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 실제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87)

2024. 2. 12. 21:50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 자아탐구와 가장 혼동되기 쉬운 명상법이 '내가 그다'하는 명상이고,

따라서 마하리쉬는 이러한 혼동에 대해서 빈번히 경계했다.

 

마하리쉬 : 자기 탐구는 '나는 쉬바다' 또는 '내가 그다'하는 명상과는 다른 방법입니다.

저는 오히려 '자기 앎'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세계와 그 주(主)를 알려고 하기 전에 1차적으로 그대 자신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다'나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먕상은 다소간 관념적이지만, 제가 말하는 이 자기 탐구는 하나의 직접적인 방법이며, 다른 명상법보다 실로 우수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기에 대한 탐구에 들어가서 점점 깊히 들어가기 시작하자마자,

진정한 자기(진아)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대를 맞이 하며, 그대부터는 모든 일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진행되며 그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모든 의심과 분별이 저절로 사라지는데,

그것은 마치 잠이 든 사람이 한 동안 모든 근심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실재직견소>

 

경전에서 '그대가 그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데도, '나는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다'를 명상하는 것은 힘이 약하다는 한 표현이라네.

왜냐하면 그대는 영원히 그것이기 때문이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탐구하여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네. <실재사십송 제32송>

 

'나는 육체다'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만,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 하는 명상이, 우리가 그것으로 안주하늗데 도움이 되네. 왜 줄곳 '내가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나는 사람이다'라고 계속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그것이 아닌가?

<실재사십송 제 36송>

 

 

. 한 편잡인은 마하리쉬께 말하기를, 자신은 까마꼬띠 삐따의 슈리 쌍카라차리아가 여기로 가보라고 해서 뿌리 자가나트 근처의 잘레스와르에서 왔노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 여행가이다.

그는 하타 요가와 '나는 브라만이다'의 노선을 따른 얼마간의 명상을 해 왔는데,

(명상을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면 어떤 공백상태가 지배하면서 뇌에서 열이 나고 죽음이 두려워진다고 한다. 그는 마하리쉬로부터 지도 받기를 원했다.

마하리쉬 : 그 공백상태를 보는 것은 누구입니까?

헌신자 : 제가 보는 줄 압니다.

마하리쉬 : 그 공백상태를 바라보는 의식이 진아입니다.

헌신자 : 그 말씀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죽음의 공포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그대는 누구의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누구에게 그 두려움이 옵니까? 자기와 육체의 동일시가 있는 한, 공포가 있겠지요.

헌신자 : 그러나 저는 제 육신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자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헌신자 :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하리쉬 : 그대의 명상법은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헌신자 : '나는 브라만이다(Aham Brahmasmi)'입니다.

마하리쉬 : '나는 브라만이다'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나까? 브라만 자체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참나도 그렇게 말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브라만으로서 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모든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나', 즉<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생각함이 없이 머무르십시오. 생각이 있는 한 공포도 있을 것입니다.

헌신자 : 제가 그것을 계속 생각해 가다 보면 망각현상이 따라 옵니다. 두뇌는 열이 나며, 저는 두려워집니다.

마하리쉬 : 그렇습니다. 마음이 두뇌에 집중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생각이 있는 한 망각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브라만이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망각이 뒤를 따릅니다. 그때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도 일어납니다. 망각과 생각은 '나'라는 생각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을 탐색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허깨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뒤에 남는 것은 진정한 '나'입니다.

'나는 브라만이다'는 그것이 다른 생각들을 물리쳐 주고 그 한 생각만 지속되는 한에서 집중의 한 방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것을 찾아 들어가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고의 진아가 스스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진정한 '나'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나는 브라만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지요.

'나는 사람이다'라고 계속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시비하지 않는다면, 왜 자기가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합니까?

누가 자기를 짐승으로 질못 알기에 '아니오 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브라만 혹은 '나'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비할 자는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나는 브라만이다' 라고 반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서 오즌번 엮음, 대성 옮김 <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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