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길- 새의 길, 개미의 길.

2009. 5. 19. 21:14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방문자 :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이 만트라를 주어서 명상하도록 하는데,

그 만트라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있읍니까?

 

란짓트 마하리지 :

깨달음을 구하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읍니다.

새의 길(이해) 혹은 개미의 길(명상)이 있읍니다.

명상수행(또는 개미의 길)으로도 깨달을 수가 있읍니다.

어떤 단어나 명칭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대가 그대의 부모로부터 받은 그 이름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해 왔읍니다.

만트라는 깨달은 스승이 전수해 줍니다만,

그러나 이 방편은 참나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입니다.

만트라를 외거나 암송하는 수행으로 그대는 절대진아를 깨칠 수도 있읍니다.

말을 빼놓으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전체 우주가 오직 말뿐이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오직 두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실재(實在)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입니다.

아주 단순한 한마디 단어가 환상을 벗겨낼 수가 있읍니다.

 

만일 그대에게 아주 적대시하여 웬수지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대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가 그대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단 한순간에 즉각 바뀔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한 생각만으로도 그대를 깨닫게 하는데 충분합니다.

이 명상수행방편은 아주 오랜시간이 걸리는 단순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나의 스승(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은 아주 짧은 시간에, 

생각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을 찾아냈읍니다.

그대가 보잘것 없는 하나의 왜소한 생명체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는 거대한 우주보다도 더욱 더 거대하여 모양도 없이 무한하고 단일한 어떤것(앎)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왜 안되겠읍니까?

만일 그대가 이 <새의 길(鳥道)>인, 생각하는 방편에 의하여 진아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면,

그대는 명상수행 방편(개미의 길)으로 갈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이 명상수행의 방편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방편)이고,

그대는 하루에도 대부분의 시간동안 계속 명상수행을 해야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명상을 한다고 말들 하지만, 대부분은 명상하는 방법조차 잘 모르고 있읍니다.

그들은 "神은 하나이고, 나 자신은 또 다른 한 개체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원화(二元化)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편으로 수행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그 마지막 결말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받은 단 한마디 말만 가지고 충분히 깨달을 수가 있읍니다. 

단 한마디 말이 많은 말들을 짤라버릴 수 있읍니다.

한 생각이 단 한순간에 모든 생각들을 짤라 버릴 수가 있읍니다.

그 단 한마디 말이 그 말 넘어로 그대를 데려다 줄수가 있읍니다.

그 말 넘어에 있는 것이 진정한 그대 자신입니다.

명상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 그대의 에고인 명상자, 명상행위가 삼매 속에 잠기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그대 자신(진아)만 남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머나먼 길을 돌아 가는 방법인데,

지금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긴 시간이 요구되는 수행을 할 시간이 없읍니다.

요즘 사람들은 또한 너무나 바빠서 죽을 시간조차 없다고 말들 합니다.

그들은 항상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자기 볼일을 좀 해결하고 나서, 그런 다음에 그대를 만나자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요즘 너무나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나의 스승은 아주 짧은 시간에 수행하는 방편을 발견했읍니다.

그대는 말과 생각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리 그 자체라고 확신을 가지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생시의 삶 속에서는 오직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말이 없다면, 어디에 이 세상이 있겠읍니까?

만일 그대가 이름이 없다면 그대의 개인적인 에고가 어디에 있읍니까?

 

그대의 부모가 그대에게 하나의 말을 주었고, 그대는 그것이 되었는데,

그대는 그말을 굳게 믿고는 아주 힘차게 살아왔읍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으로 사용 될 수가 없읍니다.

무엇을 해야 될까요?

세상 대부분의 스승들이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가르쳤고,

여러분들은 이것을 믿고 따랐읍니다.

그대들이 태어날 때는 이름이 없었는데,

이름이 그대에게 주어지고 나서,

이것을 믿고는, "나는 이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스승이 그대에게 한마디 말(만트라)을 주면,

그대는 그것으로 명상을 할수 있고,

그것으로 계속 수행해 나갈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머나먼 수행길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마지막에는 명상하는 자, 만트라 자체가 사라져야만 하고,

그대 자신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그대가 진아가 됩니다.

이것은 오랜시간이 소요됩니다.

개미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데,

만일 개미가 나무에 기어오르려다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이 개미는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환생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새는 나무에서 나무로 시간을 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날아 다닐 수 있읍니다.

나의 스승(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은 <새의 길>을 발견했읍니다.

그는 자기 스승에게서 <개미의 길>로 가르침을 받았읍니다.

나의 스승의 스승인 바우사헤브 마하리지는 명상수행법의 전통(주:삼뿌라,비이원론 베단타 계통의 철학이론과 스승에게서 비밀리에 직접 전수받는 전통 만트라 명상을 겸하는 수행체계)을 계승했읍니다.

그는 1914년에 육신을 떠났는데,

그 시대 사람들은 깨달음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리 예민하지를 못한 것 같읍니다.

나의 스승과 함께 네사람의 수행동료가 있었는데,

나의 스승은 더 짧은 기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을 찾고자 했지만,

다른 동료수행자들은 (돌아가신 스승께서 전수해준) 명상방법(만트라수행)이 있는데, 굳이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동조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나의 스승은 혼자서 비자푸로 갔읍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최종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다른 방편을 발견할 것을 결심했읍니다.

그는 9개월동안 꼼짝하지 않고 명상 속에 앉아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가장 쉬운 방편을 꼭 발견해야 겠다고 결심했읍니다.

그는 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도량이 대단해서,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읍니다.

그는 자기 스승을 만나기 전에는 보디빌다(역도 선수) 였었는데, 쉬지 않고 앉아서 역기를 천번을 들어올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한 친구가 바우사헤부 마하리지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어서, 그는 정신수행에 대해서 뭔가 배워보려고 마하리지를 방문하게 되었읍니다.

그는 겨우 6년정도의 기간동안 바우사헤부 마하리지와 같이 있었지만,

입문한지 4년후에 속세를 등지기로 마음먹고,

한사람의 수행 제자로써 스승의 가르침을 일반사회에 펼치고 있었읍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명상법을 가르치다가, 그곳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는데, 그 명상법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방편을 발견하기 위해서 였읍니다.

비록 그의 스승에게서 유일하게 배운 명상법에 대하여 마음에 담고 있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원했읍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눈먼 믿음이 아닌,명확히 밝히고자 밝은 눈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결국 9달 동안의 좌선을 한 후에, 바후사헤바님이 그의 앞에 나타나서 말했읍니다.

"됬다 ! 이제 너는 깨달았다. 내가 인가한다. 그러니 너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봐라 !"

 

명상수행은 그것 나름대로 훌륭한 것이지만,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더욱 빨리 도달할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그는 <새의 길>을 가르치기 시작했읍니다.

경전들은, 첫째로 세상을 포기하고 나서, 그 다음에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읍니다.

맨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쳐 주어서 그것을 이해를 시키고 난 다음에,

만일 그 구도자가 세상을 포기하게 되드라도,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한 것 없이 세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읍니다.

그러나 그대가 지각하고,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비실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만일 그대가 세상을 포기한다면, 그때는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될 때에,

그대가 세상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선택하여야 할것이 무엇이 있겠읍니까?

 

그래서 그는 세상을 포기하는 제자들에게 말하길,

"가서 구걸하며 살아라.전 세상이 그대의 집이다."이렇게 말했읍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제자가 스승에게 되돌아 오면, 그들에게 말하길,

"이제 세상을 포기하는 그 자체마저 모두 포기해 버려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無가 진리라는 것을 깨쳤을 때에 포기할 것이 무엇이 있겠읍니까?

포기한다는 것도 에고적 행위입니다.

세상 삶 속에서 평범하고 단순하게 머므르십시요.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지막 가르침을 확고하게 얻을 것입니다.

앎이라는 것 조차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앎마저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대가 바로 그것(진아)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게 됩니다.

 

                                                       -  란짓트 마하리지,1998.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