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법사의 조론 공부11] 물불천론(物不遷論)- 6

2024. 2. 23. 22:16성인들 가르침/불교 교리 일반

 

[본문]

아 아! 성인 말씀에 "사람 목숨 빨리 지나가는 것이 시냇물 흐르는 것보다 빠르구나 !"고 하였다.

[주해]

여기서는 사람의 목숨이 무상하다는 것을 말했지만, 뜻은 진상(眞常)을 은밀히 드러내는데 있다.

 

[본문]

그래서 성문은 비상(非常,無常)을 깨달아 이로써 도를 이루고, 연각은 연리(緣離, 인연의 화합과 분리)를 깨달아 이로써 진리에 나아갔던 것이다.

[주해]

성문과 연각, 두 성인은 모두 무상(無常)을 들음으로써 과위를 증득하였다.

 

[본문]

(하지만 진실로) 만약 온갖 것이 움직이는데 (제법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변화를 탐구해 도에 오를 수 있겠는가?

[주해]

도는 열반의 과이다. 뜻은 이를테면 만약 만법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면

이승의 성인이 무엇 때문에 무상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성인의 과위를 증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본문]

다시 성인의 말씀을 탐구해 봐도 미묘하고 은밀해서 헤아리기가 어렵다.

[주해]

돌이켜서 다시 성인의 말씀을 규명해봤는데, 비록 무상을 설했지만 뜻은 진상을 은밀하게 드러내는데 있었다. 그래서 은밀하고 미묘해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본문]

그 때문에 생사가 무상하게 흘러 간다고 말씀했으나 꼭 흘러가는 것은 아닌데,

이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망상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상주한다고 말씀해도 꼭 열반에 안주하지는 않는데,

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생사로 흘러간다 한 것을 버리게 한 것이다.

어찌 생사가 흘러간다고 해서 생사를 버렸겠으며,

열반에 안주한다해서 상주함을 말했으랴.

[주해]

여기서는 성인의 말씀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을 풀이하여,

사람들이 말을 떠나서 오묘한 종지를 체득하게 하였다.

'흘러간다(去往)' 말한 것은 범부의 생사법(生死法)이고 ,

'상주한다(住)' 한 것은 열반상주(涅槃常住)의 도과이다.

일반적으로 성인께서는 생사가 천류한다 말씀하시나 생사에 흘러갈만한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원하다고 집착하는 번부들의 망상을 부정하고 막아 주었을 뿐이다.

열반은 상주한다 말씀하셨으나 열반에 상주할 만한 하나의 모습이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사를 싫어하고 근심하는 이승인의 허망한 마음을 타파했을 뿐이다.

실제로 생사와 열반은 둘 다 실체의 모습을 얻을 수 없는데 어찌 버려야 할 생사가 단정적으로 있고, 상주해야 할 열반이 정말로 있다고 말씀하셨으랴?

다음에는 이를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본문]

그러므로 <성구경(成具經)>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상주불변하다고 헤아리며 집착하는 가운데 처하여 생사의 무상한 가르침을 연설한다'라고 하였고,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모든 법은 흘러가거나 흘러 온 곳이 없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모두가 여러 상대적인 방향을 인도하여 중도로 이끈 것으로서 이 두 말의 귀결점은 하나로 회합한다. 어찌 표현한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다 하겠는가?

[주해]

여기서는 성인의 말씀은 달라도 종지는 하나임을 밝혀 위에서 말한 생사와 열반의 두 법이 모두 성고의 의미임을 풀이 하였다.

<성구경>에서 말하기를, '범부가 영원하다고 망상으로 헤아리는 가운데 처하였기 때문에 보살이 덧없는 생사의 무상함을 설명해 그들의 집착을 타파한 것이지,

이것이 의도한 것은 생사의 무상한 성공에 나아가 진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마하연론>에서는 말하기를, '모든 법은 고요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고 상주불변하며,

본래 흘러가거나 흘러 옴이 없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의도한 것은 사람들이 제법이 움직이는 데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한 것이다.

<마하연론>에서 제법의 상주불변을 말한 것과, <성구경>에서 생사가 무상함을 말한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뭇 방향들을 인도하여 중도로 도달시키기 위해 중생의 종류를 따라 그들 상황에 맞게 설명한 담론들이다. 이는 표현한 맗은 다르지만 내재한 종지는 하나인 것이다.

어찌 문장이 다르다 해서 그 이치마저 다르겠는가?

말에 집착하여 시비를 다루는 것이 어찌 미혹함이 아니랴?

다음은 두 말이 하나로 화합한 데 대해서 풀이 하였다.

 

                                                                 - 승조법사 지음, 감산덕청 주해, 송찬우 옮김 <조론> -

 

 

                                                       <2024.2.23. 21: 50분경 서울시내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