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존재(의식)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영구적입니다

2023. 11. 2. 20:46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우리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성품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머무르는 것입니다.

첫째, 지성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이해가 없으면 가슴으로 그것의 가치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세간에서는, 여러분이 형상이 없고 결코 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행위하여야 합니다.

 

몸이라는 한계가 없었을 때, 여러분이 어떻게 있었는지 압니까?

모든 영적인 지(知)는 자신이 몸이라는 무지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몸은 아뜨만의 형상이 아닙니다.

자신이 몸이라는 느낌이 자부심을 낳습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말에 의존하고 모든 개념을 놓아버리는 사람은 일순간에 브라흐만을 깨닫습니다.

 

24시간 만트라를 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규칙적으로 앉아서 명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매일 1분씩 보태어 그 시간을 늘여 갈수 있습니다.

습관을 들이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심지어 독(毒)을 소화하는 능력도 계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고집스럽게 계속해 나가면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의식의 능력입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즉 여러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어적 지식도 없을 때는 사원에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다른 많은 일들은 쉽게 일어날 수 있지만, 빠라마뜨만으로서의 우리의 참된 성품을 깨닫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토록 열려 있고 쉬운 것을 놓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몸을 가지고 있고 해야 할 어떤 일들을 수행하는 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의식의 한 덮개일 뿐인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원초적 무지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아는 자'인데,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이 없이는 우리의 존재를 모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바로 의식을 아는 자이고, 우리에게는 어떤 단어도 없습니다.

다양한 세간적 활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진아지에는 그런 활동들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활동에서 벗어나 있고, 우리에게는 어떤 오고 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식을 아는 자는 불변입니다.

 

의식에게 알려지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의 참된 성품일 수 없습니다.

알려지는 것은 변하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상한 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들어서 확신을 계발하는 것은 우리의 지각성이지만,

그것은 시간에 속박되어 있고 무상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친교하는 것은 이스와라와 친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시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스와라,의식, 세계는 모두 시간에 속박되어 있고, 시간적인 것입니다.

이스와라의 형상은 우주적일지 모르나 그의 수명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죽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몸이 끝나는 것일 뿐입니까?

 

분별을 사용해야 합니다.

굉장히 긴 수명도 무한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거나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여러분'은 나타나지도 않고 눈에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이스와라는 세계의 태양, 혹은 세계의 아뜨만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참된 성품은 영구적이고,

그 안에서는 기억하기도 없고 잊어버리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존재는 시간을 넘어서 있고, 시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수백만 명 중에서 극소수만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무지입니다.

의식을 아는 자는 비이원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떤 주시자도 없고, 따라서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여러분이 어디에 있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그 안에서는 생시나 꿈의 어떤 경험도 없는 우리의 참된 성품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본 것은 무엇이든, 모두 시간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저 너머인 것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시작과 끝이 있는 여러분의 의식을 알지 못하면, 진아를 깨닫지 못합니다.

순수함이 있으면 인간이 신을 향합니다.

신이란 가장 순수한 형상을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어떤 존재의 '존재의 느낌'도 그 음식-몸의 성질입니다.

자신은 몸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된 지(知)입니다.

어떤 의식도 없을 때는 무엇에 대한 주시하기도 없고, 따라서 주시자도 없습니다.

금이 없으면 어떤 금장신구도 없듯이,

음식-몸이 없으면 누구의 어떤 존재의 느낌도 없습니다.

 

산스크리트 단어 '비베까(viveka)'는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간의 분별을 의미합니다.

어떤 개념도 없는, 혹은 무엇이나 누구도 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찰해야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마야에) 다시 사로잡히거나 싸여버릴지 모르니 말입니다.

무엇에 대해 여러분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피하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거나 무엇을 성취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은 영구적인 것, 곧 진리일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머무르면,

여러분이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아는 그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가 자신의 바라봄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아는 극소수에게만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형상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적절한 이해를 가지고 세간에서 행위하십시오.

그러면 실로 어떤 불행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산 존재가 맨 처음으로 아는 것이,

존재의 미미한 느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존재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만,

그것을 아는 자는 영구적입니다.

보이거나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국 사라집니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뭔가가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의식이 저물기 때문입니다.

지각성이 침묵하게 되면 일체가 고요해집니다.

여러분은 무시간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잠시 멈추어서 분별해 볼 시간이 없습니다.

 

브라만은 마음, 지성, 이전이고,

심지어 '내가 있다'는 말 이전입니다.

브라마사만다(인도 마하라슈트라 지역 민감신앙에서, 욕심많은 브라민이 죽어서 된다는 귀신의 한 종류) 라는 아주 골치 아픈 귀신이 있는데, 그것은 사드구루만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 귀신은 참된 제자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이스와라라는 도도함을 가지고 머물러 있습니다.

일단 그와 친분을 갖게 되면 여러분 자신이 그를 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물질적 지식이지만, 여러분 자신은 그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식과 현현된 것(현상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식을 넘어서 있고 존재를 넘어서 있는 것은 시간도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의 존재는 시간으로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영구적인 진아는 시간이 가도 변치 않습니다.

그것은 형상과 색상이 없고 무시간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작거나 크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 진리를 아는 자는 모든 위대함과 근기성을 놓아 버리고 작은 것 중 가장 작은 것이 됩니다.

자신을 이원성 속의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스승에 대해 어떤 의심을 가진 사람은 어디를 가도 결코 고요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