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0. 22:31ㆍ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질문자 :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그 힘은 실재입니까? 힘이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힘은 지(知)입니다. 지(知)도 결국엔 흡수됩니다. 최종적 실재 안에는 지(知)도 없고 무지(無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제로)에서 시작되는 것이 어떻게 참될 수 있습니까? 허공은 영(0)입니다. 허공에서 큰 태풍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피해를 안겨주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어디로 갑니까? 다시 허공 속으로 들어 갑니다. 허공은 무(無)이지만 그 무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일체가 허공에서 일어나지만 그래도 그것은 무(無)입니다. 그래서 힘과 지(知)도 그릇된 것입니다. '나는 안다'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것이 힘이고 그것이 지(知)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늘 그릇되며, 참되지 않습니다. 허공 또는 공간은 영(無)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체가 거기서 나오는데, 그것이 너무나 강력합니다. 영 안에 있을 때 그대는 꿈을 꿉니다. 그대가 자고 있지 않으면 그 꿈을 꾸지 못합니다. 힘이 곧 영(0)이고, 거기서 부터 일체가 시작됩니다. 이 세계는 영(0)에서부터 창조됩니다. 그럴 때 영(0)의 행위자는 누구입니까? 영(0)의 창조자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꿈 속에서는 누가 창조주입니까? 그대는 자고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꿈이 다가옵니다. 에서 시작됩니다. 깨어나면 그대는 "그것이 꿈일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세계는 모두에게 참되지만, 성자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자 : 그러면 무엇이 실재합니까?
마하리지 : 최종적 실재, 곧 무지와 지(知)가 머무르지 않는 곳입니다. 일어나는 일은 무(無)입니다. 그것은 무(無)에서 시작됩니다. 영(0)에서 시작됩니다.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리는데 그것은 영(0)을 뜻합니다. 그런 다음 일체가 시작됩니다. 최종적 실재는 잊혀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타납니다. 세계는 제가 앞서 말한 실재의 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반사된 것은 참되지 않습니다.
질문자 : 최종적 실재 안에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마하리지 : 예, 어떤 힘도, 어떤 생각도 없지요. 생각이 있는 곳에는 힘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있습니다. 그대의 진아는 참되지만, 그것은 아무 이름도 없습니다. 말은 거기서 돌아 나옵니다. 말은 허공에서 나옵니다. 허공을 넘어서야 합니다. 만일 허공이나 공간이 없다면 그대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지(知)는 허공에서, 영(0)에서 나옵니다. 무(無)에서 일체가 나옵니다. 그래서 무(無)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영(0)은 그 정도로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가 보고 지각하는 모든 것은 이 지(知)에서 나옵니다. 그대가 그것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지입니다. 지(知)가 신입니다. 창조주가 지(知)입니다. 이 둘 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합니다.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일체가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대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을 그 '나'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 궁극적 진리를 파악한 사람의 체험은 어떤 것입니까?
마하리지 : 그는 나 없는 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자아 없는 진아가 있는데, 그것이 그의 체험입니다.
질문자 : 그래서 더 이상 무지가 없을 때, 힘은 어디서 옵니까?
마하리지 : 무지는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이 있는 한 무지가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깨달은 사람을 이야기합니까? 먼저 깨닫고 나서 물으십시오. 그때는 그 질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무지 속에 있습니다. 그대가 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몸이 죽을 때, 깨달은 사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0)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됩니까? 모든 것이 무(無)인데, 나는 지금 누구입니까? 그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참되지 않습니다.
질문자 1 : 1 더하기 1은 2입니다. 논리적입니다. 실재에 대한 이해도 1 더하기 1만큼 논리적이거난 쉽습니까?
마하리지 : 더 쉽지요. 1 더하기 1은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대가 그입니다. 그대가 그인데 누가 누구를 알겠습니까? 이원성이 사라집니다. 어떤 이원성도 없고 오직 그가, 곧 자아 없는 진아가 존재합니다.
질문자 : 저는 이원성이 없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마하리지 : 왜냐하면 이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일성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가 있습니다. 세계 안에는 그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바다의 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백만의 거품이 있고, 그대는 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대의 거품을 터뜨려야 할 뿐 달리 무엇도 아닙니다. 스승은 그대가 이해로써 거품을 터뜨리는 것을 도와 주며, 그게 전부입니다. 그대가 그입니다. 그러니 그대 자신을, 그대의 실체를 아는 것이 더 쉽지 않습니까? 그대가 자신을 잘못 말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그입니다. 누구나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부르고 누구를 부르지 않습니까? 단일성만이 있습니다.
일체가 무(無)인데,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을 체험하지 않겠습니까? 허공이 왜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사물들이 오고 가지만 그것들이 허공에 영향을 줍니까? 허공은 허공으로 남아 있습니다.
허공 같이 되어서 "어떤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 고 말하십시오. 일체가 스크린 위에 다가왔다가 사라집니다. 만일 그것이 참되다면 남아 있겠지요. 좋은 생각들이 그대에게 온다고 해서 그대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나쁜 생각들이 온다고 해서 그대가 나빠지지 않습니다. 생각들은 그냥 지나갑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마음 속에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합니다. 그대가 누구기에 어떤 사람을 돕습니까?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은 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자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돈이 있으면 그대가 "내가 무엇을 했다"고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내가 자비로운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소망일 뿐입니다. 만일 그대가 50만 루피나 백만 루피를 베푼다면, 그대의 자비는 유한합니다. 신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그러니 그대가 왜,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까? 그대가 누구기에 그렇게 합니까? 그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없는데 누가 자비로울 것이며, 누가 나쁘고 누가 좋겠습니까? 그런 모든 것은 그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늘 많은 색깔을 띱니다. 지(知)는 늘 더욱 더 커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지(知)가 가장 큰 무지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란지트 마하리지 대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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