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자기 동일시에 관하여

2008. 7. 9. 21:36무한진인/나는 누구인가

 육체의 자기동일시에 대하여 얘기하기 전에,

주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좀 더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사실 명상이나,정신수행하는 전과정이 주시인 것 같기도 하다.

주시라는 말은 선불교에서는 관조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유명한 정신적 스승들이나 고승님들은 문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수행이란 억지로 강행하지 말고, 자연스럽게,있는 그대로 수행하라는 말씀을 기록에서 많이 본다.

이글을 쓰고 있는 이도 처음에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책저책 무차별 지식사냥을 하면서 헤메고 다니던 시절 "아무것도 할 필요없이 가만 있어라"라는 말에는 그저"맥이 딱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가만 있어라"라는 가르침의 의미가 그스승 면전에 있던 제자에게는 엄청난 우레 소리

같은 우주의 북소리로서 제자의 몸과 마음을 단번에 공명시켜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이"있는 그대로 있음"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대개 스승들이 아주 심각한 자세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 방문한 제자에게 지극히 싱거운 태도로"그냥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 하고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툭 던지는 그 상황은 사실 그제자가 이미 열매는 무르익었지만 "수행에만 집착"해서 수행행위 자체가 방해물이 되어 구속되어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수행행위로 부터 자유스러워 지도록 하기위한 지극정성의 자비로운 조치인 것이다.

 

불교 선문답은 거의가 이와같은 분위기의 대담인데,

그 대표적인 예로, 조주스님의 "밥 그릇이나 씻어라" 공안이다.

한수행승이 조주스님의 법도가 높다는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스님을 처음 찾아와서,

"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왔읍니다" 하고 인사하자 마자,

" 아침 밥은 먹었는가?"  "네"

" 그럼 나가서 밥그릇이나 씻어"

 

밥그릇을 씻으라는 순간 그 수행승의 의식은 지금 이순간의 전체 주시자로서 확 공진 상태로 돌변한다. 말하자면 "지금 현재 이순간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보통사람 정신상태로 비유하자면 햇� 쨍쨍한 팔월 한낯에 눈앞에서 햇빛보다 수백배 밝은 번개불이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바람에 현기증으로 정신을 잃는 것같은 상황이 된다.

 

이 밥그릇이나 씻어라고 하는 한마디는  그수행승을 "있는 그대로 있도록" 순간적으로 "원위치"시켜준다.

 

갑자기 군대시절이 생각난다. 논산훈련소에서 후반기교육을 마치고 보충대를 거쳐, 최전방 부대 수색중대에 배속되어 막사에 처음 도착해서, 고참들에게 신고식을 하는데-. 일병고참 한사람이 새로전입온 세명의 신참이병들을 세워놓고 하는짓이 계속 "차렷" "원위치"만을 계속 반복하는데,

"차렷"할때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되는데, 조금 눈동자라도 움직이면

"요새끼,요,동작바라,"하고 뱃대지에 주먹이 날라 오고,"원위치"할때는 "열중셔"때처럼 부동자세 좀 풀어지면, " 야 이쌕끼야,누가 너보고 눈똥아리 움직이라고 그랬어"하고 워카발 쪼인트가 날라와 공포의 신고식을 치른 일이 생각났다. 원위치와 차렷자세를 구분하지 못했는데, 사실은 의도적으로 멍청한 신병들에게 어리둥절하게 하여 겁주기 위한 장난이 었는데--,

그것이 우연의 일치였는지, 아니면 그때의 그 짓굳은 일병고참(당시 중대 이발병이 였음)놈의 새끼가 스승이었는지는 몰라도,

그후에 명상등에 관심이 있어서 선문답 서적등을 뒤적이다, "차렸" "원위치"의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재발견 하게되었다.

 

즉 "밥그릇이나 씻어라"에서 수행승은 "차렷"자세로 굳어져 있는데,

조주선사는 "야 임마, 쉬어,쉬라구, 왜 그렇게 뻣뻣이 굳어 있냐?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으라구, 원위치 해 임마. 푹- 쉬어"

이런식으로 조주선사가 수행승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주시자)를 찾으라는 말씀이다.

해탈이니, 깨닮음이니, 부처니 하는 개념의 그물망속에서 그물과 뒤엉켜서 헐덕대지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 지금 순간(밥그릇이나 씻으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바로 바늘귀 만한하게 뚫린 구멍이 순식간에 변하여 무한한 우주공간의 깊은 심연으로 자신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만일 그수행자가 주시자의 자세로서 완전히 묵르익어서 늦가을 석류처럼 터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화두선을 실지로 몇년동안 직접 부닥쳐 본 본후에야,

화두에 나타나는 표면상의 대화내용 의미와 화두선 수행의 결과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오히려 표면상의 대화내용의 의미는 어느때는 선수행의 진행에 장애마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위의 조주선사 선문답에서 질문한 수행승은 내면에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을까?

당시 실제적인 상황이 어찌되었든 상관하지 말고, 여기서는 "있는 그대로의 " 주시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상황설정으로 활용해보자.

 

그수행자는 조주스님을 면담하기전 많은 경전공부와 해탈을 위한 수행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열망과 희망을 품고서, 그유명한 조주스님을 만나서 무언가 큰것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푼 가슴을 가라 앉이며 대선지식앞에 앉았는데- .

다짜고짜 밥 먹었냐고 물어 보더니, 가서 밥그릇이나 씻으라니-  . 머 이런 늘근이가 있어, 들어오자 마자 처음 본 사람을, 눈도장도 찍을 새도 없이 쫏아내다니- 보통사람은 이러겠지만 서도-

자, 그 수행승은 대선지식을 만나 무언가를 얻을려고 했던 큰기대감을 갖었기 때문에,그 얻을려고 하는 기대감이 방해가 되어서, 자신을 주시하지 못한채 조주스님을 만나자마자 조주스님의 큰가르침을 흘려서 놓쳐 버린 것이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고참 조주선수가 신참 뭐시기스님에게 꼴바로 문앞에다 절묘한 어시스트 드라이브를  패스해 주었는데, 이 멍청한 뭐시기가 정신 바짝차려서(주시상태로) 발만 슬쩍 대면 완전히 꼬-링하는 건데, 그러면 더 이상 고생안 할텐데,

병신 머저리 같은 놈- 아니, 욕 나올 상황이 아니지, 주시 설명하려다 왜 월드컵이 툭 튀어 나왔나?

 

고참선수 조주는 완전히 주시자가 되어있는 상태, 즉 그의 의식은 우주의식으로, 볼, 자기편 동료선수 뿐 아니라, 상태편선수들,운동장,꼴대, 감독,관중,대한민국 등 그의 주변 모두가 일심, 하나로,전체로 바꿔어져 있어,그의 몸은 별도로 없고, 볼과도 하나여서,상대적인 너와 나라는 분리된 의식이 없다. 그러니깐 모든행동이 그주변상황에 조화롭게 펼쳐저서 마치 자동로보트 마냥 자기의 개인의지는 없고 일심에서 저절로,자기도 모르게 펼쳐질 뿐이다.

그러나 뭐시기 선수는 자기육체만을 자신으로 여기므로, 노력은 하나 자연스러운 전체 존재를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주시를 못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조주선수가 자연스럽게 드라이브 해준 볼을 자동 로봇트처럼 볼의 움직임과 조화를 못마추어 기막힌 찬스를 놓쳐 버린 것이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 겠지만, 스포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박찬호,박쎄리,박지은,박정희,김지연, ? 어,왜 박정희가 꼈지?  좌우지간 이들 선수들은 게임에 임할때는 그순간 만큼은 볼과 방망이, 필드와 자신이 일체가 되어 육체의 동일시가 사라진 상태로 임하므로서 가장 �은 콘디션과 결과를 얻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훈련을 통해서 게임에 대한 집중력이 자연스럽게 강화되고,거기서 순간적이나마 개인이라는 자기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삼매상태가 가깝게 되므로서 최대한의 콘디션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찬호는 일상적인 연습과정에서도 참선수행을 직접한다고 들었다.

박통은 자기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을 자기동일화한 분이다. 요즘 나리들 보다 스케일이 크다.

그러나 이광대한 우주전체와 동일시 한 것 만큼이야 이세상 더 바랄것이 무엇이 있으랴

 

자,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은 조용히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주시는 항상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즉, 자기는 지금 콤퓨터 앞에 앉아서 이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알고)하고 있다. 아침에 잠을 깨어나서 부터, 정신이 나면 그때부터 주시는 자동적으로 펼쳐 지는 것이다. 왜냐 자신이 깨어서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깨어있음,의식,주시상태에 대하여는 전혀 신경 안쓰고,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가진 것이니까, 아예 무시해 버린다.

 

내가 먹는다. 나는 무언가를 본다. 슬프다,아프다, 기쁘다, 간지럽다, 나는 세상을 본다, 나는 은하계를 알고 있다. 나는 꿈꾼다

이런 모든 개인의 지각과 생각등에 일어난다는 것을 개인의식내에서 알고 있으며, 이알고 있는 것이 바로 주시가 자연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각,생각들을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생각"인데 이"나"가 위의 여러가지 지각,생각들의 주시자이며, 이 "나"는 제일 먼저 일어 나는 주시자이다.

이 "나"라는 것은 바로"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인데,

"내가 있다"앎이 일어나고 나서 그위에 모든 세상사의 지각과 생각들이 펼쳐 지게 되며,

" 내가 있다"는 영화의 스크린 처럼 산과 바다,불,홍수, 우주공간,지옥,천당,그리고 내생각과 육체등 이세상 지각되고 상상되는 모든 것들이 그""스크린 위에서 움직이고 춤춘다.

 

"내가 있음"은 개인의식인 마음이 아니라 우주의식 그자체(내용그림자가 없는 비어 있는 스크린상태)이지만,

현재 개인에게 있어서는 육체가 자기라는 생각때문에 그우주의식을 알지 못하여 작은 육체의식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 놓고는, 구속된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도를 닦는다, 명상을 한다등, 헤메고 다닌다.

 

이렇게 육체의 자기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기위해 우리는 구도의 길을 나름대로 걷는데, 사실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구도는 행해지고 있으며, 개인 본인이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도는 지금 현재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아는 것이 깨닳음인 것이다.

 

그확신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면 그런 자각이 저절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수행이니,명상이니, 주시,관조등으로 불리우는 행위를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런 개인 의지적인 행동으로 어떤 해탈의 경험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다.

그저 수행의 목적은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할수 있는 것이 최종 목적이며,그후는 가만히 자각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저절로 최종 주시상태는 펼쳐 진다는 얘기다. 아무생각없이 고요히 존재속에 머무를 때, 갑자기 돌발적으로,저절로 �아 오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으로 도달 할수 있는 곳은  순수자아의식,즉 우주의식이 한계이다.그이상은 우주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므로서 자연적으로 오는 것이다.

절대의식은 수행으로서는 직접 도달 할 수가 없다.

 

마치 인공위성 로켓트를 지구 인력권까지 쏘아 올리고,나머지는 인공위성이 지구 인력권 경계선에서 저절로 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끔 방향교정용 야구방망이 만한 로켓이나 조정해 주면 아무 동력없이 지구주위를 수십년간 저절로 돌아간다.

지구인력권 까지 쏘아 올리는 것이 개인으로서 의도적으로 수행을 하는 단계이다.

그다음 부터는 우주의식으로 고요하게 있어야 한다. 그렇게 혼자서 자유롭게 무한한 우주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다가 별들과 별들사이의 인력이 우연하게 겹쳐지는 곳으로 부터 보이지 않는 불랙홀 입구로 유도되어 순식간에 불랙홀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