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30. 10:21ㆍ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1. 현시대 한국 불교의 간화선은 묵조적 간화선이다.
대혜선사 서장을 한달 16일동안 62회에 걸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연재를 하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무사이 끝냈읍니다.
그런데 그냥 끝내기가 좀 아쉬운 점이 남아 있어서, 그 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간화선에 대한 몇가지 개인적 견해를 간단히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화선을 "화두의심이라는 망상을 붙들고 앉아서 어떻게 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반사람들은 간화선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고위 승려들은 마음이 정화되었 있지 못하고 일반사람들보다 더 욕망이 많고 거친 언행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화선에 대하여 책이나 이론적인 것만 이해하고 실제로 간화선 수행을 깊히 해보지 않은 사람은 간화선 수행자들이 옛스승들의 공안을 가지고 허구헌날 개가 바짝마른 개뼉다귀 활듯이, '화두의심'이라는 망상을 계속 붙잡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애처롭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 선수행의 경력이 많은 고위직 승려들의 불미스러운 정치사회적 언행과 수행자 조직사회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룸쌀롱 출입, 술 담배 도박 같은 일부 밖으로 드러난 난삽한 행동으로 인해서, 한국불교 조계종조직과 간화선이라는 수행체계에 대하여 일반인이 회의감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겠읍니다.
이 글을 쓰는 무한진인도, 도를 몇십년이나 산속에서 닦고 조계종 조직 내에서 깨달았다는 인가까지 받았다는 주지급 고위직 승려들이 자기 개인적인 욕구불만을 사회언론에 공개적으로 터트리며 사회 혼란에 한목을 담당하는 등, 또한 일반 시중 잡배들처럼 룸살롱이나 드나들고, 저녁에는 술 담배를 하는 등, 불교조직,선수행 지도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을 보고는, "이거 간화선이라는 수행체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간화선에 대하여 좀 더 깊숙히 고찰해 보기 위해서 여러가지 관련 책자를 다시 뒤져 보기도 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간화선 창시자인 대혜선사의 서장을 면밀하게 관찰해 보기위해 시중에서 '대혜선사 서장'에 관련된 책자만 7권이나 구입을 해서 종합적으로 비교 관찰해 보면서, 겸사로 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재편집하여 매일 부로그에 올렸읍니다.
서장을 부로그에 재편집해서 올리면서 동시에 검토해보는 과정 중에 현시대의 한국 조계종에서 수행하고 있는 간화선 수행법과 대혜선사가 최초로 말하는 간화선 수행법 간에는 차이나는 점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읍니다.
대혜스님이 서장에서 사대부들에게 가르쳐 준 간화선 수행요령과 현시대 한국 간화선 수행법이 전혀 다른 것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항은 간화선 수행의 기본자세를 현재는 주로 좌선(坐禪) 위주로 실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에 간화선 이론서를 쓴 여러 스님들과 몇몇 불교학자들이 간간히 지적하고 있는 논란 사항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떤 다른 방편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통적인 수행법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현직 불교계의 간화선 지도자들이 전혀 개선할 어떤 대책이나 실제 방편은 내놓고 있지 않고 가끔 세미나 현장에서 말로만 잠깐 언급하다가 시지부지 하는 것 같읍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화선을 조용한 실내의 방석위에 편안히 앉아서 눈을 반개하고 참선을 하다보면, 대부분 수행자들이 화두의심보다는 화두 관(觀)수행으로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으며, 관수행을 하다보니 저절로 고요함에 빠지는 혼침(昏沈) 또는 깨어서 잡념 속에 파뭍이는 산란(散亂)상태로 좌복 위에서 수행시간을 그냥 아무 의미없이 흘려 보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좌복에 편안히 앉아서 화두의심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화두를 생각하면서 속으로 되뇌이거나 공안 낱말만 자꾸 회상하려고 애쓰는데, 이것은 화두를 의심하는 간화선이 아니라, 화두 관(觀) 수행하는 것이 되어, 지구가 꺼질 때까지도 화두를 깰 수가 없는 잘못된 수행자세인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주로 사대부(고위관료들)들을 상대하여 간화선을 가르쳐 준 까닭은 그 시대에 이미 기존의 조사선 전통이 점점 쇠약해지기도 했지만, 대혜스님은 멀리 지방의 산속 절에 주재하고 있고, 사대부들은 임금이 있는 궁궐 주변의 서울도시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에게 편지로서 구도법을 가리쳐 주기 위해서는 옛 스승들의 유명한 공안을 이용해서 행주좌와 일상생활 속에서 도를 공부하는 법으로는 가장 적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화선은 처음에는 순전히 수도승이 아닌 일반 대중들을 위한 생활선으로 창안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세월이 흘러 가면서 점차로 간화선이 선수행 사찰에서 전문 수도승들의 수행방편으로 정착되므로서 자연스럽게 묵조선의 좌선(坐禪)형태로 간화선의 수행자세가 변화해간 것 같읍니다.
원래 전통 조사선은 깨달은 스승과 제자간에 일대일로 직접 만나서 문답으로 서로 주고 받으며 가르쳐 주고, 제자가 즉시 깨닫지 못하면 스승의 말을 계속 파고 들면서 그것을 참구하는 것이 조사선 수행법이었읍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런 스승과 제자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적어지고, 과거의 옛선사들의 유명한 말씀(公案)을 다시 반복해서 공부하는 분위기가 세워지고 그런 공안책자들이 수행자들의 참고서가 되는 바람에 공안선이 점점 유행하게 되고, 원래 조사선이 점점 쇠퇴하게 된 것이죠.
오조 법연과 설두스님, 원오스님을 거쳐서 이러한 공안선 공부가 유행하게 되고, 드디어 대혜스님대에 걸쳐서 간화선이 실참선수행법으로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더우기 무문혜개의 무문관으로 간화선이 완전히 전문 수도승들의 수행방편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대혜스님도 절 안에서 수하 제자들을 직접 지도하는데는 옛스승들의 공안을 이용한 간화선 방편보다는 오히려 조사선 형식으로 직접 지도했던 것 같읍니다.
그러나 승려들이 아닌 일반인들인 사대부 관료들은 직접 대면하여 가리쳐 주는 조사선 형식을 이용할 수가 없으므로, 서신에 의한 원격 가르침의 편의상 조사선의 대용(代用)으로서 옛 스승들의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을 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그래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대용품 또는 짝퉁 모조품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혜스님이 간화선을 사대부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당시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을 강력하게 거부하며 그 상대적 방편으로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보급한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묵조선에 대하여 지극히 강한 반발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스스로가 조동종에 있을 때에 묵조선을 직접 접해 보았기 때문에 그 폐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읍니다.
그런데 사실 원래 불교 수행체계는 기본적으로 묵조선이 오랜 불교 전통 수행체계에 간화선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이전에 이미 인도 베단타 계통에서는 묵조선과 유사한 사마타, 삼마발제 수행법과 위파사나가 서로 섞인 비슷한 지(止),관(觀) 수행들이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었고, 가까이는 달마의 벽관(壁觀), 4조 도신의 염불(念佛法: 이것은 현시대의 나무아미타불같은 염불선이 아니라, 사마타수행과 비슷한 무념 수행법), 대승기신론 및 천태스님의 지관수행, 등이 모두 묵조선의 선조격 수행법들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대혜스님의 간화선은 불교수행 역사상 갑자기 중국 송나라시대에 툭 튀어나온 돌연변이 수행법이죠.
물론 간화선 내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통적 고유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한 불교에서 가장 수숭한 위없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읍니다만, 원래 전통 불교 수행법과는 형식상으로 돌연변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대혜선사가 그런 전통적 방편이 전수된 묵조선을 전적으로 비난한 이유는 묵조(默照) 그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묵조선을 하는 수행자들의 구태의연한 수행자세와 풍조를 비난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묵조(默照) 그 자체는 옛스승들이 절대본체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적인 말로써 "말없이 고요히 비춘다"라고 말한 것일 뿐, 그 묵조라는 말 자체가 절대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 절대본체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알수도 없읍니다.그런데 아직 이원화된 분별의식도 그대로 두껍게 껴입고 있는 수행자가 가만히 눈감고 앉아서 방편으로 말한 '고요하게 비쳐본다'는 행동으로 절대본성을 흉내내고 침묵하고 앉아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깜깜한 귀신굴에 빠져 있는 상태일 뿐이며, 그런 수행방편으로는 이원화된 분별의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비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묵조(默照)는 절대 본성의 특성을 방편으로 말한 것은 맞지만, 그 방편적인 헛말을 가지고 묵조선(默照禪)으로서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다면 한마디로 개념적인 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짓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짜 묵조(默照)는 항상 어떤 것 그 넘어에, 아무도 텃치 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그곳에 모양과 특성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묵조선을 비난하면서 사대부들에게 간화선을 열심히 가르쳐 주면서 적극적으로 전수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묵조선을 강하게 비난한 까닭에 대혜스님을 싫어하는 적이 많이 생겨나게 되고, 그 당시 사대부들 중에서 묵조선을 수행하는 파벌들에게 모함을 당해서 15년 동안 승적을 뺏앗기고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계속 서울의 잘 알고 친한 사대부들과 편지 교류로서 끊질기게 간화선 가르침을 펼쳐서 결국 간화선을 수행하는 사대부(이참정)가 권력을 잡고서야 대혜스님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고 선승으로써 명예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그 연고로 간화선이 현대까지 무사히 전수되어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모든 수행법이나 종교들이 실은 이렇게 그 시대의 정치적인 권력과 연계되어 그 생존의 명맥을 유지하거나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 같읍니다.
그런데 대혜스님이 묵조선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비난한 부분은 "조용한 실내에 눈감고 앉아서 침묵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즉 좌선(坐禪)하고 앉아 있는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자세에 대하여 비난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묵조선은 그 기본자세가 정좌하고 말없이 앉아 있는 좌선이 바로 기본 방편입니다. 한마디로 좌선(坐禪)이 바로 묵조선(默照禪)의 기본입니다.
또한 이 좌선 자세는 불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수행법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대혜스님은 이 좌선자세로 묵조선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 말없이 귀신굴에 들어 앉아 있다"고 비난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서장에서 간화선은 절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지말고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의 일상 생활을 병행하면서 끊어지지만 말고 항상 화두를 들라고 강조하고 있읍니다.
만일 앉아서만 수행을 한다면 곧바로 깜깜한 귀신굴의 혼침속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대혜스님이 초기에 간화선을 가리쳐 줄 때는 절대로 좌선(坐禪)만 전적으로 하지 말라고 몇번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좌선자세 자체를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간혹 하되 전문으로 앉아만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조계종 산하 선원과 사찰에서는 1년에 여름과 겨울철에 선방에서 몇개월씩 참선 정진기간을 두어 오직 좌선 위주로 선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기간에 수행자에 따라서는 밖에서 걸어다니는 행선(行禪)을 일시적으로 하기는 하지만, 주로 좌선 위주로 철야정진 또는 장기간의 출입문을 폐쇄하는 무문관 정진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병행해서 간화선 수행을 하라는 간화선 창시자 대혜스님의 말씀하고는 정반대로 시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간화선의 좌선위주 수행에 대하여 몇몇 학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불교의 전수과정상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형태로 개선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가볍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간화선 창시 때와는 그 수행형식이 변했더라도 그 나름의 역사적 여건이 자연스럽게 수정되어진 결과일 뿐이지, 그 좌선형태자체가 수행진전에 방해가 된다고 가볍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행방식은 주위 환경에 적응하여 계속 진화되는 것이고, 그 결과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으므로 그 좌선 자체가 잘못된 방편이라고 일방적으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좌선 위주의 간화선에서 어떻게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운용의 묘를 발견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현재의 좌선 위주의 간화선은 대혜가 강력하게 비난하는 묵조선과 동시에 대혜가 주창한 간화선이 결합된 형태로 참선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이 바로 묵조선의 기본 자세이며, 묵조선의 자세에서 간화(화두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 수행방식은 대혜가 반대한 묵조선과 대혜가 제창한 간화선이 결합된 묵조적인 간화선이라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는 것 같읍니다.
그래서 현재 좌선 위주의 간화선 실참방식에 어떤 결점이 있으며, 수행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간화선 수행을 해야지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인 수행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되겠지요.
좌선 위주로 묵조적인 간화선을 하는 방식에는 대략 어떤 결점이 있을까요?
왜 간화선하는 수행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달기가 어렵고, 또한 깨달은 수행자가 드물게 나올까요?
왜 간화선에서 깨달았다고 인가받은 고위승려들중 어떤 사람은 인격적으로나 언행이 보통사람과 별로 다를바 없이 저속한 행동을 보일까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직접 자기가 간화선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실참해 보고 끝장을 보아야 풀릴 문제이겠지만, 어느정도 수행을 하고 이론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나름대로 개인 견해를 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위의 예시된 문제들은 그냥 허공에 제시해 보고,
그 동안 제가 직접 수행해 보면서 연구해본 간화선의 기초이론과 실참요령에 대해서 아는 대로 두서없이 그려 보겠읍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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