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에는 우산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

2008. 7. 9. 21:39무한진인/나는 누구인가

거리에 비가 오고 있는 날에,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릴때나 ,혹은 음식점이나 사무실을 나올

때는, 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알기때문에 우선적으로 우산을 찾아 챙겨든다.

 

그러나 비가 오다 날이 개었다든가, 하늘이 비가 올것처럼 잔뜩 흐려 있지만 비가 안올때는 간혹 버스나 택시, 혹은 사무실,음식점에서 나오면서 우산을 두고 나오거나, 아예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사실 비가 안올때는 우산들고 다니는 것이 거치장 스럽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에 대한 존재감이나 자기인식도 평소 모든 일이 순조롭고, 하루하루가 평탄할때나, 재미있고 즐거울때는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은 안쓰고 외부적인 관심사에만 주의를 준다.

 

그런데

만일 갑자기 몸이 아프던가, 혼자서만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가 생기든가,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타인에 의해 자신의 신변에 중대한 변화를 겪을 때등, 정신적 고통과 갈등의 문제에 마주칠 때는 자신의 팔자타령을 한다든가, 자기존재에 대하여 새삼 인식이 깊어지게 된다.

 

즉, 일상적으로 평탄한 경우나 어떤일에 흥미나 열성을 가질때는 외부대상에만 주의를 팔고, 자신의 내면은 관심 쓸 시간이 없지만, 자기몸이나 마음속의 기상상태가 안좋을때는 외부적인 일보다 자신의 마음내면으로 주의가 기우려진다.

 

물론 어떤사람들은 오히려 위의 경우보다 180도 바뀌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너무나 일상이 단조롭고, 평탄하다 보니,우울증이나 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든가,

아니면 고민거리에 마주칠 때에 잊기 위하여 과음을 한다든가,딴짓거리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관심을 돌려 버리기도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마치 비오는 날만 우산의 존재를 신경써주고, 비오지 않는 날에는  한구석에 쳐박아 두거나,잃어 버리고,심지어 버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의 존재자각에 대하여 거의 주의를 안주고, 내버리다 싶이 팽개쳐 두고 있다.

 

물론 다양한 오락 문화와 볼거리,먹을거리,컴퓨터 인터넷발달등,다채롭고 화려한 상업문화가 사람들의 오감의 감각을 자극하여 외부로 정신을 향할 수 밖에 없도록 유혹하는 환경이 문제이긴 하지만, 자기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기회가 적어질수록  인간적인 감성과 이성이 메말라 지게되고 사회자체가 정신적,영성적 측면에서 사막화 되어가는 것 같다.

 

어떤 자동제어기계장치처럼, 사회시스템에서나 개인에게 있어서나 ,자기제어 관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내외부 환경변화에 조화롭게 적응할 수가 있는 것 아닌가?

개인에게 있어서 자기 제어란  외부대상으로 향하는 정신의 주의를 내면으로 되돌리는 피드백 씨스템을 항시 가동하는 것이 다름아닌 자기인식 또는 자각이라고 하며,

 

바로 내가 지금 있다는 "나의 존재감"을 항시 인식(앎)하고 있으므로서 내외의 어떤환경의 조건변화에도 스스로 조화롭게 자동 적응이 될 수가 있고,

개인으로서의 사회생활능력을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정신적 안정감을 확보할 수가 있고,나아가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서 신적인 정신세계, 무한의 의식세계에 다가설 수 있는 입구인 것이다.

 

요즘 사회면 기사에 화제거리로 등장하는 자살 유행병은 젊은이들이 외부의 목적을 잃자,내면의 자신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른 무지에 의하여 방황하다가 목숨을 스스로 버린 사회적,시대적환경의

희생자들이다.

 

그 젊은이들이 내면에 거대한 자신의 진실된 자아우주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외부적 대상에 희망을 잃었다고 실망하겠으며, 외면보다 내면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좀 배웠다면  자기인생을 마감했겠는가?

 

자기존재자각 또는 자연지 명상,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너무나 간단해서 누구나 자기 눈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것이고, 이해하기도 쉽고,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며, 잠잘때 조차도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몸이든,마음이든 간에 자기자신이 있다는 느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느낌만 가지고 지금 현재 그대로 생각없이 앉아 있기만 하면 그걸로 우주의식까지 그냥간다

그걸로 끝이다. 스승도 필요없고,어디 수련장도 필요없다. 스승은 자신의 내면의 스승을 잘 모시면 된다. 내면의 스승이란 조금만 자신의 마음이 고요해지면 자연히 알게 되어 있다. 다만 끈기와 뚝심과 지금 있는 이 나(개인)은 그림자일 뿐 진짜 나는 그뒤에 무한하게 펼쳐저 있다는 사실을 항시 상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신상이나 인간에 대한 헌신적인 신앙도 필요없고, 오직 자신내면만 굳게 믿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인도가 된다.

 

내가 있다는 느낌- 그것만 계속 알고 있으면서, 무엇을 하던,어디서던 그안다는 느낌만 가슴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저절로 자신이 이 우주보다도 더 넓어졌다는 느낌속에 녹아 버릴 것이다.

 

간단하죠?, 쉽죠? 지금바로 시작해도 상관없었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자꾸 육체를 생각하니깐

그냥"있다" 또는 "있음"의 느낌으로 해도 쉬워요. 있다. 있다. 아무 속성도 느낌도 없는 느낌.

눈을 뜨고 해도 되고, 감고 해도 되고, 처음에는 그렇게 느끼기만 하다가, 가끔 조용하게 앉아서 눈감고 명상자세로 하면 점점 익숙해 집니다.

 

가끔은 "이 존재느낌을 알고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질문을 해주면 그것이 명상의 엑셀레이타 역활을 하여 명상을 더 깊게 깊게 도와 줍니다. 다만 묻고나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마음속을 들여다 보지 말고, 내면의 시선을 머리 뒤퉁수 끝이나, 머리중앙상부,또는 가슴 오른쪽 젓꼭지 웬쪽,가슴중앙 또는 배꼽아래부위등 마음에 맞는 곳으로 하되, 자기 성향에 따라서 좀오래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신이 편한 곳으로 주의가 안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를 주시자쪽 즉,무한자쪽으로 기울리는 건데, 의식의 중심을 찾는 것이 어렵고, 의식의 중심,즉 주의의 뿌리를 찾아 주시자와 합일시키는, 주의가 주의속에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몇번 들어두면  그런기회때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육체의 자기동일시니, 주시니 하는 것들은 처음엔 신경쓸 필요 없어요. 그런건 하다가 좀 경력이 생기게 되면, 자신의 내면의 스승이 자동적으로 그런 책자나 자료를 찾도록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 주고, 당신은 그방면의 이론을 자신의 수련에 스스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의 그런 방향성이 오직 이수행에 촛점이 맞추어 질 때 부터는 고속도로를 순항하는 기분인데 때때로 장애가 있긴한데,그것은 당신이 개인이라는 녹다 만 개인의식의 습관쪼가리들이지만, 당신의 마음만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면 잠간 시비걸다가 사라지곤 한답니다.

 

문제는 처음 시작 때부터 자신은 이작은 육체와 육체속에 있는 마음이 아니고,아니고,절대 아니고,

오직 육체와 마음을 뒤에서 보고 있는, 이름도 없고,모양도 없고,색갈도 없는 무한하고 영원한,그리고 변하지 않는 공간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자기몸이 아예 무한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세요.그것이 육체의 자기동일시를 넘어가는 비결이예요. 인도에서 몇천년된 아주 효과 있는 비법예요.

 

생각해 보세요. 저공간이야 이세상 모든 사물이 그안에서 생겨나고,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가 그안에서 파괴되거나 죽지만서도,그 공간이야 뭐가 뿌셔지든 사람이 죽든,지진이 나든, 그대로 있잖아요. 아- 미군들이 이락에서 그위력 큰 폭탄을 물붓듯이 �아부어서 건물이 부셔지고 수백명의 사람

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옥으로 변해도 공간이 끄떡 없잖아요.당신은 그런 허공예요.

종필이 오빠의 허무한 허공이 아니고, 모든 것이 그곳에서 생겨나서,살고 유지하다가,그안에서 죽고,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살다 죽고 하는 모든만물의 자궁, 진공묘유가 그것예요,그것은 순수의식파동의 빛을 냄뿜는 완전공진상태의 진아의 태양입니다.

 

공간에 대해 좀더 얘기 할가요? 당신이 종이컵으로 커피를 딸아 마십니다. 커피가 들어가기 전의 종이컵내의 공간은 밖에 있는 공간과 다릅니까? 같죠, 컵안이 비었을 때와 커피가 들어갔을 때 공간이 다릅니까? 커피가 들어 갔어도 공간은 거기 있읍니다. 커피를 다마셨읍니다.공간이 새로 생겼읍니까? 아니죠, 공간은 커피가 거기 있으나 없으나 항상 거기 그대로 있었읍니다. 이제 종이컵을 꾸겨서 휴지통에 넣었읍니다. 종이컵에 있던 공간은 거기 그대로 있읍니다. 종이컵이라는 시각그림은 이제 제기능을 다해서 휴지통에 버려졌읍니다.종이컵이 자기속에 있던 공간을 가져가서 나중에 소각장에 가서 타버릴 건가요? 공간이 어떻게 타요?, 당신이 어떻게 죽어요? 당신은 컵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고, 컵이 가지고 있던 공간이잖아요. 공간은 거기 그대로 있잖아요. 그것이 당신이 몰랐던 존재예요, 당신존재가 바로 그 영원한 존재예요, 그러나 사실은 진짜 당신은 그공간보다 더 미묘하고 생기넘치는 의식의 공간예요.

 

당신은 무한합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러므로 당신은 없기도하고 무한하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은 개인으로서 진아를 찾고 있지만 찾는 자신이 바로 찾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찾는 개인이라는 것은 개인육체가 지닌 오감과 뇌의식의 프리즘에 의해 반사된 의식만을 가지고 세상과 자기자신을 의식하니 전체를 알겠어요? 그래서 개인이라는 것은 반사의식에 나타난 아예 없다가 나타난 환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직 전체가 하나이니, 그대가 찾는자는 바로 찾는 당신자신이라는 거예요.

 

기독교 성경,출애굽기에 모세가 황야에서 신을 찾으러 다니다가 무슨산에선가 덤불숲에서 불꽃이 일어나면서 신의 목소리가 들렸읍니다. 모세가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물어보았읍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으니, 불꽃이 대답했읍니다.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존재니라.

이것을 무한진인은 다시 해석해 봅니다.  존재는 "있음"이지만 그것은" 앎"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는 앎의 앎이니라"라고 빠꿀 수 있고, 다시, 앎x앎= 자각

즉 앎과 앎을 곱하면 앎 자승- 자각,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 하면 자각은 우리가 보통의미의 자기인식이 아니라, 앎의 파동과 앎의 파동이 융합하면서 공진상태로 된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