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여 이원화적인 상상을 제거한다.

2011. 4. 4. 20:19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부라만에 대해서 이미 배워서 알고 있고,그 체험이 왔는데도, 아직도 망상에 끄달리고 있읍니다.

부라만은 내면에서의 비춤이며, 반면에 보여지는 환상(마야)은 외부에서 지각됩니다.어떻게 이 이원화 상태를 말끔하게 없애 버릴 수가 있겠읍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겠다,

지금 정신을 바짝 차려서 주의를 마음의 중심에 집중하고, 부라만과 환상을 아는 자를 이해해라. 

부라만이 진리라는 확신과 환상의 이미지들이 허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단순히 이원화 마음 상태이며, 마음의 혼돈상태이다.

 

부라만을 아는 '그것', 환상을 아는 '그것'은 제4의 상태인 투리아의 앎인데,

이 투리아는 모든 것을 아는 자이며, 모든 것의 주시자이다.

모든 것을 아는 투리아의 자취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없을 때는 아는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상상과 확신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 안에서만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허황한 것이라고 입증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하는 자는 누구인가?

 

주시, 생명기운(生氣), 힘(사타)은 모두가 부라만에 덧붙혀져 있는 속성들이다.

이것들은 환상에 의하여 부라만에 첨가된 불필요한 속성들이다.

 

공간은 하늘 허공, 건물 속의 공간, 항아리 속의 공간 등 각각 따로 따로 떨어진 것 처럼 보이지만, 똑 같은 하나의 공간이다.

이와 같이 부라만에 덧 붙혀진 속성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환상들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환상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주시자는 부라만의 속성이 된다.

환상과 무지가 사라지면 어떻게 그런 이원화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모든 것의 주시자인 마음이 무심(無心),즉 투리아상태로 된다면, 

앎 그자체 또한 사라져 버린다.

 

이원화 상태의 마음이 무심이 되면,

그러면 이원화와 비이원화라는 생각조차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원화와 비이원화는 마음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속성이 없어지면 어디에 이원화가 있겠는가?

 

어떤 정신적 경향성도 없는 무속성의 참앎(眞知)은 그것 자체가 충만감이며,

그곳에서는 환상이나 부라만이라는 생각조차 없다.

 

마음이 부라만과 환상이라는 각각의 이미지로서 상상을 한다.

그러나 부라만은 상상도 할 수조차 없고,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깨달은 진인은 이것을 잘 이해한다.

마음과 지성, 그리고 상상 넘어에 있는 그것은 직접 체험되는데,

어떻게 어떤 이원화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이원화를 본다면 부라만은 사라지며,

만일 그대가 부라만을 본다면 이원화는 사라진다.

이원화와 비이원화는 둘 다 상상 속에서만 나타난다. 

 

환상을 없애는 것도 상상하는 것이고,

환상이 없어진 그 자리에 대신 부라만이 차지한다는 것도 상상일 뿐이다. 

의심이 일어나는 것도 상상이며, 마찬가지로 그것을 없애는 것도 상상이다.

 

속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상이며,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상이다.

또한 부라만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가르쳐 주는 것도 상상이다. 

상상은 이원화의 모태이며, 앎도 또한 상상이다.

속박과 자유 둘 다 상상이다.

 

상상력이 극도로 강해지게 되면,비존재가 된 텅빈 공백(空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에 그것을 진아의 순수본성으로 잘못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구도자는 그것에

한 순간동안은 위태함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안정되게 머무르다가는.

또 어떤 순간에는 당혹스럽게 되기도 한다. 

한 순간에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다른 순간에는 무지 속에 있다.

이렇게 상상으로 창조된 것은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상상은 탄생의 원인이며, 그것은 헌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유를 주는 것도 역시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상상이 정신 수행에 이용될 때는 그것이 만족감을 주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직 상상이 모든 것의 근본 뿌리이며,

그 근본 뿌리를 제거하면 최종 부라만에 도달하게 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스스로 반조하고,

자기가 얻은 체험 속에서 직접 확인하게 되면 참된 충만감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환상에 의한 거짓 깨달음을 쫏아 버려야 한다.

 

순수한 부라만에 대한 확신은 상상력을 정복한다.

명확한 확신을 지니면 의심은 사라지고 포기된다.

햇빛이 비치면 어둠이 파괴되는 것처럼,

거짓 상상이 어떻게 밝은 진리의 빛 속에 남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진지의 빛 속에서 거짓 상상은 파괴되고,이원화 생각들은 함께 무너진다.

 

상상을 이용해서 상상을 제거한다.

마치 한 동물을 잡기 위하여 다른 동물을 이용하든가,

또한 하늘에 쏘아진 화살을 막기 위하여 또 다른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생각은 좀 더 옳바른 상상이 될 수가 있는데, 그 상상력에 의하여 옳지 못한 상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아주 예민한 주의를 가지고 명확하게 알아 들어야 한다.

 

옳바른 상상의 형태는 "속성없음"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참본성의 형태를 잊어버리지 않는데 도움을 준다.

자기의 참된 형상(무속성)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계속 명상 함으로써 이원화 생각들을 제거하고, 비이원적인 앎에 대한 확신을 얻으므로, 그 자체를 옳바른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이원화를 상상하는 것이 옳바른 상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며,

이원화 대상으로써 상상하는 것은 잘못된 상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잘못된 상상은 일반적으로 오염된 또는 물든 상상이라고 부른다. 

 

옳바른 상상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의미는 그것이 비이원화의 강력한 확신을 유도하는 것이며,

반면에 옳지못한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원화 상상의 감각 속에 오염된다는 것을 말한다.

비이원화의 상상을 활용하여 그것을 비추어 보는데 활용하면, 그 순간에 이원화는 제거되어 버린다.이원화가 사라질 때에 옳지 못한 망상들은 그것을 따라서 자연히 사라진다.

 

현명한 사람은 이와같이 상상을 가지고 상상을 제거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옳지 못한 생각들이 가버리면 단순히 옳은 생각만이 남아 있다.

 

상상의 옳바른 상태를 가지고 구도자는 자기의 참본성을 상상한다.

참본성을 상상할 때에 구도자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떨어져 나간다. 

 

이원화 상상이라는 것이 모두가 거짓이라고 알게 될 때에 구도자는 저절로 진아와 일체가 된다. 

진아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생각들은 전멸한다.

진아에 대한 구도자의 확신이 흔들리는 그 순간에 이원화의 상상이

마치 해가지면 어둠이 전세상에 깔리듯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앎이 오염되면 무지(無知)가 점점 더 커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도자는 계속해서 정신적인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지금 이에 대한 이야기로써 충분히 답변이된 것 같다.

모든 의심이 이 설명으로 충분히 풀릴 수 있다.

 

"그대는 이원화 속에 나타난 상상물이 아니다"                   

                                                                   -사마타 람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