자신의 이해와 경험은 그대의 진정한 본성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란지트는 순더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스승이 육체를 떠난 이후 이슈람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다음회 계속)

 

                     -마르카르 톰슨의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찾은 자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