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3. 22:39ㆍ성인들 가르침/종범스님법문
불교에서는 무엇을 알아낸다든지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을 마음 공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마음 공부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은 닦는다고 표현합니다.
불교의 마음공부는 정심(淨心) 공부입니다.
'깨끗할 淨', '마음 心',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공부입니다.
그리고 '심 息', '마음 心', 식심(息心) 공부입니다.
마음을 푹 쉬면 중생의 업이 녹습니다.
또 마음이 깨끗해지면 중생의 업이 녹습니다.
그것이 마음 공부입니다.
그래서 늘 자정기심(自淨其심),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히라고 했습니다.
악을 짓지 않고 선을 짓는 것만으로는 중생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스스로 맑힐 때 윤회에서 벗어나고, 생사고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중생의 마음을 맑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보통 '참선하면 된다 ', '기도하면 된다', '좋은 일하면 된다' 고 합니다.
다 마음을 맑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應如是生淸淨心 응여시생청정심
不應住色生心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심을 낼지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청정심을 내는 그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청정심을 내는 것은 어떤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않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심공부의 기본입니다.
마음이 혼탁해진다는 것은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면 혼탁하지 않습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애증심(愛憎心)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이 청정심입니다.
어디에 애증을 일으키는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눈으로 볼 대 좋다고 집착한다든지 나브다고 싫어한다면 애증입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덯게 그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까?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 14에 보면,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 응당 머무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 고 합니다.
또 '약심유주 즉위비주(若心有住 即爲非住, 만약 마음이 머무름이 있으면 곧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색, 성, 향, 미, 촉, 법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집착하면 자기 보리심, 자기 반야심, 자기 청정심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무르는 데가 있으면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마음이 자꾸 밖으로 향해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다 보면 자기 마음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비유로 말하면 자기 집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이고, 주인이 머슴살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색, 성,향, 미,촉, 법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조용하게 갖고 청정하게 가지려면 보지도 말고, 냄새 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접촉하지도 말고, 이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수 있을까요?
물론 보지 않고 듣지도 않으면 될 것도 같습니다.
혹 '내가 그 꼴을 보지 말아야지'라고 하는데 그러면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면 나무나 돌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듣지 말고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보면서 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보면서 보지 않고, 들으면서 듣지 않고, 냄새를 맡으면서 냄새를 맡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 점에 대해 <돈오입도요문론> 에서 당나라 혜해(慧海)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 : 어떤 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답 : 남자와 여인과 일체의 색상을 보더라도
그것에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아서
보지 않는 것과 같으면
곧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묘법입니다.
눈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보되 마음으로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아서 보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면 그것이 보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무앗인가를 보았다는 것은 본 것입니다.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 것이 아닙니다. 보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좋다는 집착, 나쁘다는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보더라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더라도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는 것이 허뭃이 아니라 좋다는 집착과 나쁘다는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 허물입니다.
그래서 보더라도 애증심을 일으키지 않아서 보지 않는 것과 같으면,
이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보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니라,
보더라도 애증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그것이 보지 않는 것입니다.
듣는 것도 똑같습니다.
듣더라도 좋다는 집착과 나쁘다는 집착을 일으키지 않아서 듣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면
이것이 듣지 않는 것입니다.
냄새 맡는 것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마음을 낸다는 것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현발하는 것, 즉 드러내는 것을 생(生)이라는 글자로 쓴 것입니다.
없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청정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없이 그냥 본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이것을 중국의 신회(神會)선사는 '육진삼매(六塵三昧)'로 설명하셨습니다.
육진인 색(色), 성(聲), 향(香),미(味), 촉(觸), 법(法)을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육근이 상대하되,
좋다는 집착과 나쁘다는 집착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을 육진삼매라고 합니다.
눈으로 색을 보고 일체 색을 분별하되
따라서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색에서 자재를 얻고 색에서 해탈을 얻는다.
색진삼매가 구족하다. -->(다음 회에 계속됨)
- 종범스님 법문집 <한생각 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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