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8. 12:58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1.
신은 누구인가?
신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자이다.
만약 이 세계를 초월해 있다면 그와 이 세계 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여기에는 그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세계를 초월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이 일어난다.
세계는 우리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포함한다.
바꾸어 말해서 생물(유정물)과 무생물(무정물)이 함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 두가지를 창조한 그에 대해 우리가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이 둘 중에서 우리는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는 존재들 중에서 그(神)가 가장 높은 위계에 속해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의 지성은 그 이상은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창조자는 우리의 지성능력보다 우월한 것이다.
이해하고 묘사하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神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의 지성(知性,앎)을 초월한다.
그는 우리의 지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체를 넘어서 있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까다울(Kadawul)', 곧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2.
그러면 우리는 신을 알 수 없는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이만한 정도의 그의 은총도 우리에게는 족하다.
우리에게는 그의 모든 위대함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는 우리의 불행을 근절하기에 족할 정도는 자기의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그는 현재상태에서 우리의 결함들을 치유하는데 필요한 정도 이상은 조금도 그의 힘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도에 따라서 알려진다.
아니,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무한하다 해도, 어느 경계선 내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3.
그를 우리의 앎(知性) 범위내에 들어 오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존재-의식-지복이라는 식별 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란 사멸될 수 없는 것,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가 어느 때라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이런 질문이 일어나게 된다.
그를 소멸시키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그를 창조했는가?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멸되거니와, 이러한 성품은 그것들이 불멸하는 자에 의해 지배된다는 추론으로 귀결된다.
이 불멸의 주재자가 신인데, 그의 이 불멸의 성품이 바로 존재(sat)이다.
그러면 의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의식이라고 할때 그것은 앎(知)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앎(知)이며, 우리의 가변적(可變的)인 알음알이(知識)과는 다르다.
그것의 작용에는 불귀칙함이나 오류가 붙을 수 없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앎(知)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인 지식에 관해서 보자면,
그것은 그가 작동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귀칙함과 오류를 드러낸다.
그는 빈번히 우리에게 " 그대의 지식은 불귀칙하고 오류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의 창조계에서는 지각력없는 것들(무정물)조차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반얀나무는 저렇게 큰데 그 씨는 당신이 왜 그렇게 만들었지?"
하면서 사물의 질서를 조롱한 한 무신론자가 얼마나 좋은 교훈을 배웠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지각력 없는 것도 질서있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 있는 어떤 행위자가 이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동성이 없고 지각력이 없는 것이, 무제한적인 知(앎)에게만 가능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우리의 어쭙잖은 지식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의식(Chit)이라고도 말해진다.
그러면 지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그것은 항상 충만한 평안이다.
그가 무엇을 욕망해야 한다면 , 어떻게 그가 우리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로부터 지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면 그도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리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자족의 상태는 지복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지복(Ananda)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세가지, 곧 존재,의식,지복은 분리할 수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제각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의식-지복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신은 초월적일 뿐 아니라,
존재,의식,지복으로서 우리의 지식 범위 내에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4.
네번째 상태를 얻어서 모두를 하나로 보는 사람만이,
신의 참된 상태, 곧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식-지복을 안다.
그러한 사람이 신과 어떻게 합일하는지는 말로 표현 할 수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과 수단들이 있다.
그것은 들려줄 수 있고,배울 수 있고, 행 할 수 있다.
神은 이처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
5.
그는 아무 이름이 없지만 우리가 그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그는 아무 형상이 없지만 우리가 그에게 형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어느 이름이 그의 이름이 아니며, 어느 형상이 그의 형상이 아니겠는가?
그가 들어 있지 않은 형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들어있지 않은 소리나 형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에 대한 참된 앎(知)이 없을 때는 그를 그대 마음대로 부를 수 있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형상으로도 그를 상상할 수 있다.
그대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의 은총을 바라는 것은 전적으로 헛된 일이다.
그대가 노력하지 않고도 그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면 모두가 비슷할 것이고,
아무런 차이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는 우리에게 길과 수단을 보여 주었다.
노력해서 목표에 도달하고 행복하라.
게으름과 이기심 때문에 그대는 노력하지 않고 그의 은총을 기대하게 된다.
그대의 노력을 늦추지 마라.
신은 노력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6.
다른 모든 노력을 능가하는 하나의 노력이 있다.
이것은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보다 저급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는 하나 이것은 더 수승한 숭배이다.
그것은 단지 그대가 모든 존재들에 대해-그들이 좋든 나쁘든-갖는 사랑이다.
모두에 대해 그러한 사랑이 없으면 신에 대한 그대의 헌신도 그를 천대하는 것과 같다.
그대가 신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세간의 어려운 이들에 대한 그대의 임무를 다하면서
신으로부터 그대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악(惡) 때문이다.
신이 계신 곳에서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신이 임재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비이기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심이 그의 것이고,
그가 모든 중심 안에 있다고 알고, 그렇게 그를 숭배하라.
신은 그러한 헌신에 의해서만 진실로 그대에게 귀속한다.
7.
신에게 이름과 형상들을 계속 귀속시키면서,
모든 이름과 형상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모두에게 계속 사랑을 보여주게 되면, 그대의 마음이 점차 성숙 될 것이다.
과일이 익어가면서 맛이 좋아지듯이,
그대에게도 선(善)이 늘어나고 악(惡)이 줄어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그대의 마음이 성숙해 감에 따라 그대가 스승을 찾아 다닌다기 보다도,
스승이 그대를 찾아 올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길을 움직여 간다.
그대의 근기가 그를 만나게 해주고,
그대로 하여금 그를 믿게 만들며,
그로 하여금 그대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게 하고,
또한 그대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따르게 한다.
그것이 신, 즉 네 번째상태에 도달하는 첩경이다.
그 길을 따라가서 그대의 목표인 존재-의식-지복에 도달하라.
만물의 정수인 그것이 바로 신이다.
8.
스승이 보여주는 길은 최종적이고, 곧고, 단일성을 향해 가며,
잘 검증되었고, 자연스럽고, 환상이 없고,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
스승이 보여준 그 길을 따를 때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두려움과 의심은 어둠의 길들의 특성 아닌가?
그것들이 어떻게 스승이 제시한 진리의 길에서 그대와 마주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그 길 자체가 그대에게 그것이 옳바른 길임을 납득시켜 줄 것이다.
그 길에서는 스승을 만나서 더 이상 무엇인가를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
그 길은 그대와 스승에게 공통되는데, 신이 그렇게 만들어 둔 것이다.
그대에 앞서 그가 그길을 밟아갔다.
그는 그길을 그대에게 보여 주었고 그대는 그를 뒤따르고 있다.
나중에는 그대가 보여준 그 길을 밟게 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므로 두려움과 의심은 진리의 길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대가 첫걸음을 일단 내디디면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의 도움은 그 첫걸음을 내닫게 해 줄 뿐이다.
스승이 그대에게 그 진리의 길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 스승에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를 신의 사자(使者),
즉 앞에서 말한 知의 방법과 헌신의 방법 중에서 어느 하나 혹은 둘 다에서 스스로 노력하는 성숙된 근기들에게 그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이 내려 보낸 신의 일꾼으로 알라.
그대가 성숙되는 바로 그때, 이러한 신의 사자을 보내는 이가 신이다.
9.
무지한 상태에서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을 박티라고 하며,
지식을 갖추고 실천하는 것을 냐나(jnana,知)라 한다.
박티의 두 갈래 중에서 하나는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신을 숭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세간사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냐나(知 수행)의 두 갈래 중에서 스승이 제시해 준 참된 길을 실천하는 것을 요가라고 하며,
그 결과인 상태가 진지(眞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그런 다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 스럽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신을 믿어서 해로울 것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믿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그대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
10.
그대가 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믿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신은 존재한다"라고 믿으라.
이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면 아주 강력해 진다.
그것은 아주 강력해서 그대는 신 외에는 아무것도, 심지어 그대 자신조차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신은 모든 것이다.
- Ellam ondre( All i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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