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9. 21:46ㆍ무한진인/나는 누구인가
요즘 사람들의 생활이 여유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극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에 염증을 느껴서인지,
또는 영성의 시대가 다가 와서인지는 몰라도, 웰빙이니 정신수행,기,명상,단,선 등의 정신수련에 관심들이 많고, 정신수련이나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기 위한 수련단체들도 많이 설립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한다고 말하면 조용히 앉아서 자기내면에 주의를 주고, 정신을 일념에 집중하여마음을 생각들이 들고 나지 않도록 유지하면서,궁극적으로는 절대의식속에 합일하여 소위 말하는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의도적인 정신적 행위라고 말들 하고 있다.
명상이라는 말은 그속 내용에 있어서는 명상수련과 수련 결과로 얻어진 명상상태, 두가지의 의미가 복합되어 평상시 사용하는 듯하다.
아주 평범한 주제지만 여기서 명상수련과 명상상태,그리고 명상상태 이후의 과정등을 분류해서 분명하게 그의미와 중요성을 파악함으로써, 현재 명상을 하고 있는 분들, 또한 명상을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될가해서 간단하게 아는대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어떤 정신수련 과정이든 대개 기초부터 중급,고급등의 순서로 체계적인 수련단계가 잡혀져 있었 수련자들은 그과정에 따라 순서대로 수행을 하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는 명상의 종별이나 수련체계에 관계없이 일반적인 측면에서 간단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내가 명상을 한다' 고 말할 때, 나는 두가지 상태중에 한가지를 하게 된다.
즉, 내가 '명상수련'을 한다는 것은 아직 '명상상태'까지 접어들지 못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명상상태"로 앉아 있다고 말한다면 "명상수련"은 필요없고, 자연스런 삼매상태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명상수련"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앉아서 눈을 감던,눈을 뜨던 어떤 대상(마음,호흡,만트라등등)에
마음을 집중하는,의지를 가지고 마음을 억지로 쓰는 행위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명상상태"라는 것은 반대로 전혀 수행자의 어떤 의지적 행위가 필요없는 "자연적인 일념상태"로서 확고한 안정상태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보통 명상을 수행한다고 할 때 수련체계마다 독특한 방법(대개 주의를 집중하는 대상의 종류가 다름에 따라 이에 대한 수행체계가 달라짐)으로 "명상 수련 방법"은 상이 할지 몰라도
그 의지적 수련행위의 결과로 얻어진 명상의 목적인 "명상 상태"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일념 집중상태"가되기 위한 것은 어떤 수행단체의 체계일지라도 목적은 거의 동일한 것 같다.
다만 수행체계에 따라서 말의 의미나 표현, 또는 단계별 구분 등이 다를 수는 있다.
자연스런운 명상상태에 접어들면 이제 수행인의 의지적 행위는 중지하고, 무위적인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삼매"상태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삼매상태에 접어들기 직전까지는 마음이 이원화(주관과 객관으로 양분)되어 보는자와 보는 대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인데,
자연스런 명상상태가 오래 유지되어 안정되면, 삼매상태가 저절로 찾아오게 되고, 이삼매상태는 바로 의식의 일원화 (불이원,주관과 객관이 하나)상태인데, 처음에는 간혹 찾아 오다가, 점점 회수가 늘면서, 이기간 중에 수행자의 남은 바사나(육체의식)가 녹아 없어지고, 결국 삼매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궁극의 절대일원상태에 안정되게 된다.
명상상태와 삼매과정에서 육체개아의식이 녹아 없었지고 우주자아의식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자신의 본체와 세상 우주창조의 원리등의 전체적인 우주지혜,진리를 개념적으로 깨치게 된다.
명상수련(개인의식의 의지적 행위)과 삼매(일원화 과정)사이에는 명상상태( 주,객,이원화와 일원화상태의 중간 연결부)가 자연스러운 교량역활을 하는 것 같다.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수행자들이 "명상 수행"이라는 의지적 행동을 "명상상태"라는 "마음이 조용하게 쉬는 자연 스러운 경지"를 무시하고, 명상수행결과로서 어떤 깨달음이나 해탈같은 번갯불이 뻔쩍해서 얻어지는 결과를 기다리면서 끊임없이 개인 육체의식의 의지적 행동으로 "수행"만을 고집한다는 것이 문제다.
수행의 결과로 수행자가 볼 수 있는 최종결과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조용히 유지"시키는 것이고
그이후 삼매니, 절대의식이니 하는 것은 저절로, 불시에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또한 수행중에 어떤 빛이나 육체감각, 투시나 예견등등, 초상현상의 이원화 경험으로는 수행정도를 어느정도 표시해 줄수 있는 듯도 하지만, 그런 것들도 하나의 의식의 이원화(보는자와 대상)를 더 분열시켜 수행자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으므로, 그런 경험들은 흘러가는 물결처럼 무심하게 흘려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그런 경험들이 필요 없는 것으로 수행에 방해된다고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그짓 또한 의지적 행동이 가해지므로 역효과만 난다.
다만 불필요하게 주의만 주지 않으면 된다.
수행시 마음속에서 생겨나서 흘러다니는 잡념이나 심상, 심리현상,경험등은 모두 의식의 관심과 주의를 영양분으로 먹고 자라는 박테리아 같아서, 의식의 주의나 관심을 안주면 저절로 사그러지는 경우가 많다.
선수행도 마찬가지로 "수행과정"과 "쉬는 과정"이 있어서 무조건 장기간 화두만 갖고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화두선수행으로 空상태로 마음이 조용하게 된후 우주의식상태에서 삼매상태가 자주 �아오면서
결국 無相,無念 無我의 안정된 眞空妙有의 확고함이 정착된다.
옛선사들은 수행자들에게 선수행을 그만두고 그냥 쉬라고만 말씀을 하신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다.
조주선사도 어느승이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즉시로 얻을 수 있느냐고 물어 보는 말에
"금강선을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어록에 기록되어 있다.
수행이 깊어져 어느 경지에 들면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적당한 시기에 잘 쉬는 것은 "자기가 성취하고 싶은 욕망 그자체"를 잠재우는 동시에 목적지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하는 틈바구니(기회) 여유를 열어 주기도 하는 일석 이조의 중요한 수행단계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쉰다고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수행행위에 속도만을 가속을 하다 보니, 부레키 밟아서 급제동할 수도 없고-- 천 상- 엔진 제동을 걸어서 속도를 줄여야 되는데, 속도 줄이자니 그동안 애써온 것에 미련을 못버려서, 그놈의 관성력 때문에--- 쯧 쯧-
결론적으로 명상이나 정신수행은 "수련"과 "마음이 쉬는 상태"를 잘 구분하여 "쉬는 것"에 더 중요하게 비중을 두어야 하지 않을 까?
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수행자를 본연의 자연인으로 저절로 변화시켜 줄 테니깐 말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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