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23. 19:50ㆍ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고대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마고지 및 철원평야 전경>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67회]
[원 문]- 백서본
天下皆謂我大
천하개위아대
大而不肖
대이불초
夫唯不肖 故能大
부유불초 고능대
若肖 久矣其細也夫
약초 구의기세야부
我恒有三寶 持而寶之
아항유삼보 지이보지
一日慈 二日檢 三日不敢爲天下先
일일자 이일검 삼일불감위천하선
夫慈 故能勇
부자 고능용
檢 故能廣
검 고능광
不敢爲天下先 故能爲成器長
불감위천하선 고능위성기장
今舍其慈 且勇
금사기자 차용
舍其檢 且廣
사기검 차광
舍其後 且先
사기후 저선
則死矣
칙사의
夫慈 以戰則勝
부자 이전칙승
以守則固
이수칙고
天將建之
천장건지
如以慈垣之
여이자원지
[한글 해석]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위대함이란 사라지지 않는 것이오.
대저 누구든지 (자기는)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그 때문에 능히 위대해질 수가 있소.
만약 사라지는 것이라면,
오래된 것일 지라도 하찮고 작은 것일 뿐이오.
나에게는 항상 세가지 보배가 있으니,
그것을 귀중하게 지니고 있소이다.
첫째는 사랑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살펴봄(自覺)이며,
셋째는 감히 세상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오.
대저 사랑은 용기를 북돗을 수 있기 때문이며,
스스로를 살펴봄은 넓게 펼칠 수가 있기 때문이고,
함부로 세상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음은 (도의)완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외다.
이제,사랑은 버리고, 만일 용기만 부린다던가
스스로를 살펴봄은 버리고, 만일 넓게 펼치려고만 한다든가
뒤에 서는 겸양함은 버리고, 만일 앞서려고만 한다면,
곧 (도는) 죽은 것이오.
대저 사랑으로 전쟁에 임하면 곧 승리하며,
(사랑으로) 지키고 있으면 튼튼하니,
하늘이 문득 (담장을) 세워서,
마치 사랑으로써 에워싸는 것과 같소이다.
[해 설]
이번 왕필본의 67장은 백서본에서는 32장에 해당됩니다.
이 67장은 곽점본에는 없는 장입니다.
본 67장 이후부터 마지막 81장까지는 곽점본에는 나타나지 않는 장으로써, 아마도 백서본 형성시기인 후대에 누군가가 추가로 삽입한 문장들이라고 전문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읍니다.
이 장도 역시 기존의 대부분의 해석서에서는 한문자 몇개를 잘못 해석하여 전체 의미가 다른 방향으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읍니다.
그 한문자는 <不肖>라는 단어인데,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만물과 닮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본 해석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것, 꺼지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였읍니다.
이렇게 해석해 보니 전체 문장이 마치 항아리와 뚜껑이 원래 한 셋트로 딱 맞춘 것처럼 전체 문장이 적절하게 해석이 되었읍니다.
또한 왕필본은 한문글자를 다소 개조하여 내용을 좀 바꾸었으나, 이것 또한 원래부터 <不肖>를 <닮지 않았다>로 이해한 것을 기준으로 한문자를 바꾸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전달되어 버렸읍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대부분 왕필본 원문을 그대로 믿고서 해석했거나 주석한 고금의 모든 노자도덕경 해설서들은, 옛 道(古之道)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평가해 보자면, 왕필본에서 개조한 원문자체의 부정확성 때문에 옳바르게 道를 해설한 해석서들이 단 한권도 없다는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읍니다.
간단하게 내용을 간추려 보면,
세상사람들이 "나"라는 개인을 위대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 보이는 "나"라는 것은 사라지지만, 위대한 道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란 내면에 있는 참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다고 믿으면 그 사람은 위대한 도인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오래동안 남아 있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어느 때인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위대한 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하찮고 자잘한 것이라는 말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내면에 위대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세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스스로를 살펴봄(자각), 그리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양, 이라고 합니다.
이 세가지를 잃어버리고, 자기 영역를 확장하려는 욕망만 가진다면,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고 경고하고 있읍니다.
반대로 도의 일원적인 사랑을 가지고 싸움에 임하던가 나라를 지키면,
마치 하늘이 사랑으로 단단한 방벽을 쌓아주는 것처럼 ,전체 사랑이 저절로 나라를 튼튼하게 지켜준다는 내용입니다.
문장별로 자세한 해석에 들어가겠읍니다.
天下皆謂我大(천하개위아대);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天下; 세상에서, 皆; 모두, 謂; 말하다, 我; 나. 大; 크다,위대하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대하다고 말한다,-라는 구절은 마치 이 글을 쓴 화자가 자기 자랑을 내세우는 것 같은 감이 드는데, 실은 자기 자랑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숨은 뜻이 있읍니다.
여기서 <我大> "내가 위대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我(나)"라는 개체를 말하고 있읍니다.
원래 노자도덕경에서 도인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나"를 표현할 때는 <吾>를 많이 씁니다.
또 도인이 아니고, 일반 범인이나 개인적인 입장에서 "나"라고 쓸때에는 <我>자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개인성을 나타내는 <我>자를 "나"라고 쓰면서도 도인의 위대함에 대해서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을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세상사람들이 "나라는 개인성"을 위대하다고 잘못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사람들이 겉으로 나타난 겉모습의 개인 한사람만 보고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사람들이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하는 숨은 뜻이 있읍니다.
그래서 '나'라는 말을 <吾>자를 안쓰고 의도적으로 개인성을 표현하는 <我>자를 쓴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 문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왕필본에서는 원문이 좀 개조되어 있읍니다.
<天下皆謂我道大> "사람들은 모두가 나의 도가 크다고 말한다." 인데,
백서본의 <我大>가 왕필본에서는 <我道大>가 되어, <道>자가 추가 되었읍니다.
이렇게 <道>를 추가 한 것은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개조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我道>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我>는 개인인데, 개인의 道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도인이 되면 개인성의 에고느낌인 <我>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노자도덕경 다른 장에서는 도인입장에서 "나"라고 말할 때는 <我>자를 안쓰고,
반드시 <吾>자를 썻읍니다.
따라서 왕필본에서 <我道大>라고 개작한 것은 엄밀히 지적하자면 잘못 쓴 것입니다.
왕필본에서는 백서본 문장의 숨은 의도를 잘못 파악하여 화자가 자기 자랑을 드러내놓고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읍니다.
大而不肖(대이불초) ; 위대함이란 사라지지 않는 것이오.
肖; 꺼지다, 쇠약해지다, 흩어지다,사라지다,없어지다.모양이 같다,닮다.본받다,
여기서 위대함, 크다고 하는 <大>는 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도의 위대함은 꺼지지 않고 쇠약하지 않는 것, 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不肖>는 여러가지 뜻이 있읍니다만, 여기서는 "꺼지지 않는다, 또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했읍니다.
즉 "나라는 개인"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내면에 꺼지지 않는 빛, 참나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위대한 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모든 도덕경 해석서들은 이 <不肖>를 "닮지 않았다"의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문장의 의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읍니다.
道라는 것은 모양과 속성이 없고,지각으로는 알수가 없는 것인데, 굳이 "어떤 것과 닮지 않았다"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묘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 67장에서는 기존 해석서들 뿐 아니라, 왕필본 원문자체도 이 <肖>자 한자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원래의 백서본 원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설하고 있읍니다.
위대함(大)이란 도(道)를 말하는 것이고, 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양이 없고,항상 있는 그대로 있으며,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대부분 해석서들은 "위대함이란 닮은 것이 없다"라고 해석들을 했읍니다.
또 어떤 백서본 해석서는 " 위대함은 내가 자처할 수가 없네"라고 해석을 했읍니다만,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不肖>라는 말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하는 말>이라고 이해하여 이렇게 해석한 곳도 있읍니다.
왕필본에서 이 부분에 해당되는 문장을 보면, <似不肖> "닮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라고 해석을 하고 있읍니다.
夫唯不肖 故能大(부유불초 고능대) ;대체로 누구든지 (자기는)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그 때문에 능히 위대해질 수가 있소.
夫; 대저,대체로,사내, 사람, 唯; 누구,생각하다. 不肖; 없어지지 않는다. 故;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다고 믿는다면, 그 자체로써 능히 위대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기간 살다가 죽는 한정된 육체가 아니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내면의 큰 참나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위대한 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를 보면, "위대하다고 생각치 않기에 오히려 위대해 질 수 있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네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되었는데, 불초(不肖)라는 한문을 잘못 해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필본의 원문과 해석을 보면, <夫唯大 故似不肖> "오직 크기 때문에 닮은 것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왕필본의 한문원문내용은 그 원문을 필사한 사람이 백서본의 원문을 자기 나름대로 <닮지 않았다>고 이해한 내용대로 다시 문장을 적절히 고쳐서 개조한 것 같읍니다.
이렇게 완전히 뜻이 달라진 왕필본을 통용본으로써 오늘날까지 아무런 검토도 없이 그대로 전수해 온 것이죠.
若肖 久矣其細也夫(약초 구의기세야부); 만약 사라지는 것이라면, 오래된 것이라도 하찮고 작은 것일 뿐이오.
若; 만약,같다. 久; 오래다,길다. 矣;어조사. 細; 잘다,천하다. 也; 어조사,또한,다른 夫; 감탄사 어미,
만일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라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하찮고 작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하찮고 작은 것이라는 뜻은 실재(實在)가 아니고, 잠깐 나타나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환상과 같은 일시적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일시적으로 생주일멸(生住異滅)이 진행중이며, 모두가 의식이 잠깐동안 움직이는 그림자로써 한순간 꿈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심지어 이 현상으로 보이는 하늘과 땅 조차도 도에 비하면 잠깐 나타나 보이는 작고 하찮은 그림자들입니다.
영원히 쇠하지 않아야 위대한 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 맨끝에 <夫>자가 들어간 것은 감탄사 ! 혹은 강조문으로 표현한 것으로 우리말 해석은 <~일뿐이오>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이 문장에 대한 백서본 해석을 보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면 오래 전에 '좁쌀'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네요. <若肖>를 위대함과 닮은 것이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왕필본의 한문원문은 위의 백서본과 같읍니다.
그러나 왕필본 해석의 한예를 들어보면,"만약 무언가를 닮았다면 그 자잘함이 오래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이 역시 <若肖>를 '무언가를 닮은 것'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我恒有三寶 持而寶之(아항유삼보 지이보지); 나에게는 항상 세가지 보배가 있으니,그것을 귀중하게 지니고 있소이다.
恒: 언제나,항상. 寶; 보물, 귀중품, 持; 지니다. 가지다.
세가지 보물이란 바로 도의 세가지 특성을 말합니다.
그 도의 세가지 특성이 인간의 심성적인 측면으로 묘사한 덕을 세가지 보물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 덕을 귀중한 보물로써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인의 상태에 안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백서본이나 왕필본이나 본해석과 비슷합니다.
一曰慈 二曰檢 三曰不敢爲天下先(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첫째는 사랑이고, 둘째는 살펴봄이며, 세번째는 감히 세상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오.
曰;말하다. 慈; 사랑,자비, 檢;검사하다,조사하다, 살펴보다.敢; 함부로,감히, 先;앞서다.먼저
<慈>는 '자비,사랑"의 뜻으로 "전체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이라는 주객 이원화로 분리된 사랑이 아니고, 완전히 일체가 되어 주,객이 없는 일원적인 도의 상태를 <慈> "사랑,자비"라고 묘사했읍니다.
도에서 나온 순수의식이 바로 덕이며, 이 덕(德) 자체가 바로 자비, 하나사랑 그자체입니다.
이 절대상태의 하나사랑이 이원적인 현상화로 나타나게 되면, 절대 바탕의 그림자로써 존재성, 즉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나타나는데, 이 "내가 있다"는 느낌이 다시 육체 동일시에 의하여 에고에 대한 자기 애착으로 변환되어 이기적인 개인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개인성이 여러가지 외부대상에 대한 애착심,집착심을 발휘하여 각종 욕망과 자기존재성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죠. 즉 재물욕,명예욕, 애욕 등등 모든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공간성과 시간성으로 확장하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 내가 있다는 느낌은 결국 절대존재의 그림자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여기서는 보편적인 일체감, 모두가 하나라는 전체사랑 <慈>, 즉 사랑, 자비의 마음이 道를 간직하는 데 첫째로 중요한 요건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檢>은 "검사하다,조사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살펴본다"라는 도의 주시측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판단되어 여기서는 <자기자신의 내면을 주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살펴봄> 또는 자각(自覺)이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절대바탕에서 나온 의식자체가 "자기자신을 스스로 살펴보는 작용"이 바로 "자각(自覺)입니다.
절대바탕에서의 <자각>이 반사되어 이원적인 현상화로 비쳐지게 되면 의식의 앎작용이 됩니다.
이 앎은 순수의식에서는 보편적인 진지(眞知)가 되고, 육체 동일시에 의하여 이원화된 그림자인 개인의식에서는 주객 상대적인 지성(知性)이 됩니다.
모든 지식과 앎은 이 절대바탕의 절대자각으로부터 반사되어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계에 나타난 개인적이고 주객 이원화된 앎은 절대자각이 직접 비춰진 것이 아니라, 육체 동일시에 의하여 개인성의 무지(無知)라는 반사점에서 되반사되어 나타난 그림자의 허황된 앎입니다.
따라서 <檢>은 모든 앎의 근원인 <自覺>을 말합니다.
<自覺>, 즉 <스스로를 주시함>이란 자연적인 주시상태를 말하며, 도의 가장 중요한 기본작용입니다.
여기서는 이 <스스로를 살펴봄>이 도를 간직하는데 두번째로 중요한 것으로 말하고 있읍니다.
한편 이 '검사할<檢>'을 왕필본에서는 '검소할<儉>'으로 글자를 바꾸어서 <검약 또는 검소>로 해석했는데, <검약과 검소>라는 단어는 개인의 <무욕>의 다른 표현이며, 원래 백서본의 <檢>자의 <조사하다,검사하다,살펴보다>라는 뜻과는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읍니다.
그런데 기존의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검소함" 또는 "단도리"라고 해석한 것을 따라가고 있읍니다.
<不敢爲天下先>은 표면적인 해석은" 세상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행동에 나서지 않는것"즉 "겸양의 덕" 또는 "행위자 의식이 없는 수동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 또한 마음이 항상 내면에 부동(不動)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의미도 있읍니다.
이 겸양의 덕은 도의 본체 자체가 항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숨어 있는 내밀성(內密性)과 부동성(不動城)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이 내밀의 부동성이 현상화 되어 상대적인 이원화의 그림자로 활성화 되면, 모든 움직임,시간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지 말고, 수동적으로 뒤에 떨어져서 말없이 내면의 지켜보는 자로써 안정되어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 자각, 수동성(受動性)의 세가지는 절대바탕 상태에서는 구분이 없이 모두가 일체가 됩니다.
이 세가지가 일단 도를 깨달은 사람이 그 깨달음의 상태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도를 안정되게 다지기 위해서 간직해야 할 세가지 중요한 보물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문장에 대한 다른 백서본 해석은 "하나는 자애로움이고, 둘은 '단도리함'이며, 셋은 '감히 세상보다 앞서지 않음'이네."라고 되어 있읍니다.
<檢>자를 "단도리함"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왕필본은 원문이 검사할<檢>자가 검소할 <儉>자로 바꾸어서 <검소함>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왕필본 필사자가 자기가 이해하기 좋은 글자로 원문을 바꾸어서 해석한 것입니다.
夫慈 故能勇(부자 고능용); 대저 사랑은 용기를 북돗을 수 있기 때문이며,
故; 때문이다.(이유), 能;능히 할수있다. 勇;날래다,용감하다,과감하다.
<慈>즉 "사랑 또는 자비"는 전체와 일체가 된 상태이므로 너와 나, 이것과 저것이라는 상대물이 없고 모두가 하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상대적인 적이 없는 무적의 상태이며, 하나가 된 사랑자체가 모든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사랑이 있으면 상대방에 대하여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으므로 무한한 용기를 갖을 수가 있읍니다.
이문장은 모든 해석이 대략 비슷합니다.
檢 故能廣(검 고능광) ; 살펴봄은 넓게 펼칠 수가 있기 때문이고,
廣; 넓다,넓게 되다.
<檢>은 도의 자각(自覺)상태를 말하는 "스스로 자신을 살펴봄"이기 때문에,
이 자각상태가 현상화되어 밖으로 나오면 저절로 의식이 전체에 넓게 펼쳐지는 순수의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각상태가 되어야지 전체에 넓게 편재(遍在)할 수가 있게 됩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내용은 " '단도리'하기 때문에 넓어질 수 있으며"라고 해석했고,
왕필본은 "검소하기 때문에 널리 베풀수 있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不敢爲天下先 故能爲成器長(불감위천하선 고능위성기장);
함부로 세상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음은 완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외다.
成器; 완성된 그릇, 여기서는 '완숙의 경지' 長; 나아가다,어른
세상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도인이라고 드러내 놓지 않는 것은 깊은 내면바탕에서 더욱 도를 안정되게 다지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절대참나는 항상 가장 깊은 내면 밑바탕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며, 따라서 도의 길을 가려면
자기가 행위자라는 적극적인 자세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배면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절대참나에 근접해 갈 수가 있읍니다.
내면의 절대참나와 일체가 되면 그때는 보는 자와 대상이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조금이라도 자기가 행위자라는 의식이 있는 한에는 아직 개인성이 녹지 않았으므로 의식이라는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밖으로 내 보일려고 하는 적극적인 행위는 에고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므로, 안보이는 뒤로 물러서서 수동적인 도의 내밀성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는 "감히 세상보다 앞서지 않기에 큰 그릇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왕필본에서는 "감히 천하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그릇을 이루는 수장이 된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今舍其慈 且勇(금사기자 차용) ; 이제 사랑을 버리고, 만일 용기만 있다면
今;이제,지금,만약, 舍; 버리다. 且; 또한,우선,장차,만일
사랑을 버리고 용기만 남는다는 말은, 전체가 하나라는 일체감을 버리고,
개인성이 되어 나와 너의 이원적인 관계로써 의도적인 용기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즉 도를 잊어버리고 별도로 떨어진 개인성이 되어서 용기만 부린다는 것입니다.
전체 사랑으로 용기를 쓴다면 무한한 힘이 나오겠지만,
개인이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용기를 쓴다면 그 힘도 작은 범위 내로 좁아져서, 상대적인 개인능력으로 제한되어 버리겠죠.
이 문장은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와 왕필본 해석이 위의 해석과 모두 비슷합니다.
舍其檢 且廣(사기검 차광) ; 자각(스스로를 살펴봄)을 버리고, 만일 넓게 펼치려고만 한다면
자각상태는 자연적이고 무위적으로 살펴봄(자연주시)이 펼쳐진 상태이지만,
만일 이러한 자연 주시상태를 버리고, 모든 것을 의도성을 가지고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욕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도의 자각상태,즉 자연주시상태는 원래부터 전체적으로 편재해 있는 상태이지만,
억지로 모든 곳에 펼쳐지려고 한다면 이것은 개인의 유위적인 억지 행위가 되므로 그 자체가 조건화되어 개인적인 욕망으로 변형되겠죠.
만일 의도적으로 관찰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그 시야 범위가 어떤 대상에 대한 목적성이나 조건화 한계내로 좁게 제한될 수 밖에 없으므로 넓게 펼쳐 볼 수가 없겠죠.
자각은 속성이 없는 자연적인 주시상태이지만, 의도적인 관찰상태는 조건화되고 속성으로 제한된 개인의 마음자세가 됩니다.
주객이원적인 지성은 아무리 그 범위가 확장되드라도 결국 의식 안에서, 제한된 조건 하에서 반사된 앎일 뿐입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서는 "단도리함을 놓아 버리고 넓어지기만 하며"라고 되어 있고,
왕필본은 "검소함을 버리고 널리 베풀고자 하며"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舍其後 且先(사기후 차선); 뒤에 서는 겸양함을 버리고, 만일 앞서려고만 한다면,
<後>의 뒤에 있다는 것은 안보이는 내면을 말하며, <先>의 앞에 있다는 것은 외부에 드러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면에서 머무는 것을 버리고, 밖으로 나서서 드러나려고 한다면,
<全人> 상태의 도에서 벗어나서 <個人>상태의 이기적인 에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도인이 타락하여 속인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죠.
또한 남보다 앞설 생각이 없는 무욕을 버리고,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면 도인이라기 보다 욕심이 가득찬 속세인의 개인적 행위가 되는 것이죠.
백서본의 다른 해석은 "뒤에 서는 겸손함을 버리고 앞서게 된다면"으로 되어 있으며,
왕필본은 " 뒤지지 않고 앞에만 서려 하면"이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則死矣(칙사의) ; 곧 (도의) 죽음인 것이오.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도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참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육체로 태어난 개인이라고 여긴다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등 뒤에 지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위에서 전체적인 사랑을 버리고, 자각을 버리고, 무욕을 버리고,속세의 개인성이 된다면, 이는 자기자신이 육체로 태어났다고 여기므로서, 태어남과 죽음이 같이 동거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육체의 탄생과 함께 죽음도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죠.
즉 영원한 참나의 도를 버리고, 개인으로써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죽음의 길로 접어든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개인성이 된다는 것은 道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모든 해석서들이 비슷합니다.
夫慈 以戰則勝(부자 이전칙승) ;대저 사랑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곧 승리할수 있으며,
전체적인 사랑을 지니고서 전쟁에 임한다면 곧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위에서 말한 전체적인 사랑은 용기를 북돗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랑이란 믿음이고 그 믿음은 용기를 북돗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해석서들이 비슷합니다.
以守則固(이수칙고) ; (사랑으로) 지키면 튼튼하다,
이문장도 사랑으로 지키면 튼튼하게 지킬 수 있다는 말인데,
다음 문장과 그 내용이 연결된 문장입니다.
왜 하나 사랑을 지니고 나라를 지키면 튼튼할까요?
모든 해석서들이 비슷합니다.
天將建之(천장건지) ; 하늘이 문득 (담장을) 세워서
將; 문득, 建; 세우다, 之; 道 또는 담장을 지칭하는 목적격 대명사.
전체가 하나라는 사랑의 힘이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담으로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도와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이 되면, 원하는 것은 저절로 하늘이 도와준다는 이죠.
여기서 <之>는 목적격 지칭 대명사로써 뒷문장의 <垣>(담장)을 가리킵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은 "하늘이 장차 그를 세우려고 한다면"으로 해석 되어 있고,
왕필본은 <天將求之>로 원문이 바뀌어져 있고, "하늘이 장차 그를 구한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如以慈垣之(여이자원지) ; 사랑으로써 에워싸는 것과 같소이다
如; 같다. 垣 : 담,울타리,에워싸다.두르다. 之; 목적격 대명사.그 나라 또는 도인.
하늘이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담을 쌓아서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도인이 지니고 있는 일체성, 즉 하나사랑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방책이 저절로 쌓아져서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 주변의 모든 환경과 조건은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는 옛말처럼,
도를 깨쳐서 전체가 하나라는 사랑을 지니고 있는 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이므로, 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작용이 저절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말은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면이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도인의 주변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강력한 지복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펼쳐지는 현상은 여러사람들이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된 바도 있고, 또한 어떤 도인의 주변에서 머물면서 직접 체험으로 느낀 사람들도 많이 있읍니다.
또한 보통 구도자들이 도를 깨치기 위하여 구도수행을 하는 중간 과정에서 보편적인 생기(生氣)의 강력한 에너지 장이 그 구도자 주변과 전체 우주공간에 무한하게 펼쳐진다는 느낌은 조금 깊은 경지까지 들어가 본 구도자라면 누구나 원인체와 초원인체의 통과과정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큰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세상에 훌륭한 도인들이 절대신의 화신으로써 특별나게 많이 나타나서 전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펼치고, 큰 전쟁의 화를 어느정도 상쇄시켜 준다는 말이 옛부터 전해오고 있읍니다.
그 나라에 기(氣)가 높은 도인이 많이 있으면 그 지역에 평안과 지복의 생기 에너지장이 강력하게 펼쳐진다는 말은 괜한 헛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의 문장에서 하늘이 문득 기적을 일으켜서 안보이는 사랑으로써 담을 쌓아서 지켜주는 것과 같다는 말은 마치 요즘의 사이비 종교의 교주나 어떤 종교의 광신도가 중얼거리는 말처럼 들릴 수가 있고, 자칫 신비주의 경향으로 말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완전히 도를 깨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잘 진행되고 조화롭게 어울려진다는 도의 수숭하고 신비한 작용을 강조한 문장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백서본의 다른 해석은 " 자애로움으로 그를 감쌀 것이네"라고 되어 있고,
왕필본에서는 이 문장을 <天將求之 以慈衛之> "하늘이 장차 그를 구원코자 사랑으로써 그를 감싼다."라고 글자를 개조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그러나 이 왕필본의 문장과 해석은 원래 백서본의 원문 뜻과는 좀 달라져 있읍니다.
이번 67장은 기존의 해석서나 주석서들이 몇개 한자의 뜻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해석하므로서 전체 내용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달라져 버린채, 지금까지 잘못된 내용으로 전승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또한 이장의 내용은 구도자들에게 상당히 유익한 내용입니다.
위대한 道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도"에 안정되기 위하여, 구도자들이 항상 주의를 기울어야 할 세가지 중요한 수행지침을 알려주고 있읍니다.
그것은 하나사랑, 스스로를 살펴봄,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양.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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