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7. 23:45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화가 시작되자 마자 마하리지가 물었다.
오늘은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 할까요?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마하리지가 이야기 한 주제가 별로 다양한 것도 아니고,
항상 비슷한 주제를 말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것은 대략 짐작들을 하고 있었다.
마하리지는 늘 한가지 주제, 즉 인간의 참본성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방문객이 그 주제에 맞는 질문을 했다.
"인간의 진실한 실체를 늘 의식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무엇이 있읍니까?"
마하리지는 웃으며 그런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붙들어야 할"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당신은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없겠읍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보통 본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자'가 '무엇인가'를 본 다는 것을 말하는데,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러한 봄으로는 불가능 할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과정입니다.
아주 특별한 지켜봄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직관적으로 보는 것, 내면으로부터의 봄이 필요합니다.
그 내면의 봄 안에서는 보는 자도 없고, 보이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完全自覺)
나는 여러분들을 혼란에 빠뜨릴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주제는 이렇읍니다.
실체는 없지만,그러나 완전히 가득 차 있고 충만해서 다른 주제들은
어떤 가치든 모두가 지워져 버립니다.
그러나 내가 할수 있는 일이란 그대들이 붙잡을 공식같은 것을 하나 줄수도 있겠지만,
만일 여러분들이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내면의 봄"을 기억한다면, 그것만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여러분들이 단순히 공식으로만 받아 들인다고 하면,
만트라 같은 몇마디 단어만을 받아드리는 것과 같이 되지만,
그 깊은 의미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만트라의 의미는 그 효험이 없게 됩니다.
이 공식의 목적 또는 위대한 만트라의 진정한 의도는
보는 것을 무한한 부라만으로 되돌려주라는 것입니다.(回光反照)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드러나지 않은 존재인 <이것>과 현상으로 드러나 보이고 있는 <그것>이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현시되지 않은 것과 현시된 것, 실체와 현상, 절대성과 상대적인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요.
나타난 현시란 현시되지 않은 비현시에서 (별도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절대상태가) 거울에 반사되어 비쳐져 표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본래부터 이원성(二元性)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객체란 주체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주체 역시 객체없이는 한시도 있을 수가 없읍니다.
본체로써의 "나"라는 <이것>은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 현상인 <그것> 안에 기본바탕인 <이것>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와 그것이 드러난 현상은 불가분의 동일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드러난 현시에서 무엇이 일어 납니까?
본질적으로, 내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할 수없다고 해서)),
"내가 있다"는 <이것>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잠시라도 나는 본체로써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한편 현상으로 드러난 나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모든 대상들이란 단순히 의식 안에서 나타난 상(想)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거울안의 반사상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의식 안에서 나타나 보여진 것(想)일 뿐이며, 어떤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실체들은 아닙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나"가 의식입니다.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마자 의식의 내용물인 마음은 대상화(이원화)의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 대상화의 과정은 이원화의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즉 주체와 객체라는 개념상의 구분, 기쁨과 고통같은 쌍대성의 상호대립개념들은 이원화 개념에서만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실체이며, 영원하고 순수주체인 "나"는 분리 되지 않은 채로, 전체성과 신성으로서 항상 남아 있읍니다.
또한 개념화의 과정에서는 인식되기 위하여 드러난 것,즉 대상으로 인식하려면 두개의 개념이 있어야 감지 될 수 있읍니다.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모양과 크기가 주어져야 하며,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간격이 주어져야 인식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전체적인 잠재력인 본체와 드러난 현상사이의 완전한 합일 속에 있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해방되고자 상상하는 속박이라는 개념은 머무를 만한 자리가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읍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속박이라는 견해는,
여러분이 일시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업의 인과원리에 종속되어있는 독립된 실체라고 착각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신이 바탕이며, 본질적으로 영원한 실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요소(업의 인과원리와 거기에 매인 속박의 원인)란 드러난 현상을 감각상으로 인식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속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어떤 독립된 실체(개인)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하겠읍니다.
상대적인 현시, 즉 보이는 이현상세계는 비현시된 절대의 표현이기 때문에 "환영"이 아닙니다.
비현시의 절대상태는 보이는 이세상 안에 내재해 있읍니다.
진짜로 환영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개별현상(육체)을 자기자신이라고 동일시 한 그대들의 잘못된 정체성인 에고적인 나인 것입니다. (육체 동일시 된 개인적인 나)
그런 개인성의 에고는 진실로 있을 수가 없읍니다.
잊지 마십시요.
그림자는 실체없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실체는 아닙니다.
-Points from Nisargadatta Maharaj, Ramesh Balsekar-
'성인들 가르침 >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있음"의 의식을 신으로 숭배하시오. (0) | 2008.10.10 |
---|---|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사랑 그자체이다 (0) | 2008.08.28 |
육체의식의 넘어서고 존재마저 초월해서- (0) | 2008.07.09 |
진실로 존재하는 것 (0) | 2008.07.09 |
깊은 산속의 신선한 옹달샘 한모금 (0) | 2008.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