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나는 누구인가? (1)

2023. 7. 3. 22:44성인들 가르침/종범스님법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예로부터 큰스님들이 '나'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ㅇㅇㅇ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명칭의 '나(我)'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름 명(名)'자를 보면 저녁 석(夕)자에 입 구(口)자 이거든요.

저녁은 안보이는 시간대이니 사람이 와도 얼굴이 안보이니 누군지 모르잖습니까?

그럴 때 이름을 대면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평생 이름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또는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수도검침 나왔습니다,"

"택배입니다." "등기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그것은 역활의 '나(我)'입니다.

나는 등기배달하는 사람이다, 수도 검침하는 사람이다, 택배 가지고 온 사람이다,

이런 뜻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앞집입니다" , "누구의 아버지입니다" "누구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는 '나'입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성립되지 않고,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의 누구라고 인식되는 '나'입니다.

옛날 큰 스님들께서 '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와 같은 '나'가 아닙니다.

 

"네가 나를 보느냐?'

"네, 봅니다."

"무엇이 보느냐?"

"눈이 봅니다."

"그러면 금방 죽은 사람의 눈도 나를 보겠느냐?"

"보지 못합니다. "

"눈은 똑같은데 왜 못보느냐?"

"그러면 무엇이 봅니까?"

"보는 그 놈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라."

 

이것이 '나'에 대한 법문입니다.

통도사 경봉(鏡峰,1892 ~ 1982) 큰스님께서 하루는 법상에서

"내가 몇칠 전 부산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운자수에게 법문을 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얼마 전까지는 기사를 운전수라 했습니다.

 

"이보시오, 운전수 양반."

"네."

"내가 할말이 있소."

"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 자동차는 운전수가 운전을 안하면 못 가지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운전수 양반의 운전수는 누구요?"

 

이것이 '나'에 대한 큰스님의 법문입니다.

자동차는 운전수가 운전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운전수 양반의 운전수는 누구인가?' 그것이 법문입니다.

운전수 양반이 어떤 대답을 해겠습니까?

아마 대답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남의 집에 가서 하루 저녁을 자고가도 그 이튿날 갈 때

주인을 찾아보지 않으면 무례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살면서

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보지 않고 모르고 죽는다. 그렇게 무례할 수가 있나 ! "

 

이런 것이 '나'에 대한 법문입니다.

어렵지요? 참 심오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에 대해서 몊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생멸(生滅)의 나'입니다.

나는 태어나고 죽는 존재입니다.

생일날 태어나서 제사날 죽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일날은 있는데 아직 제삿날은 없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생일날보다 제사날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몇 대 조 할아버지 생신이 언제인지는 죽보를 보아야 알지 그냥은 모릅니다.

그것은 '생미백년(生未百年)이요 사후천년(死後千年)이라',

살아서는 백년이 안되지만, 죽어서는 천년을 간다는 인생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어떻게 죽느냐는 것이 광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삿날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은 없어요.

이것이 생멸입니다. 생멸은 무상(無常)합니다.

생멸은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우리는 생로병사하는 '나'로 살아가는 생멸의 존재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一切諸世間 일체제세간

生者皆歸死 생자개귀사

 

일체의 모든 세간이

난 것은 모두 죽음으로 돌아간다.

 

夫盛必有衰 부성필유쇠

合會有別離 합회유별리

 

왕성한 것은 반드시 쇠퇴함이 있고

만나면 헤어짐이 있다.

 

왕성한 것은 다 쇠퇴해 버립니다.

만난이는 헤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나서 잘 지내는 사람은 곧 헤어질 사람입니다.

또 지금 왕성한 것은 나중에 쇠퇴해버립니다. 이것이 생멸법입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소멸하니 이 수명 또한 그러합니다.

이것이 '생멸(生滅)의 나' 입니다.

 

둘째, '오온(五蘊)의 나'입니다.

오온은 공상(空相)이고, 공상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인데,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입니다.

그리고 식은 팔식(8識)으로 심왕(心王)이고,

수,상,행은 심왕을 늘 따라다니는 심소(心所)입니다.

 

<반야심경>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보고(照見) 일체고액(一切苦厄)을 건너느니라."

는 구절이 나옵니다.

반야에는 문자반야(文字般若)가 있고, 관조반야(觀照般若)가 있고,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있습니다.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이 문자이고, 마음으로 살펴보는 것이 관조입니다.

실상은 실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오온은 색,수,상,행,식이고, 비추어 본다는 조견(照見)은 '꿰뚫어 본다'라는 뜻입니다.

꿰뚫어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를 들면 얼음을 어름으로만 보지 않고 물로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태어남만 보지 않고 죽는 것도 보는 것이고,

만남을 볼 때 만나는 것만 보지 않고 헤어지는 것도 보는 것이며,

생일날만 보지 않고 제삿날까지도 보는 이러한 것이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오온은 일체 모든 것인데 이 오온을 꿰뚫어 보면 다 공(空)하다고 합니다.

중생이 왜 고통을 느끼는가?

오온이 공함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고통이 오는 것이니,

오온이 공함을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일체의 고통 액난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의미가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사리자여,

이 제법의 공상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不生不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不垢不淨)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不增不減)"

 

제법인 오온법이 공한 내용을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공상(空相)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내용이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생불멸이 아니라 유생유멸(有生有滅)입니다.

생일날이 있으면 태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제삿날이 있으면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유생유멸인데,

반야에 있어서 실상반야를 실행하게 되면 유생유멸에서 불샐불멸을 꿰뚫어 봅니다.

이것이 조견(照見)입니다.

 

또 우리가 볼 때는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상은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늘어나는 것도 있고 줄어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반야를 보게 되면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두 번째 답입니다.

 

                                                                     - 종범스님 설법집 < 한 생각 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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