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법사의 조론 공부11] 물불천론(物不遷論)- 7

2024. 4. 5. 22:04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본문]

그러므로 <성구경(成具經)>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상주불변 하다고 헤아리며 집착하는 가운데 처하여 생사의 무상한 가르침을 연설한다'라고 하였고,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모든 법은 흘러가거나 흘러 온 곳이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여러 상대적인 방향을 인도하여 중도로 이끈 것으로서 이 두 말의 귀결점은 하나로 회합한다. 어찌 표현한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겠는가?

[주해]

여기서는 성인의 말씀은 달라도 종지는 하나임을 밝혀 위에서 말한 생사와 열반의 두 법이 모두 성공의 의미임을 풀이 하였다.

<성구경>에서 말하기를, '범부가 영원하다고 망상으로 헤아리는 가운데 처하였기 때문에 보살이 더없는 생사의 무상함을 설명해 그들의 집착을 타파한 것이지, 이것이 의도한 것은 사람들이 생사의 무상한 성공에 나아가 진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마하연론>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고요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고 상주불변하며, 본래 흘러가거나 흘러 옴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의도한 것은 사람들이 제법이 움직이는 데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마하연론>에서 제법의 상주불변을 말한 것과, <성구경>에서 생사가 무상함을 말한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뭇 방향들을 인도하여 중도로 도달시키기 위해 중생의 종류를 따라 그들 상황에 맞게 설명한 담론들이다. 이는 표현한 말은 다르지만 내재한 종지는 하나인 것이다.

어찌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겠는가?

말에 집착하여 시비를 다투는 것이 어찌 미혹함이 아니랴?

다음은 두 말이 하나로 회합한 데 대해서 풀이하였다.

 

[본문]

그러므로 열반의 상주불변을 말한다 해도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무상하게 흘러간다 해도 실제로 천류하는 것은 아니다.

[무위의 열반을 증득하여도 보살의 만행(萬行)을 버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열반은 상주하나 거기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생사의 무상함에 처한다 해도 상주의 열반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생사가 흘러간다 해도 실제론 천류하지 않는다. ]

생사가 흘러간다 해도 천류하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고요하며[만법의 변화를 따른다 해도 하나인 중도는 고요 담연한 것이다], 열반에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히 상주하면서도 항상 생사로 가는 것이다.[번뇌가 사라진 멸진정의 열반에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위의(威儀)를 나타낸다.]

열반에서 고요해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간다 해도 생사에 천류하지 않으며[심의식의 망상이 없이 만행을 나타내기 때문에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천류하지 않는다]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열반에서 고요하기 때문에 고요해도 열반에 머물며 집착하지 않는다.

[무위의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고, 현상의 유위법도 버리지 않는다. 그때문에 열반에서 고요하면서도 거기에 머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두 말이 하나의 중도로 화합한다 한 의미를 풀이 하였다.]

그렇다면 장자가 산을 늪지대에 숨겼던 까닭과,

공자가 흐르는 시냇물에 임했던 까닭은 모두가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찌 현재의 사물을 밀어젖히고 과거로 흘러감을 말했으랴?

그러므로 성인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 일반사람들이 보고 체득한 것과는 동일하지 않는다.

[주해]

여기서는 장자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두 말이 하나로 화합한다'고 한 의미를 증명하였다.

<장자>에서는 말하기를, '배를 산골짜기에 숨기고 그 산을 늪지대에 숨겨놓고 이를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힘쎈 사람이 이를 걸머지고 도망을 했는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천하를 천하에 숨겨 둔다면 도망갈 곳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배를 산골짜기에 숨기고, 그 산을 늪지대에 숨겨 두곤 이를 견고하다 말하지만 힘쎈 사람이 걸머지고 도망을 가면 붙들어두질 못함을 말하였다.

이를 비유해 보자. 지금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깊은 잠이 들어 강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가면서도 실제로는 옮겨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장자가 의도하고 말한 것은 이렇다. 사람들이 외형의 껍데기를 잊고 본질의 도에 계합하지 못하면 산림 속에 은둔하고 천지에 나의 형체를 의탁한다 해도 나의 몸은 조화(造化)가 은밀하게 옮겨간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숨긴 곳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도망할 곳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형체와 도가 하나로 합일한다면 숨길 곳이 없고, 숨김이 없으면 도망함도 없다.

이는 마치 천하를 천하가 있는 그대로 간직해 둔다면 도망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이는 장자가 의도라고 한 말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시냇물가에서 말하였다. '가기를 이같이 하다니, 밤낮으로 끊임없이 흐르는구나.'

이는 간단없이 작용하는 도의 자체가 마치 흐르는 시냇물이 쉬지 않는 것과 같다고 찬탄한 것이다.

이는 공자가 의도하고 한 말이다. 논주는 이 두 문장을 인용하여 물불천을 논증하였다.

그가 의도하고 취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밤 사이에 도망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천류한다 해도 천류하지 않는 것이며,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렀다면 흘러가도 간 것이 아님이다.

그때문에 논문에서 말하기를, ' 이 두 말씀은 흘러가는 것을 붙잡아 두기 어려움을 감탄한 것일 뿐, 현재를 밀어젖히고 흘러가게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천류함을 말한 듯하나 의도한 실제는 천류하지 않는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윗 문장의 말미에서 훈계하여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을 관찰하려면 일상적인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말에 집착하여 말의 의미를 해치지 않아야만 종지를 체득했다 말할 만 하다.'라고 한 것이다.

논주는 천류하는 문장을 인용하여 천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결론을 '현재를 밀어젖히고 흘러가게 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점이 '현재 사물은 스스로 현재에 있지 과거로부터 지금으로 이르러 오지 않았다'라고 한 한 마디의 말에 있다.

이로써 물불천의 표준을 삼고 사람들이 목전의 그 자리에서 <물불천론>의 종지를 통달하여, 끝내 흘러가거나 흘러 오는 모습이 없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를 언어의 밖에서 찾는다면 물불천의 오묘한 종지가 환하리라.

 

                                                                        - 승조 지음, 감산덕청 약주, 송찬우 옮김 <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