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나는 누구인가? (3)

2023. 9. 20. 22:00성인들 가르침/종범스님법문

 

둘째는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이고 깨끗한 법입니다.

괴멸하지 않는 상주법(常注法)입니다.

이것이 불성인데, 이 불성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성을 모르고 '나는 생명이다', '나는 오온이다'라고만 한다면,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 죽는 생로병사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 깊게 알면 불생불멸을 살 수 있고, 상락아정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법락(法樂)을 느낀다'라고 말합니다.

법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세락(世樂)은 고(苦)와 낙(樂)이 동시에 따라 다니기 때문에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고통이 오면 또 즐거움이 오고, 즐거움이 오면 고통이 오는 것이 윤회인 것입니다.

반면 상락(常樂)의 즐거움은 불생불멸의 법락입니다.

상락아정의 즐거움을 믿고 닦는 것이 불자입니다.

 

그러면 불성이란 무엇인가?

천수경에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성게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불성과 법성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또 진성(眞性)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법성계>에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라고 했어요.

이러한 불성, 법성, 진성이라는 성품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요?

 

'만법(萬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법성(法性)이라고 합니다.

반면 불성(佛性)이라고 하면 '제불만덕(諸佛萬德)의 근원'입니다.

부처님이 그냥 부처님이 아닙니다.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중생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온갖 지혜와 자비와 덕행을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법의 근원이라고 표현할 때는 법성이라고 하고,

부처님 만덕의 근원이라고 할 때는 불성이라고 해요.

 

그리고 진성(眞性)은 참성품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법성과 같습니다.

그런데 선(善)과 불선(不善)의 근본이라고 할 때는 여래장(如來藏), 장식(藏識)으로도 이해합니다.

중생이 선(善)도 짓고 악(惡)도 짓습니다.

진성은 자성을 지키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인연따라 나타납니다.

진성은 참성품인데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연따라 일어나는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수행은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좋은 인연을 자꾸 만들어 가면 제불만덕이 갖춰집니다.

또한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땅, 심지도 보살만행의 근원입니다.

마음 성품을 부르는 용어가 이렇게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도데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

이것이 전부 손가락인 것입니다.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라는 것인데,

중생은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능가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如愚見指月 (여우견지월)

觀指不觀月 (관지불관월)

計着名字者(계착명자자)

不見我眞實(불견아진실)

 

어리석은 이가 손가락으로 달 가리킴을 보되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않는 것처럼

이름에 생각으로 집착하는 이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락아정이다', '불성이 있다' 이런 말은 손가락입니다.

손가락만 보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불성을 찾기 위해서 자꾸 공덕을 닦아야 합니다.

 

또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인연에 따라서 못 보는 것이지, 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은 '나'라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고 경책을 해놓았습니다.

'상락아정'의 나를 믿고, '상락아정'의 나를 이루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자꾸 닦아가는 것이

신심(信心)에 의한 수행(修行)이고 신심에 의한 정진(精進)인 것입니다.

 

                                                                               -종범스님 법문집 <한생각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