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찾아가는 길목의 여섯 관문 이정표

2008. 9. 2. 20:32무한진인/참나 찾아가는 길목

 

 

 

 * <깨달음을 찾는 나그네들의 쉼터,옹담샘> 카폐에서 한회원의 질문에 덧글로 답변한 것을 오자와 문장을 약간 고치고 다시 편집하여 작성한 내용입니다.

 

 

[질문]-쿤님

* 명상상태에 대한 질문(쿤님)

언제나 좋은 글들 감사합니다.

명상상태는 외적인 감각들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상태인가요?

시간 날때마다 열심히 내면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는 안네요.

어느 정도의 단계가 되면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는 경우 시각, 청각,촉각 등의 모든 감각들이 차단되어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나요?

이정도의 단계가 아니면 아직은 육체의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볼 수가 있는 건가요? (2008.9.1. 13;40 )

 

 

[덧글 답변]-무한진인

 

우선, 전체적인 의식의 단계별 구조를 소개해 보겠읍니다.

"참나 찾아가는 길목"이라는 글에서 의식은 대개 개인의식,보편적 존재의식,진아,이렇게 세가지로 간단하게 분류해서 소개한 바가 있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한 것은 처음으로 수행구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간단하게 개념구조만 설명했는데, 실질적으로는 수행의 과정에서는 그보다 좀 더 복잡하게 분류 될 수가 있읍니다.


즉, 개인의식은 거친육체와 생기,정신의 미세체,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나타나게 된 원인인 원인체,
이렇게 개인의식은 세가지 단계로 나눌 수가 있읍니다.

또한 원인체에서 존재의식으로 전환되는 존재의식의 초기와 중기, 그리고 진아와 접촉점인 존재핵점,이렇게 세가지 과정을 거쳐서 절대진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개인의식이 세단계, 존재의식이 세단계, 그다음에 진아상태의 7단계를 수행의 점진적인 과정으로 설명할 수가 있읍니다.  

 

쿤님께서는 지금 개인의식을 정화하여, 그 개인의식의 뿌리인 원인체로 들어가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목표를 잡아야겠지요.

우리가 여러가지 수행체계와 다양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체계성이 없이 혼합해서 읽고, 받아들이는 바람에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수행과정과 진행절차를 혼동하고, 많은 분들이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읍니다.

따라서 지금얘기하고 있는 과정을 잘 이해해서 너무 과도한 기대와 효과를 바라지 않고, 꾸준히 수행에만 전념하면 저절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읍니다.
여기서는 지면도 좁고, 시간상으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처음 수행하는 분들이 처음으로 목표로 할 것이 무엇이며, 대략 어떤 과정을 거쳐서 원인체를 넘어서 보편적 존재의식까지 갈수 있는 가를 아주 간단하게 개요만 소개해 드리겠읍니다.
  

 

 첫번째로 수행자는 육체가 "나"가 아니고, "내것"도 아니다,하는 육체를 나라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겠지요.

이것은 지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스승들의 가리침이나 여러가지 경전에 보면 아주 자세히 나와 있읍니다.

육체는 살과 뼈와 피등 액체와 여러가지 생체조직으로 된 물리적인 물체일 뿐이며,또한 지수화풍공의 물질 오원소로 구성된 물질이지, "나"라고 말할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그 물질이 내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그렇게 여러가지 논리적인 생각과 지성을 활용해서, 그 육체는 절대 나가 아니라는 것을 믿읍니다.

또한 육체에 딸린 재산,명예,이름,직업,자기아내,자식,부모, 등등 이 모든 것이 나와 내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고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와 그 부속으로 딸린 모든 것에 대해서 집착으로부터 떨어져야 되겠지요.  

 

이렇게 육체를 자기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해서 그것들로 부터 집착이 풀어지면,

그 다음에는 정신,마음이 만들어낸 미세체의 작용으로 진입하는 것이죠.

거친 육체가 살아서 움직이려면 이 미세체라는 정신작용 없이는 다만 죽은 물질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육체와 미세체인 정신작용을 합쳐서 나라고 여기고 있읍니다.

그러나 육체라는 것은 이 정신작용인 미세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육체는 가장 거친 물질의 의식파동이라면 미세체는 좀더 미세한 파동이라고 해서 정신을 미세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미세체 안에서 육체를 운용하는 모든 정신 작용이 이루어지는 있읍니다.

컴퓨터를 예를 들자면, 콤퓨터의 하드웨어가 육체라고 가정하면, 콤퓨터를 동작시키는 소프트 웨어가 바로 정신인 미세체라고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육체를 운용하고 유지하고 지키는 것은 바로 이 정신작용인 미세체라고 볼 수가 있죠.
미세체는 여러가지 작용그룹들이 하나로 모여진 것입니다.

여러가지 작용하는 기능집단들이 한군데로 모여진 합동군단이라고 볼수있읍니다.

 다음에는 미세체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겠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신 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미세체(微細體)이지만, 단순히 마음만이 이 미세체에 포함된 것이 아니고,여러가지 복합적인 정신과 생기요소가 집합되어 있읍니다.

첫째는 육체의 다섯가지 활동(손,다리,입,항문,성기를 주재하는 운동감각이 있고, 다섯가지 인식감각(눈,귀,코,혀,살갛)이 있으며, 다섯가지 생기작용(음식의 소화배설을 주재하는 생기, 육체중심의 단전,호흡,내분비 순화생기--등)이 있으며,네번째는 마음,다섯번째는 知性(아는 작용) 이렇게 여러가지 작용집단이 모여있는 것이 미세체라고 하며 종합해서 정신생기체라고도 합니다.

이 복잡한 미세체를 설명하려면 끝이 없지만 여기서는 이 미세체에 관련하여 이 미세체를 어떻게 넘어가는 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모든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이 미세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며, 그런 수행이 어떻게 진행되어 이 미세체로부터 빠져 나가서, 이 미세체가 나온 원인체로 들어 가는 가를 간단하게 언급해 보겠읍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목적은 진실한 "나"를 찾기 위해서 이 앎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를, 앎(의식)이 나오는 근원으로 역추적해서 들어가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육체와 그것에 딸린 부속물들이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제 이 정신작용인 미세체로 들어와서 미세체가 나인가를 탐구해야 되는 것이죠.

탐구를 한다는 것은 의식이라는 앎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역 추적하는 것인데, 빛이 나오는 방향을 따라가서 바로 주시자를 찾아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앎의 빛을 따라가면서 단순히 그것만을 추적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마음의 장애물인 습업(習業)을 찌꺼기를 녹여야 이 앎의 빛을 제대로 찾아내서 따라 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정신작용인 마음의 미세체 안에서 우리는 수행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것이 비쳐져 나온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내용물이란 다름아닌, 희비애락등 감정의 변화와 너와 나,내것과 다른사람의 것, 등 이원화적인 생각들이며, 이 미세체 안에서 그런 분별,집착,희로애락,각종 고정관념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즉 모든 집착과 욕망,감정변화,학문과 지성적 개념을 버리는 수행을 해야하는 것이죠.

그런 수행은 마음을 한곳에 오로지 집중하고, 욕망을 제거하는 등, 수신제가를 하는 것인데, 세상에는 여러가지 수행법이 있읍니다. 
처음에는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마음을 개끗하게 안정시키는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주지해야 할 것은 마음에 붙은 오염된 집착과 욕망들은 마음을 이용해서 정화시킬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음을 써서 힘들여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면 더욱 마음은 혼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죠.

모든 스승들이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면, 마음을 침묵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한생각의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억지로 정지시키려고 노력을 하면 마음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상이 생기면 가만히 지켜보며,더이상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또한 육체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는 방법도 어떤 상상으로 육체를 죽이는 방법같은 억지로 마음을 쓸것이 아니라, 나는 이육체가 아니고, 우주전체 보다 더 큰 허공의 보이지 않는 앎이다, 라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계속 확신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내 육체는 우주허공처럼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앎 그자체다,하고 확신을 갖는 것이 또한 작은 육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미세체에서 나를 찾아 보아도, 오직 보이고 아는 대상만 있지, 보이지 않고 알수 없는 그 앎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미세체도 '내가 아니다' 하는 결론을 짓고, 그 미세체 마음에 딸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 마음의 복합작용인 미세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가하면,

곧 마음이 고요하여 온갖 망상이 없이 조용해지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초연해 있어, 마음이 아주 얌전한 아기같이 고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바로 이 개인의식의 뿌리인 원인체(原因體)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원인체는 마음이 전혀 없는 완전히 캄캄 절벽같은 정신상태인데, 자기자신조차도 모르는 완전 망각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깊은 잠상태와 비슷하지만, 깊은 잠상태는 아닙니다.

이 원인체가 바로 사람의 육체와 정신생기체인 미세체가 나온 뿌리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이 상태에 들어가려면 마음에 딸린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합니다.

아주 간난아이가 잠드는 장면을 가만히 옆에서 들여다 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저절로 잠 속에 스르륵 빠져들어가는 것을, 그 서서히 감기는 눈껍풀을 보고 알 수가 있읍니다.

간난애가 잠드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보는 사람도 저절로 잠이 스르르 들게 될 수도 있읍니다.

이렇게 마음의 뿌리인 원인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죠.

저녁에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어떤 고민이 머리에 남아 있으면 잠이 제대로 들수가 없읍니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 또 모든 머리 속의 것을 잊을 때에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원인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저절로 무상삼매 속으로 들러가게 됩니다.

 

 수행자들이 첫번째 목표로 해야 할 것은 이 깊은 잠 같은 망각(忘覺)의 무상삼매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며,심지어 자기자신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불시적으로 잠깐 찾아 오는 것인데, 그것을 겪고 난 후에는 그상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엄청난 지복감이 거대한 파도의 밀물처럼 밀어 닥치면서 전체에 미묘한 행복감이 넘쳐 흘러 구도자는 황홀감에 잠시동안 젖어 있다가, 이내 자신과 주변을 전부 잊어 버리고 침묵속에 들어 가 버립니다.

마치 깊은 잠속에 있는 것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원인체의 삼매상태와 깊은 잠의 상태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릅니다.

깊은 잠의 상태는 완전히 無知상태로써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감각이 동작을 정지하고 있지만, 이 원인체 삼매상태에서는 깨어있는 채로 그런 깊은 잠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죠.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잠상태와 같은 경우를 겪게 되는데, 그것이 일반적으로 조는 상태라면 팔이 내려진다든가,고개가 숙여져서 끄덕거리며 조는 행동이 보이겠죠.
그러나 이 삼매상태에 접어 들었다면 잠과 같이 정신은 없되, 고개를 끄덕인다든가, 조는 행동이 없이 ,오롯하게 있는 상태가 됩니다.

처음 그런 경험을 하는 구도자는 자신이 잠깐 졸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몇번 겪게 되면 그것이 잠이나 졸음의 상태와 다르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깨어난 후에는 '내가 졸았는가?'하고 의심이 들긴 하지만, 처음에는 그상태가 조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수행이 깊어져서 그런 삼매상태가 오는 것이죠.

그상태가 익숙해져서 계속 연장되면 수행때 뿐 아니라, 일상 활동에서도 몸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마음이 고요하게 밝아지면서, 어떤 깊고 검푸른 어둠 같은 포근함을 느끼며, 오직 전체가 하나의 의식이라는 느낌이 점점 전체적으로 지배합니다.

물론 이러한 체험은 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읍니다.  

 

이러한 원인체 삼매상태를 계속 겪게 되면 아주 깊어지고 길어지는데,

이상태 속에서는 아무것도 주시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읍니다.

따라서 주시자도 이상태에서는 잠깐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라는 느낌도 없읍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나온 근원이라고 여길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무상삼매에 계속 잠겨 있게 되면,

어느때 갑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신비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지금 컴컴한 무지를 지켜보는 자이다',하는 목소리가 아주 부드럽고 믿음직한 굵은 목소리로 신비스럽게 내면 깊은 곳으로 부터 들려 옵니다.

구도자는 다시 용기를 얻게 되고 서서히 앎의 빛이 밝아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수행자는 서서히 삼매상태에서 벗어나 전체가 하나의 의식이 된 개인의식을 벗어난 주시자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육체에서 시작해서 내면으로 계속 앎의 빛을 따라서 추적한 결과 깊은 잠과 같은 동굴 속울 지나서 이제 완전히 그동안 주시되고 있던 앎의 주시자가 된 것이죠.

이 상태는 베단타계통에서 뚜리아 또는 삿뜨칫트 아난다,라고 하는 진아의 직접적인 빛의 상태입니다. 즉 태양이 진아라면 바로 태양에서 직접 비추고 있는 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빗살자체입니다.

앞서 원인체인 깊은 잠과 같은 무상삼매상태에서는 완전히 "無知" 상태였읍니다. 

전체적인 無知상태에서 전체적인 앎(眞知)의 상태로 전환된 것입니다. 

 

원인체는 망각상태이며,無知때문에 개인육체와 정신생기작용을 "별도로 떨어진 나" 그리고 "아는 주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제공자이므로 이 무지상태를 벗어나야 , 자기의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정체성(전체가 하나)에 대한 참나를 알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어떤 체험을 했드라도 하나의 상상일 뿐이며, 지성적인 알음알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컴컴한 망각상태의 원인체 속을 노자 도덕경에서는 현빈(玄嬪)이라고 표현을 했읍니다.

이것을 지나야 자기의 참본성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이제 차 한잔 마시고, 그 다음 단계인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상태에 대해서 말해 보겠읍니다.  

 

'내가 있다'는 앎의 존재의식에 들어가기 전에, 망각상태인 원인체를 베단타에서는 지복각(至福殼)-지복의 껍질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고뇌가 없는 상태를 지복이라고 하며(지복이라는 느낌도 없는 지복상태), 또한 어떤 번역서는 환희체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는 좀 빗나간 번역어인 것 같읍니다.

좌우지간 그상태는 전체적인 忘覺상태이며, 깨어있는 깊은 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지만, 스스로 그상태를 겪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카폐 회원분들 중에는 그 상태를 체험한 분들이 몇분 계십니다.

아무래도 다른 볼일이 있어서 일좀 보고, 저녁 때나 또다시 들어와서 계속 하던 이야기,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아야 겠네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글을 읽은 분들은 대략 잘 아실 겁니다.

바로 니사르가다타님이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앎이 바로 이 원인체인 망각상태를 지나서 전체가 하나라는 우주의식 또는 보편의식을 존재의식으로 표현하면서 구도자는 우선 그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로 그곳입니다.  

 

제가 언젠가는 이러한 단계적 수행에 대해서 글을 올리려고 했읍니다만, 수행과정에 나타나는 미묘한 사항들은 가능한 글로 드러내는 것을 자제하고 있읍니다.  

좌우지간 그것은 그렇고, 망각상태인 원인체에 대하여 좀 더 말해 보자면,

대부분의 깨달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망각상태인 원인체를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절대진아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깨달았다고 대외적으로 자기선전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이 지복각인 원인체에 완전히 잠기지도 않고, 잠깐 그상태를 체험하고 나서 최종상태인 절대진아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상태는 정말로 절대진아로 착각하기 좋은 상태입니다.

이 지복각 상태가 바로 아무것도 없음이면서, 空 또는 無상태이긴 합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의 일화를 보면 어떤 스님이 깨달았다고 성철스님에게 점검하러 왔는데, 그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원인체만을 잠깐 엿본 것인가, 아니면 정말 절대 無상태까지 도달했는가를 딱 한마디 유도질문을 해서 그사람 답변도 듣기 전에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의 길에서 가장 큰 함정이 바로 이 개인의식의 마지막 뿌리인 원인체의 망각상태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상태, 空, 無, 그러나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것을 아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상태에 도달하여 자기가 최종 깨달음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어서 빨리 제자들을 �아놓고 높은 스승이 되어 가르침을 펼쳐야지하고 조바심을 합니다.

라즈니쉬나 라마나 마하리쉬처럼 공통체 아쉬람을 만들어서 자기가 거기서 왕노릇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괘 많고, 한국에도 무척 많읍니다.

 

이제 다시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해 보겠읍니다.

개인의식의 가장 바�에 있는 껍질은  육체라는 거친 물질파동의 껍때기로 덮혀 있읍니다,

그 두번째 안쪽에는 생기로 된 조금 미세한 생기파동의 껍질로 덮혀 있읍니다.

그다음 세번째는 마음과 자만의 껍질, 네번째는 아는 작용인 知性의 껍질,

다섯번째는 망각상태인 至福의 껍질로 덮혀 있읍니다.


따라서 개인이란 거친 물질의 肉體와 微細體(생기,마음,지성)과,지복의 껍질인 原因體,인 크게 세가지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죠.

이 개인의식의 원인은 바로 지복의 껍질이 컴컴한 無知 또는 "모름" "空""無"가 그 원인인데,

이 무지는 그 이전의 전체적인 진아의 순수한 의식빛을 은폐하는 작용이 있읍니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진아의 빛을 가리고, 반사된 빛을 자기라고 주장하는 착각작용을 합니다.

마치 해에서 반사된 달을 비유해 보자면 달이 환하게 지구에 달빛을 비추는데도, 달에 직접 비추는 태양빛은 안보이고 반사된 달빛이 마치 달자체가 빛을 내는 것같이 보이듯이, 진아에서 직접 비추진 순수의식을 모르기 때문에 無知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지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있다'는 순수의식상태로 빠져 나올 수가 있는가를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
원인체의 망각상태에서는 자기가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그상태에서는 주시자도 잠시 사라지는 상태가 옵니다.

그러나 그상태에 계속 잠겨 있으면 점차로 개인의식에 붙어있는 온갖 집착과 욕망,원습등이 점점 녹아서 사라집니다.

그런 찌꺼기들이 모두 순수한 빛을 비추는 공간을 가로막는 무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상태에 계속 잠겨 있어야 합니다.

이상태에 꾸준히 잠겨서 자신의 원습들을 계속 녹이는 것이죠.

말하자면 오염되어 더러워진 의식을 세탁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점점 개인의식이 사라지고 이원화된 대상의식이 엷어질 수록 무지가 사라지면서, 어떤 영감이 떠오르던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저절로 이 무지상태는 진짜 내가 아니고, 더 뒤에 진짜 내가 이상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나오는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영감일 수도 있으며, 저절로 알게 되기도 하고, 그이전의 경전에서 본 말이나 스승의 말이 내면의 목소리로 들려오는등, 약간 신비롭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수행자는 그동안에 바보처럼,어린아이처럼 힘없이 멍하니 있다가 용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렇게 용기를 얻은 수행자는 서서히 진아에서 나오는 빛을 쏘이기 시작하면서 앎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컴컴한 무지의 턴널을 서서히 빠져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무지의 턴널 밖으로 빠져 나온 의식은 완전히 전체가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앎에는 개인의식에서의 대상적인 앎과 우주적 보편의식인 순수의식에서의 대상이 없는 앎, 두가지가 있읍니다.
순수의식의 일원적인 앎은 대상이 없는 앎자체이며, 개인의식에서 느끼는 이원화적이며 상대적인 앎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우주적 보편의식의 앎을 베단타에서는 진지(眞知)라고도 합니다.

비유를 들면, 태양자체에서 직접 나오는 빛이 이 순수의식의 앎이라면,

상대적인 앎은 태양빛이 달에 반사되어 그 달빛이 연못을 비치는 것같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읍니다.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앎은 원인체인 무지의 망각상태에서 반사된 앎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무지자체가 주체가 되어 가상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 바로 상대적인 개인의식의 앎이라고 볼 수가 있죠.

이렇게 무지를 빠져 나온 순수의식의 앎은 상대적인 앎과 다릅니다.

이것을 개인의 생시상태와 잠과 꿈을 넘어선 제4의 상태인 뚜리아, 또는 주시자 상태라고 합니다.

개인의식에 있어서 모든 상대적인 앎(삼라만상)은 이 뚜리아라는 주시자에 의해서 주시되고 있고,

개인의 상대적인 앎은 바로 이 주시자에 의하여 비추진 의식의 빛이 무지에 반사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주시자에서 비추는 빛은 물론 진아에서 나온 것이죠.

 

그런데 이 순수의식이 되면, 어떤 스승이나 경전에는 육체와 마음이 전부 사라진다고 말하는데도 있는데, 이것은 전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전체가 하나라는 의식은 되었으나 육체와 마음은 보통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작동을 합니다.

다만 보통사람과 순수의식이 된 사람이 다른 것은 "無知"즉, 따로 떨어진 개체라는 개념과 모든 삼라만상의 경계를 實在로 착각하는 관점만 바뀔 뿐이지, 보통사람과 다르게 눈이 뒤집혀져서 색다르게 전체가 하나로 보인다든가 하는 물리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읍니다.

다만 무지가 벗어졌기 때문에 모든 경계와 구분이 허망한 無知가 그린 의식의 그림자라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확고해지며, 보통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관점과는 180도 다르게 그 관점만이 변화된 것입니다.

물론 마음은 전체에 편재되고 고요해져 개인의식에서의 조급함과 혼돈된 망상이 적어집니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어둠이 있을 때는 그 어둠 속에 묻힌 온갖 사물이 보이지 않읍니다.

그러나 빛을 비추면 어둠은 사라지지만, 그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사물은 그대로 명확하게 드러나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게 무지의 어둠만 사라지고, 그 어둠 속에 있는 사물들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태는  자연 주시상태이고, 모든 만물은 하나의 의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전체 삼라만상이 자기자신이나 마찬가지라는 일체심에서 나온 자비심과  전체적인 사랑이 점점 확장되는 것이죠.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히 깨달은 상태는 안됩니다.

니사르가다타님은 이상태에서 오직 죽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항상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죠.

이상태에도 아직 완전히 개인의 습이 가시지 않아서 사람마다 그 정도가 천차만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원인체에서 충분하게 무상삼매 속에서 의식을 깨끗하게 정화되지가 못했기 때문에 그 무지의 정화농도에 따라서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읍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지의 원인체 이전의 지성의 껍질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상태인데,

자기가 완전히 깨달았다고, 남에게 깨달음 이론을 가르쳐 주고, 자신도 좀 더 남에게 스승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경전공부에 파고드는 것이죠.

대개 조직적인 종교체계에서 이런 분들이 많은데, 조직에서 말없이 요구하는 그 종교조직에 대한 의무 내지는 헌신의 책무 때문에 어쩔수없이 조직의 하급수행자들에게 가르침의 업적을 펼쳐야 하는 것이죠.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책을 많이 저술하는 것이지요.

책을 몇권 저술하면 사회저명가가 되고,제자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통상 그런 저술작업에 많은 공을 들이고, 그 책으로 인해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지 최종 깨달음을 위해서는 저술작업같은 것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책을 많이 저술한다고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읍니다.

요즈음은 일종의 자기 피알 또는 사업 선전용으로 책을 많이 저술한다고 합니다.

정신수행 가르침도 요즘은 사업화가 되어, 수퍼마켓처럼 각 지역의 체인점이 조직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맨 위에 있는 그 조직의 우두머리는 교외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간혹 매끄러운 문필실력으로 책을 간행하여 이름을 세상에 퍼뜨리기도 합니다. 진리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널리 가르침을 펼치는 것이야 참으로 가장 위대한 사업 중에 하나이겠지만, 아직 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저술하는 등, 지성활동을 하면 구도의길에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순수의식인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에서도 충분히 도인노릇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읍니다.

니사르가다타님은 이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적절한 말씀인 것 같읍니다.

이상태는 아주 자연스러운 주시상태이므로 "있는 그대로 있음"이라는 가르침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 상태에 잠겨 있으면 저절로 전체가 사라지는 절대진아로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진행되느냐 하면, 마치 앞서 무지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때에 저절로 주시상태가 다가 오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상태로 자리잡는 것이죠.

그러나 절대상태를 획득하고 나서 그상태에 그대로 머물 수도 있으나,

대개 이 순수의식상태와 절대상태의 중간에 머무는 것이죠.
이 진아상태는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에서 몸은 움직이되, 완전히 자연무상삼매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외모적으로 볼 때는 약간 좀 멍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순수의식의 앎상태는 원인체의 무지와 대비되는 한쌍의 앎이라고 합니다.

물론 대상적인 앎이 아니라, 대상이 없는 일원적인 순수앎이지만, 그 앞의 원인체와 한쌍이 되므로 이 앎조차도 어디선가 나온 것이죠.

모름이 있으면 앎이 있고, 무지가 있으면 진지가 있는 것이죠.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또는 이십사시간 근무하는 경비원이 있는데, 한사람이 오면, 있던 사람은 나가는 것이지요. 이러게 앎과 무지는 한쌍이지만, 나타나는 것은 교대로 나타납니다.

무지가 나타나니 앎이 사리지고, 무지가 사리지니 앎이 나타났읍니다.
따라서 이 앎조차도 어디인가 그 근원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근원으로 돌아가야 되겟죠.

그러나 앎과 무지의 근원인 진아는 앎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것이죠.


마치 태양빛이 태양자체에서 나온 것처럼, 순수의식의 비춤도 진아라는 근원에서 나온 것이죠.

그래서 최종근원이 아직 어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근원에 접근이 서서히 되며,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체가 생겨나온 근본바탕이며, 움직이지 않고 영원한 절대바탕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표현을 할 수 없다고 말씀들을 하시죠.

마치 태양에서 뻣친 햇빛이 태양 속으로 완전히 합쳐지면, 그 햇빛 한줄기 입장에서는 빛의 본체인 태양조차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깐 빼먹은 내용이 있는데, 나라는 것은 "개인적인 자아"와 "우주 보편적인 자아, 진아 이렇게 나눌수가 있읍니다.

진아는 나라는 느낌이라기 보다, "나 없음"즉 無我라고 합니다만 참나,진아라고도 하죠. 
나라는 느낌은 바로 의식의 앎 그자체죠.

자아에는 "개인적인 자아"와 "우주적인 자아(보편적 자아)"두가지가 있읍니다.

개인의식은 개인적인 자아인 에고이지만, 우주적 자아는 순수의식을 말합니다.

우주적 자아는 뚜리아상태 또는 주시자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이 우주적 자아도 어떤 스승들은 "에고의 근원"이고 말씀하십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도 "나라는 앎" 또는 "나라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점 스승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그 문장내용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읍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이야기한 6단계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겠읍니다.

거친육체->미세체(생기,감각기관,운동기관,마음,지성)->원인체(지복각,망각)->

초원인체(존재의식의 초기상태) -> "내가 있다"존재의식->"내가 있다"핵점->진아. -- 이렇게 순서적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읍니다. 

 

제가 덧글 쓴 중에서 이번이 제일 길게 쓴 것 같읍니다.

그동안에 여러분들이 카폐에 글을 올려주시고 많은 분들이 저에게 쪽지를 보내주어서 그런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를 좀 써야 되겟다고 마음 먹었읍니다만, 점차 글쓰기가 싫어져서 그냥 있었읍니다.

그런데 쿤님의 질문에 무언가 써야 되겠다고 마음 먹고 덧글로 이렇게 장문을 쓰게 되었읍니다.

그동안에 카폐에 오신 여러분들이 좀 지식을 알았다고 나가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어떤 경지에 들어선 것 같이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러나 무언가 자기가 알았다,깨달았다, 어떤 경지를 체험했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가 허황된 환상입니다. 무언가 얻었다거나 안다는 것은 바로 무지 그자체를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원인체를 완전하게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알고 체험을 해도 아무 소용없읍니다.

체험을 한다는 것은 아직 마음상태의 이원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아무리 깨달은 사람도 최종 깨달음상태에 대해서는 그저 <이것도 아니다,저것도 아니다>라고 무한한 부정의 전개, 모름밖에는 없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이런 점에 유의해서 자신을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머리 숙이고, 모든 세상만물과 자기가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 조차 사랑으로 대할 때에만 깨달음이 다가 온다는 진리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긴글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구도수행을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나, 어느정도 깊은 경지에 들어가신 분에게도

유익한 길 이정표가 되기를 빕니다.

언젠가 제가 글을 쓰고 싶을 때에 좀 더 세련되고 풍부한 자료를 준비하여 쓸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읍니다.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인도 베단타의 정통 비이원론 수행체계의 가르침 체계를 기본 골조로 해서, 니사르가다타,라마나 마하리쉬,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쉬,쌍카라차리아, 파탄잘리,여러 선불교 조사 등,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서 얻은 체험등을 참고하여 사전 계획없이 써지는 대로 체계없이 기술되었기 때문에

다소 산만한 구성이 되었읍니다만, 덧글 중에서 가장 길게 쓰고, 또 다 써놓고 보니깐, 오자도 많고 해서, 오자를 고칠 겸, 내용도 구도자 여러분이 참고할만 할 것 같아서 별도로 "참나 찾아가는 길목" 에 게재하기로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