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8. 22:51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25세쯤 되어 보이는 삭발한 미국 청년 한 명이 마하리지를 찾았다.
키가 6피트쯤 더 되어 보였는데 키에 걸맞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고,
끌로 깎은 듯한 기늘고 긴 얼굴에 인도의 많은 종교들 중 한 곳에서 입는
길다란 황색 가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방랑하는 승려라고 소개하면서 지난 일이년 동안 북인도의 대부분을 돌아 다녔고,
그 전에는 삼년 정도의 행자 과정을 마쳤노라고 했다.
마하리지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느냐고 묻자 웃으며 말했다.
미국 청년 : " 처음에는 이렇게 방황하는 것으로 과연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찾고자 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이 엠 뎃(I am that)> 이라는 책을 접했습니다.
책을 읽고나서 마하리지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는 이제 마침내 " 올 것이 왔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눈을 보고는 시선을 사진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찾아 뵙고 선생님의 발치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마하리지 :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찾고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
신을 찾고 있는 것인가? 자네가 정말 찾고자 하는 게 뭔가?
미국 청년 : 인생이 제가 줄 수 있다는 것은 모두 덧없다는 것을 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저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깊히 느꼈습니다.
그러니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진정으로 실재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마하리지 : (미소를 머금고 끄덕이며) 자네가 "실재에 도달하고 싶다"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를 알 수 만 있다면 좋을 텐데 - - - -.
자네가 말하는 도달하고자 하는 "나"란 누구인가? 누가 실재에 도달하기를 원해?
몸 - 마음의 복합체인 자네의 몸뚱이인가?
그 몸뚱이가 실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
또 어떤 방법으로? 아니면 로껫트로 ?
그것도 아니라면 정신적인 뜀뛰기로 ?
자네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실재"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청년 :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군요. 저의 시도가 정말 우습게 보이는 일이든가
혹은 제가 아주 희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마하리지 : 우습거나 절망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듣는 그것은 무엇이지?
미국 청년 : 접니다. 여기 앉아 있는 접니다. 제가 듣고 있고 또 선생님께 말을 합니다.
마하리지 : 각각의 감각들은 프라나(prana) 즉 생명력의 도움으로 현실의 일을 하고 있지.
그러나, 그 무언가 없으면 감각으로도 사물을 인식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의식있는 존재에게 의식을 가능케 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 청년 : 예, 제가 의식하지 못한다면 감각들은 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하리지 :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몸이 있는 한 자네라는 것은 바로 그 의식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게. 그리고 몸이 없어지면 생명력을 따라 그 의지도 함께 소멸하는 거야.
그러면 진정한 자네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몸과 정신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야.
그것이 진정 자네이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존재"하는 실체이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이야.
그러니 도달하고자 하는 자의 질문이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몸과 마음 이전인데.
태어나기 전의 자네는 무엇이었나?
그 상태에서 어떤 요구나 욕구가 있었을까?
실재에 대한 것이든 자유나 해탈에 관한 것이든 간에 그런 바램이 있었을까?
자네의 그 이전은 일체요, 절대적 현존이요, 상대적 부재의 상태야.
그것이 자네가 바라는 진실한 모습이요 본성이지.
이것의 나툼이 의식이고,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고, 존재한다는 것이지.
그러나 태양의 반영이 태양이 아니듯, 그것이 절대적 현존일 수는 없는 거야.
절대적 현존에서 투사된 의식의 현존을 자네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몸이 죽을 때 의식은 몸을 빠져 나오고, 그 때는 의식의 현존이 더 이상 아니지.
상대적 현존이 없기 때문이야.
그때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깨어있음의 상태가 되는 거야.
상대적인 것의 부재는 존재한다고 하는 의식조차 없는 절대적 현존을 뜻하는 거지.
찾고자 애쓰는 사람에게서 나왔던 해탈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찾는 자 자체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점점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이 갈망을 놓지 못하면 두 가지 장애가 있어.
하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고 또 그것이 연속되는 존재라고 그릇되기 생각하는 가정이야. 그러나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어.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지.
따라서 현상으로 나타난 대상에 대해 자유를 운운하거나 해탈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야.
둘째는 이러한 갈망이 투영된 마음의 수준에서 실재를 찾으려 한다는 거야.
이것은 알음알이로 미지의 세계, 알 수 없는 세계를 붙들려고 하는 것과 같아.
미국청년 : 그러면 어떠한 수행으로 이룰 수 있을까요?
마하리지 : 이봐,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허상을 가정하는 거야.
누가 수행을 하나? 누가 있어서? 또 무슨 목적으로 수행을 한다는 거야?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볼 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나?
자네가 지네라고 고집하는 것이 빗나가 있는거야.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자네는 실재야.
개인성(entity)이라는 것이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란 걸 이해하고 나면
혹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전체적인 재합일의 요가 뿐이야.
그렇게 되면 뭔가 할 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
걸림없는 무위의 입장에서 행할 뿐이지,
아무런 직위도 없는 순수함으로 그냥 "살아가는"거야.
상대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원래 꿈나라 속의 꼭두각시(환상)일 뿐이야.
각자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각자의 몫이야.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깨어남이지.
주의를 기울여 듣고난 그 미국 청년은 마하리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청년 : 선생님, 당신의 말씀은 제 마음의 모든 찌꺼기들을 모두 쓸어 버렸습니다.
이제 제가 실재임을 압니다. 제가 실재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깊히 머리를 숙여 절을 하였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담배가계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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