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인 주시에 대하여

2008. 7. 9. 21:50무한진인/나는 누구인가

수행자들이 보통 주시라는 말을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행위로 잘못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수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의도적인 목표를 가지고 정해진 방법에 따라 집중이나 관찰 훈련을 하는 행위라고 일반적을 알려지고는 있지만,

이런 것은 잘못된 인식이 아닐까? 주시에 대한 훈련이나 사전연습을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괜히들 수행한답시고 아까운 육체와 마음과 에너지만 소모시키다가 종래는 소꼬리도 못보고 지쳐 버릴 텐데-

명상인이 자기생각이나 개념,행위등을 주시한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 과는 질적인 차원에서는  완전히 차이가 다르다.

 

의도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자신의 개체성의 의지를 강화하는 행위일 뿐이다.

명상목적이 날뛰는 마음을 조용하게 달래어, 고요하게 하려면, 개인성이 사그러져야 하는데, 과연 개인적 마음의 의지를 강화해 가지고서 소기의 명상목적을 제대로 이루어 낼 수가 있을까?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한 육개월 후부터 주변과 엄마를 알아차리기 시작할 때가 바로 나라는 의식을 자각 할 때이다. 그전에도 본능적으로 배고푸면 자연히 울고, 오줌싸서 아랫도리가 축축하면 자동반응으로 울면 엄마가 기저기를 갈어준다. 그러나 태어나자 마자는 전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니깐 우리가 태어나면서 받은 의식이란 것은 자연적인 앎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의식은 자연적인 앎인데,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앎이 기반으로 가지고 있다.

이존재앎이란 마치 영화의 빈영사막같이 전우주가 그안에 들어 갈 수 있는 무한 백지 같은 순수의식 또는 순수앎이다.

 

대개 명상인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자세히 자신의 그런 행위를 관찰해 보면 생각이 난뒤에, 행동이 끝난 뒤에 확인 관찰이라는 뒤늦은 주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좀 눈치가 빠른 수행인들은 알아차리기도 한다.

그건 아주 좋은 관찰력이지만, 원래 당연했던 것이다.

무슨 관찰이든 의도적인 행위나 생각의 흐름등을 억지로 관찰한다는 것은 관찰 대상과 관찰행위가 동시에 의도적으로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동시에 어떻게 한사람이 머리 하나 가지고 두가지 생각을 동시에 행 할 수가 있나?

억지로, 의지를 가지고는 두가지 동시에 하려면 머리가 두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동시에 주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았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것이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순간의 행위일 때는, 대상의 일어남에 대한 결과에 대한 과거 정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러면 주시한다, 관찰한다 하는 단어는 주시된다, 관찰된다는 능동형에서 수동태로 바뀌어져야 할 것 같다.

 

자- 주시한다, 관찰한다 라는 말은 어느순간 또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의도적으로 행하는 일시적인 행위를 말하지만, 주시된다, 관찰된다라는 수동형태는 그 주체, 주시하고,관찰하는 주체가 배경에 존재해서 항상 스탠바이 상태에서 그앞을 지나는 생각의 흐름이나 행위들을 자동적으로 감지해야 되는 조건이 있다. 그 주시나 관찰의 주체가 바로 자연적으로 나타난 의식, 존재앎인 것이다.

 

우리는 새벽에 잠을 깨고나서 부터는 정신이 들고, 주변에 모든 사물과 움직임을 자연적으로 감지하고 아는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다. 즉 잠을 덜깨도 일단 정신이 들면 자기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지금 침대에 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 있는 지를 잘 알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하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그건 내의식속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상생활에서 의식속에 자연적으로 알려지지만, 억지로 주의를 가는데도 있고, 의도적으로 외면하여 주의를 딴 곳을 돌리는 경우도 있지만은, 아무리 자기의지를 가지고 주의를 안 주더라도, 의식내에서 자연적으로 진행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만일 어떤 것에 주의를 돌린 다는 것은 그것은 다만 나타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뒤늦은 행위일 뿐이다.

이렇게 의식속에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주시되고 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주시상태의 의식을 끊임없이 자각할 수 있는 상태, 즉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주시라는 것이다.

 

의식이란 것은 어떤 특정한 행위자가 없이 자연적이고, 전체로서 반응되고 있다.

문제는 명상자 자신이 행위자라는 주인공의식을 가지고 주시한다, 관찰한다고 의도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동시적인 주시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우리의 상태, 진아의식은 공간보다도 더 극묘한 전체로서 온우주에 편재하여 현시된 모든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주시작용이 이루어 지고 있다.

 

만일 높은 수준의 명상자가 평온을 느낀다면, 평온이 주시되고 있으며,

이때는 평온의 느낌을 아는 주시가 있게되는데

그대로 앎상태로 존재해 있으면

평온의 느낌과 주시자 모두가 사라지게 되고

남는 것이 바로 절대일 것이다.

이때 거친 의식으로는 전혀 감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주 미묘한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말로 표현 할 수조차 없는 최종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겪어 보아야만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