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수행에서 "화두의심"의 그 구조적 원리

2012. 10. 30. 10:30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간화선에 대하여 한마디 (2)

 

간화선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처음에는 간화선 입문서나 여러가지 참고서적을 읽고 전문 강사나 선승들에게 간화선의 개략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듣읍니다. 그런데 어떤 책이나 선승들의 강의에도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어떤 심리적 작용구조에 의하여 깨달음에 도달하는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곳은 거의 없읍니다.

다만 화두를 끊임없이 의심하면 의정(疑情)이 생기고, 더 나아가 의단(疑丹)이 형성되면 전체가 화두의심으로 하나가 되고, 또 더 나아가면 은산철벽에 갖힌 것 처럼 꼼짝 못하게 되고, 그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화두가 타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해 주지만, 이러한 수순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그 원리구조를 명쾌하게 풀어주는 스승이나 간화선 안내서가 별로 없읍니다.

 

그리고 화두 수행 중에 잘못되는 혼침(渾沈)과 도거(悼擧,散亂心), 무기(無記)또한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에 10가지 잘못되는 무자화두병도 그런 잘못되는 것이 무엇때문에 그런 잘못된 일이 생기는지는 구조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책자들이 별로 없읍니다.

이러한 간화선 수행법에서 초보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에 대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물리학적 구조의 모형을 예를 들어 이것을 이용해서 화두선 의심수행이 어떻한 과정으로 깨달음까지 이르는 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연구해 보았읍니다.

 

도(道)를 닦는다는 일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 본래 태곳적부터 변함없고, 모양과 색갈과 특성이 없으며, 전체 세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그 넘어~, 영원한 본래의 참나가 무엇인지를 깨칠려고 하는 행로(行路)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지금 현재'에 있다고들 말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 감각의 한계내에서 아는 범위를 더 이상 넘어 갈 수는 없읍니다. 이 육체감각을 초월한 참나를 스스로 확인하려면 감각의식을 벗어나야 되는데, 살아있고 깨어있는 나라는 느낌이 있는 상태에서는 그 깨어있고 살아있다는 존재느낌의 6,7.8의 의식에 두껍게 가려져 있어서 보통 지성으로는 쉽게 참나에 접근 될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옛스승들이 여러가지 참나에 접근하는 방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간화선이라는 특이한 수행방법입니다.

 

이제 간화선의 "화두의심"을 통해서 어떻게 의식의 이면으로 초월해 들어가는가를 물리적, 심리적 구조의 모형을 그려가면서 설명해 보겠읍니다.

만일 이 간화선의 구조적인 원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나면, 혼침과 산란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며, 무자십종병이라고 부르는 열가지 잘못되는 점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그 원리를 알게 되어 혼자서도 충분히 무소뿔처럼 화두수행에 전념해 나갈 수가 있읍니다.

또한 간화선 수행 중에 저절로 화두의심을 잊어버리고 화두관(話頭觀)으로 바뀌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어서 그런 잘못되게 벗어나는 것을 미리 예방하므로써 더 빨리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먼저 화두(話頭)의 구조를 간략히 살펴 보겠읍니다.

화두는 공안(公安)이라고도 부르며, 선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이루어진 선문답입니다. 화두에는 활구(活句)와 사구(死句)가 있는데, 활구란 보통 현상계 내에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상식에 벗어난 비논리적인 내용의 대화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화두가 제자의 물음에 선스승들이 일반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엉뚱한 대답을 해서 그 즉시로 강한 의심이 일어나는 화두를 말합니다. 이 경우에는 그 스승을 강력하게 믿고 있지 않으면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스승을 불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스승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 에너지를 줍니다.

사구(死句)란 스승과 제자사이에 선에 관해서 논리적으로 들어맞고 교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보통 사람도 문답내용을 알음알이로 이해할 수 있는 말귀를 말합니다.

간화선은 주로 활구(活句)를 이용해서 의심을 불러 일으켜서 즉시 생각의 흐름이 차단되면서 즉시 수행자가 내면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해 줍니다.

 

원래 상근기 구도자는 활구 문답에서 스승의 한마디에 그 즉시 의식의 흐름이 순간 정지되면서 나라는 느낌이 내면의 중심 속으로 사라져서 즉각적으로 전체와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수행자는 스승의 한마디 말씀에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을 의심을 하고 또 의심하다가 세월이 흘러서 어느 계기에 그 화두를 깨치면서 본성에 계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체험이 여러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고 전해져서 간화선이라는 수행체계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화두의심으로 수행하는 간화선은 세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며, 첫번째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문답이 있기 전에 스승의 뒷모습만 보아도 미리 제자가 깨닫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스승과 제자가 선문답 중 스승의 한 마디에 바로 깨치는 경우이며, 세번째에야 스승의 한 마디 화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그 의심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도 계속 의심을 놓지 않다가 컴컴한 동굴 속(의식의 뿌리)을 지나서 결국 화두를 깨치는 경우(화두타파)가 바로 간화선 수행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간화선에서 "화두의심"이 어떻게 내면에서 작용하기에 깨달음까지 이어지는가를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먼저 조주의 무자(無字)화두를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보겠읍니다. 무자 화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화두 의심은 다 똑 같은 구조 원리로 작용합니다.  

 

일반적인 삶에서 앎과 모름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아는 것은 그대로 존재앎과 함께 아는 것이지만, 모르는 것은 궁금하므로 우리가 알려는 욕구가 있읍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합니다.

또 모르는 것에 대하여 자꾸 알고 싶어서 의심하는 것도 있지만, 아예 알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믿어 버리는 것이 있읍니다.(예를 들면 종교신념) 

그래서 의심과 믿음은 둘 다 <모르는 것>에 속합니다. 

또한 의심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읍니다.

하나는 어떤 구체적인 답을 알기 위하여 의심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음의 외부로 향하는 것이고,(현상에 대한 의문이며, 항상 어떤 답이 나옴)

두번째는 의심은 하되 전혀 알 수 없는 컴컴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주의가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있읍니다.(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의문, 어떤 답도 없음) 

 

화두 수행에서의 의심은 오직 모를 뿐의 컴컴한 내면을 향하여 의심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이 잘 되지가 않아서, 자꾸 외부로 어떤 원하지 않는 답이나 개념이 튀어 나와서 망상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중간에 정지되어 혼침에 빠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렇게 간화선 수행 중에도 두 가지 의심이 혼합해서 진행되지만, 원래는 내부로 향하는 컴컴한 모름의 의심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무자화두에서 "의심"이 내면 의식에서 어떤 구조로 일어나며 어떻게 작용하는 가를 보겠읍니다.

어떤 중이 조주스님에게 물었읍니다.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스님 대답이 "없다(無)"라고 대답헀읍니다.

그런데 원래 일반상식적으로나 불경에 있는 내용으로는 "모든 생명체는 꿈틀거리는 벌레들까지 불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열반경에 써 있다고 합니다.

즉 이미 모든 생명있는 만물은 불성이 있고, 개도 불성이 있는 줄 아는데, 어째서? 조주스님은 "없다"라고 대답했는지 즉각 의심이 갑니다.

여기서 '만물이 불성이 있다' 라고 하는 사항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앎>입니다.

이것은 존재앎과 더불어 아주 당연한 것인데, 성숙한 상근기 수행자는 <없다>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의식이 뒤집어져서 내면의 중심으로 '나'가 사라지는 체험을 할 수도 있읍니다. 갑자기 의식의 물결이 끊어져 버리니 타고 있던 배가 뒤집어 버려서 순간적으로 소용돌이 중심을 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조주스님의 <없다>라는 대답에 '의심'이 강렬히 일어납니다.

즉 "어째서, 없다고 할까?" 또는 무슨 도리로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하고  조주스님에게서 "없다"라는 말이 나온 연유가 무엇인지를 자꾸 의심을 합니다.

왜냐하면 <없다>는 연유를 모르기 때문에 저절로 의심이 일어납니다.

 

화두의심이란 억지로 의심을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전에부터 알고 있었던 기존의 앎의 바탕 위에서 갑자기 모르는 것(화두)에 부딪치니,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앎과 새로 부딪친 모르는 것(화두)이 충돌해서 의식 안에서 의문의 소용돌이가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그 자연적으로 생기는 의심 소용돌이의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강력하게 돌려서 '나'라는 느낌과 세상전체가 그 의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중심점의 공(空)이 되면서, 화두가 타파되고,그 중심점을 통해서 절대바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즉 기존에 알고 있던 '만물이 불성이 있다'는 앎과 대비(對比)하여 조주스님의 "없다"라는 대답을 이해할 수 없어서, 앎과 모름이 서로 부딪쳐서 "의심"의 소용돌이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앎"과 모름"이 부딪치면 의심의 소용돌이가 일어날까요?

앎과 모름이라는 것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앎과 모름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미세한 파동성의 의식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앎이라는 의식파동흐름과 모름이라는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의식파동이 서로 부딪치면 의심이라는 의식파동 소용돌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마치 계곡물에서 원래 흐르는 물줄기와 물 속에 있는 돌을 한바퀴 돌아서 원래 내려가는 물과 부딪치면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는 원리와 비슷하며,

또한 북쪽의 대륙성 고기압과 남쪽의 해양성 저기압이 부딪치는 기압골에서 태풍이 발생해서 공기의 대형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자연현상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앎(믿음)의 의식파동이 흐르는 속도와 모름(의심)의 의식파동이 흐르는 속도가 빠를 수록(강력해질 수록) 더욱 더 강력한 의심의 소용돌이가 생기게 되고, 빠르고 크게 회전하는 의심의 소용돌이는 강력하게 내면으로 밀고 들어가는 추진력이 생기게 되고, 이 추진력으로 인해 의심의 소용돌이 중심부 공(空)이 점점 커지게 되어 급속하게 회전하는 의식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의 경계가 바로 나라는 느낌이며, 이 현상계이므로, 의심의 소용돌이 중심의 공(空)이 된다는 것은 바로 화두가 타파되면서 의식의 구름을 벗어나 무한한 절대공간 자체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노자도덕경 11장에서 수레바퀴 가운데 바퀴통이 텅 비었기 때문에 수레바퀴가 돌아갈 수가 있다는 그 바퀴 한 가운데 공(空)이 소용돌이의 중심이 텅빈 공(空)인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태풍의 중심부는 오히려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이 맑은 하늘이 되는 것과 비슷하고, 또한 우주의 각종 별들이 돌고 있는 은하계 한가운데 있는 중심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초물질성 불랙홀이 있는 것과도 비유될 수가 있읍니다. 

 

의식의 소용돌이가 내면으로 향하는 원리는 마치 드라이버로 나사를 돌릴 때에 오른 쪽으로 돌리면 나무나 철판 속으로 더 깊히 들어가고, 나사를 밖으로 빼어내려면 드라이버를 왼쪽으로 돌려서 빼내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나사못이 속으로 깊히 박히는 것은 주의가 오직 모를 뿐인 모양없는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고, 나사못을 밖으로 빼내는 것은 알음알이로 마음의 외부현상에 관심을 주는 것과 같읍니다. 이 나사못이 돌아가는 것은 바로 의심의 소용돌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겠읍니다.

 

다시 말하면 의심의 소용돌이가 "모름의 힘"이 우세할 때는 내면(소용돌이의 하부)을 향하여 진입하는 추진력이 세지고, "앎의 힘"이 우세할 때는 마음 밖(소용돌이 의 상부)으로 알음알이 망상들이 더욱 많이 튀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모름이 우세해야 내면으로 향해서 소용돌이 중심점의 空에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 중심점의 소용돌이 空이 바로 의식의 뿌리, '내가 있다'는 존재핵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거나 또는 생겨나는 지점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존재"란 바로 의식 그 자체를 말합니다. 이 지점을 우주적 자아의식, 또는 존재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의심의 소용돌이 그 자체는 원래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며, 동시에 앎도 포함되고 모름도 포함되어 있읍니다. 이 의심은 앎과 모름이 교번적으로 움직이는 역동성 파동뭉치이며 그 의심 소용돌이를 "모름"이라는 방향으로 은산철벽 같은 상태로 끊어지지 않게 오래 유지시키면 저절로 점점 미세하게 깊어져서 거친 감각의식과 마음을 넘어서고 나라는 미세의식을 넘어서서 결국은 가장 미세한 파동성 의식의 끝점인 존재핵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이 존재핵점을 통과하는 것이 바로 화두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화두의심이 끊기던가, 아니면 마음의 주의가 외부로 향하면 좀 더 미세한 의식파동으로 깊히 들어가지 못하고 거친 의식표면에서 산란이나 무기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으로 향하는 화두의심뿐만 아니라, 어떤 외부 현상적인 특정문제를 풀기 위하여 의심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문명이 오늘날처럼 극도로 발달하게된 근본적인 기반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인간두뇌의 이 <의심하는 기능>이 자기 주변의 어려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당면<문제>를 자각하고, 문제를 풀려고 의심하며 애쓰는 과정에서 이 <의심 소용돌이>를 앎의 방향으로 활발하게 작동시켜서 자기 내면에 깊숙히 숨어있는 <해답>보물들을 발굴해서 그것을 열심히 응용한 것이 오늘날 최첨단 과학문명 볼 수 있읍니다.

한편 신이나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의심의 기능>을 이용해서 개념적으로 깊히 탐구하여 철학, 과학에 이어서 산업공학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여러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인간두뇌의 <의심의 기능>은 인류문명사에서 과학,철학,신학,종교,인문학, 의학,공학, 예술 등등 모든 학문과 인간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주도적인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읍니다. 말하자면 전혀 모르고 생소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의심의 소용돌이를 맹렬히 돌리는 과정에서 인간 두뇌세포가 점점 더 정밀하게 분화되면서 폭넓게 발달했다고 볼수도 있읍니다.

현실에서 직접 겪는 현상적인 문제이든, 정신적인 문제이든 아무리 난해한 문제라도 깊은 의심 속에 오랫동안 끊어짐없이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의심의 소용돌이"를 돌려가며 탐구하면 마지막에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답을 반드시 얻어 낼 수가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직관(直觀)을 통해서 문제의 해답을 얻는 방법입니다.

물론 그 해답이 기대했거나 상상했던 형태의 해답이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어려운 문제가 풀릴 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의심하는 기능>이 우리 의식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혀 관심도 없었고 모르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이 인간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만능적인 <의심의 기능>을 활용하여, 우리들 마음의 내면으로 향해서 자신의 근본문제인 생사(生死)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인 참본성을 찾는 도구로써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 확실하게 이해해야 되겠읍니다. 

그래서 화두의심이 어떻게 우리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의심소용돌이를 만들며 어떤 과정으로 깨달음에 이르는가를 그 기본적인 작용원리를 이해시키므로서, 앞으로 간화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글을 쓰고 있는 무한진인의 바램입니다.

 

간화선에서 "의심"은 이렇게 "앎과 모름"이 부딪쳐서 강한 "의심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의심의 소용돌이가 생기려면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앎"에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되겠고, 또한 "모름에 대한 의문" 과 "없다"라고 대답한 조주선사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게 되어 있어야 강한 의심의 소용돌이를 형성할 수가 있읍니다.

또한 소용돌이 중심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전혀 알수가 없음"이라는 상태를 유지하여 다른 망상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가 내면의 중심을 향하게 됩니다.

내면의 가장 중심점에는 공(空)상태이므로 이 중심으로 빠져 나가면 화두를 타파하고 의식을 초월하게 되어 저 언덕 넘어로 건너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의심의 소용돌이가 생기고 나면 그 의심 소용돌이를 계속 강하게 중심 쪽으로 돌아가도록 채칙같은 에너지를 주어야 하는데, 그 에너지를 고봉원묘선사는 <선요>에서 "분심(憤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잠깐 고봉선사의 <선요> 내용 일부를 들여다 보겠읍니다.

[ 만약 착실한 참선을 한다면 결단코 세 가지 요점을 갖추어야 한다.

첫번째 요점은 큰 신심이 있어야 하니, 신심(信心)이 수미산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두번째 요점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니, 이 분심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 바로 두 동강이 내려는 마음과 같아야 한다.

세 번째 요점은 큰 의심이 있어야 하니, 이 의심(疑心)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큰 일을 저질러 은폐되었던 일들이 막 폭로되려고 할 때와 같은 것이다. 

일상의 공부 가운데 이 세 가지 요점만 갖출 수 있다면 반드시 정해진 날짜 안에 공(功)을 이루어서 독 안의 자라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지를 않으나, 진실로 그 가운데 하나라도 빠진다면 마치 다리 부러진 삼발이 솥이 끝내 폐기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후략)]

이와같이 간화선 수행의 삼요소는 신심, 분심, 의심이 함께 작용하여 의심의 소용돌이 중심 속으로 들어가면 "나라는 느낌"의 개인성이 사라지고 전체가 된다고 고봉스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고봉스님이 말씀하시는 분심(憤心)을 잘못 오해하면 속효심(速效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위에서 고봉선사가 분심을 내라는 것은 오로지 화두의심만을 깊고 강하게 집중하라는 말씀이지, 수행하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 자체를 빨리 얻고자 바라는 성급한 욕심인 속효심(速效心)을 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봉선사의 이 분심을 내야 된다는 말 한마디를 잘못 오해했기 때문에 1000여년간 수많은 간화선 수행자들이 당장 깨달아야 되겠다는 성급한 욕망을 지나치게 발휘하다가 심신을 스스로 괴롭히거나 혹은 과도한 분심을 쓰다가 제풀이 지쳐서 중도에 갑자기 열정이 식어 버린 경우도 많을 겁니다. 억지로 의지를 가지고 쥐어 짜내는 분심(憤心)은 결국은 어느기간 동안은 수행에 대한 분발심을 얻을 수 있겠으나, 결국은 에고의 성향을 더욱 강화해 줄 수도 있는 마음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봉선사의 분심(憤心)을 제가 다른 말로 바꿔 이해해 본다면 오히려 끈질긴 인내심, 즉 인욕정진(忍辱精進)을 키워서 한시도 쉴틈없이 끈질지게 화두의심만을 계속 이어지게 하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고봉선사의 '분심(憤心)을 내라'는 말씀은, 간화선 창시자인 대혜선사의 서장에는 어디에도 찾아 볼수가 없으며, 다만 오로지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생활 중에서 잠깐이라도 끊어지지만 말고 계속해서 화두의심만을 들어야 된다는 말씀만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면 참으로 누구나 쉽게 깨달음을 얻겠읍니다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니고, 중간에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혼침(渾沈)과 도거(悼擧,散亂心)라는 장애를 맞게 되는데,

혼침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한 상태 또는 고요한 상태에 가만히 머물러서 화두를 잊어버린 무기(無記)상태를 말합니다.

좌선할 경우에 계속 의심의 소용돌이를 타다가 어느 때는 아주 고요한 상태를 맞거나 혹은 조는 듯한 멍한 상태를 맞는데 이상태를 혼침 또는 무기상태라고도 합니다.

이 상태는 내면으로 들어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일시적으로 정체되어 멍한 정신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를 만난 어떤 수행자는 마치 고요한 삼매상태를 접한 줄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두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간 조는 무지상태와 비슷합니다. 이때는 정신을 똑 바로 차려서 화두를 다시 들면 다시 의식이 성성하게 됩니다. 옛분들은 혼침은 바짝 정신을 차려 깨어있음(惺惺)으로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다음에 도거(悼擧) 또는 산란(散亂)은 온갖 망상과 잡념이 떠 올라서 정신이 혼란된 상태를 말합니다. 화두를 자꾸 잊어 버리고 망상에 빠지는 상태이며, 이 상태는 의심의 소용돌이 밖으로(마음 표면) 나와서 생각의 움직임 흐름에 둥둥 떠 다니며 망상에 끌려 다니는 상태입니다. 마치 흐르는 물의 소용돌이 밖으로 물거품이 튀어 나오는 것처럼 온갖 잡념의 흐름에 실려서 매달리는 상태인데, 여기서 빠져 나올려고 생각을 억지로 억눌르려고 한다면 더욱 생각 속으로 빠져 들므로, 이때 바로 그 생각의 흐름들 위에다 화두를  얹어 놓고 들면 망상들이 자연히 사라지고 화두만 성성하게 됩니다. 옛분들은 이 도거 또는 산란심을 고요함(寂寂)으로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읍니다.

 

또한 수행자가 화두를 마음 속으로 되뇌이던가, 또는 "무- 무- 무-"하고 염송하듯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던가, 화두문답 내용을 계속 생각한다면, 이것은 화두 관(觀)수행이 되므로, <의심의 소용돌이>도 생기지 않을 뿐더라, 마음 표면의 물결만 계속 일으키는 행위이므로 아무 효용도 없는 쓸데없는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화선 수행은 염불이나 만트라 명상처럼 화두를 계속 기억하거나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심을 하여 의심의 소용돌이를 통해서 화두가 타파되고,화두가 나오기 이전의 공(空)상태를 깨치는 것입니다. <無字>화두의 경우는 <無>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조주선사가 왜? 어째서 <무>라고 대답했는가를 의심을 해야 되며, 그래서 <무>라는 대답이 나오기 이전의 조주스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화두가 나오기 이전의 상태에 계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의 여러가지 사항은 무자화두 뿐만 아니라 모든 화두수행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또한 무자화두 십종병을 예로 들면 이것들은 모두가 주의가 마음외부로 향하는 관계로 나타나는 생각들이므로 무조건 "전혀 알수 없음"의 내면으로만 향하면 일어날 수 없는 사항들입니다.  대혜선사가 말하는 무자 참구 중에 나타나는 병에 대한 주의 사항을 예를 들면,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두지 말 것이며, 

이치로서 알았다 하지 말것이며,

의근(意根)에서 헤아려 분별하지 말 것이며,

눈썹을 치뜨고 눈을 깜빡이는 곳에 뿌리 박지 않아야 하고,

언어를 통해 살림살이를 짓지 말고,

할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안되고, 

들어 보이는 곳에서 지레짐작하지 말고,

화두드는 자리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 것이며,

문자에서 끌어와 증명하지 말 것이며,

다만 오고 가며 앉고 눞는 일상 삶 속에서 꾸준히 화두를 챙겨 들되,

"개에도 부처님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에 "없다"라고 말한 것을 생활 속에서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위의 11 가지 주의 사항을 한마디로 집약하자면, 마음의 중심을 화두 의심 속으로 들어가 '전혀 알수 없는 내면'으로만 향하라는 말이며, 조금이라도 마음외부에 나타나는 생각이나 체험에 관심을 주어 끌려 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준 것입니다.

화두 의심을 수행하는 중에 마음 위에 나타나는 어떤 희안한 생각나 무한한 공(空), 또는 광명(光明), 신(神)의 이미지 등등의 체험들은 모두가 의식이 잠시 만들어 내는 병이며, 환상의 그림자들로써 그런 것에 관심을 주면서 이끌려 다니면 그 즉시 지옥으로 떨어져 깨달음은 커녕 다시 고통의 분별심으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화두수행의 잘못된 병도 위의 무자화두 십종병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체험이나 마음에 나타나는 개념과 이미지들을 무시하고, 화두 의심 속으로 깊히 들어가서 의심의 소용돌이를 힘차게 돌리면서 중심 쪽으로 가까이 들어가면, 점차로 어떤 단계적인 체험을 맞이하게 되는데 개인마다 체험 내용이 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간화선 수행단계의 체험 수순을 실예를 들어 가면서, 여러가지 수행상의 주의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회에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