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23. 23:00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우필차송 : 중도(中道)
1. 진과 속의 불이(不二) -1
[본문]
무릇 선정(定)과 산란함(亂)이 나뉘어도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의 근원은 둘이 아니고,
어리석음(愚)과 지혜(慧)가 길이 어긋나도 밝음(明)과 어둠(暗)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
[해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대상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산란함이다.
산란함을 가라앉히는 사마타 수행이 산란함을 그치는 지(止)이며 선정(定)이다.
그렇게 선정과 산란함은 서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산란함에서의 움직임도 선정에서의 고요함에 기반하여 가능한 것이기에 움직임과 고요함의 근원은 둘이 아니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하게 되도록 사마타를 수행하지만,움직임과 고요함이 근원에 있어서는 별개의 둘이 아니라는 것이 우필차, 즉 중도가 강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파사나는 밝음을 얻으려는 관(觀)이고 지혜(慧)이며,
그와 반대되는 것은 무명의 어둠이고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음이다.
그렇게 어리석음과 지혜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둠은 밝음으로부터 나오기에 어둠과 밝음의 근원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필자는 어둠과 밝음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행정은 이상 네 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 네 구는 앞의 두 편에 관한 글이다. 사마타에서는 선정과 산란함이 서로 치우치므로 갈래로 나뉨이 분명하고, 위파사나에서는 지혜와 어리석음이 서로를 없애니 길이 각각임이 분명하다.
지금 말하는 우필차는 앞의 둘을 융합하고 통합한다.
고요함과 움직임은 그 기원을 달리하지 않고, 밝음과 어둠은 그 근본을 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 구 중 앞의 두 구는 이전에 논한 사마타에 관한 거이고, 뒤의 두 구는 그 다음에 논한 위파사나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사마타에서는 움직임과 고요함을 구분하고 움직임에서 고요함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여기 중도에서는 다시 그 둘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비파사나에서는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고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여기 중도에서는 다시 그 둘의 근원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논한다고 설명한다.
[본문]
미혹한 무리는 어둠을 좇아 밝음을 등지고 고요함을 버리고서 움직임을 구한다.
깨우친 무리는 움직임을 등져 고요함을 좇고 어둠을 버리고서 밝음을 구한다.
[해설]
움직임과 고요함, 동과 정의 근원이 둘이 아니고,어둠과 밝음, 암과 명의 기원이 다르지 않다고 해도,
현상적으로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하나가 아니고 어둠과 밝음이 서로 다르다.
미혹한 자는 움직임에만 머물러 고요함을 모르고 어둠에 갇혀 밝음을 모르지만,
깨우친 자는 움직임의 근원인 고요함을 알고 어둠의 바탕인 밝음을 안다.
미혹한 자와 깨우친 자는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
행정은 동과 정, 암과 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혹한 무리는 또한 범부를 가르킨다. 어둠을 좇음은 번뇌를 따름이고, 밝음을 등짐은 보리를 어김이며,
고요함을 버림은 열반을 버림이고, 움직임을 구함은 생사를 사랑함이다.
이때문에 3계(界)에 길이 잠들어 그 근원에 미혹하다.
어둠은 번뇌이고 밝음은 보리이며, 움직임은 생사이고 고요함은 열반에 해당한다.
미혹한 자는 결국 보리 아닌 번뇌를 따르고, 열반 아닌 생사를 구한다는 말이다.
행정은 어둠과 움직임, 밝음과 고요함을 각각 고,집 그리고 멸,도와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제와 집제의 어둠과 움직임을 깨우쳐서 도데와 멸제의 고요함과 밝음을 증득한다. <원각경>에서
'제보살은 고요한 지혜로 인해 지극히 고요한 성품을 증득하여 번뇌를 끊고 생사를 영원히 벗어난다'고 하였다.
[본문]
밝음이 생기면 어리석음을 바꾸어 지혜를 이루고, 고요함이 서면 산란함을 멈춰 선정을 이룬다.
선정이 서는 것은 움직임을 등짐에서 비롯되고, 지혜가 생기는 것은 어둠을 버림으로 인한다.
[해설]
밝게 하여 어리석음이 아닌 지혜를 이루는 것이 비파사나이고,
고요하게 하여 산란함이 아닌 선정을 이룸이 사마타이다.
그렇게 하여 사마타와 비파사나, 선정과 지혜로써 각각 움직임과 어둠, 산란함과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다.
행정은 "식(識)의 번잡한 움직임을 자각하면, 고요한 지혜가 발생한다. 선정과 지혜의 공덕이 이루어지면, 어리석음과 산란함은 절로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식(識)의 움직임을 알면 그렇게 아는 거싱 곧 고요함이며, 그로써 지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정과 지혜가 이루어지면, 산란함과 어리석음이 물러나게[ 된다.
[본문]
어둠과 움직임은 번뇌의 틀에 매여있고, 고요함과 밝음은 사물 바깥으로 나아간다.
사물이 어리석게 하지 못하는 공덕은 지혜에서 오고,
번뇌가 산란하게 하지 못하는 공덕은 선정에서 온다.
[해설]
미혹한 자는 어둠과 움직임에 머무는데 이는 번뇌에 매여있기 때문이며,
깨우친 자는 고요함과 밝음을 갖추는데 이는 환상적 사물세계의 상(相)에 매여있지 않고 상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가 사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비파사나의 지혜 덕분이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사마타의 선정 덕분이다. 행정은 선정과 지혜의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선정과 지혜를 옳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어리석음과 산란함은 바꾸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승조는 "티끌에 물들지 않는 것은 반야의 힘이고, 능히 증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구화(방편)의 공덕이다.'라고 하였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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