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 현각 선사의 지관(止觀) 법문(30)

2022. 6. 16. 22:0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1. 진과 속의 불이(不二) -2

 

[본문]

선정과 지혜는 다시 고요함과 밝음에 힘입고, 

어리석음과 산란함은 어둠과 움직임에 매여있다. 

[해설]

깨우친 자가 얻게 되는 선정과 지혜는 고요함과 밝음에 근거한 것이고,

미혹한 자가 빠져드는 산란함과 어리석음은 움직임과 어둠 떼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것을 정리하여 말한 것이다. 

이로써 깨우친 자와 미혹한 자의 두 층위가 서로 대립관계에 있음을 밝힌다. 

 

[본문]

움직이되 능히 고요할 수 있으면 산란함에 즉해서도 선정을 이루고,

어두우면서도 능히 밝을 수 있으면 어리석음에 즉해서도 지혜롭다. 

[해설]

앞 문장에서 산란함과 선정, 어리석음과 지혜를 대립으로 놓았다면, 

여기에서는 진정한 고요함은 움직임을 배재하지 않으므로 산란함 속에서도 선정을 유지하고,

진정한 밝음은 어둠을 배제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음에 처해서도 지혜를 간직한다고 말한다. 

마음 본래의 고요함과 밝음, 적적과 성성은 일체의 현상적 변화를 모두 포용하고 수용한다는 말이다. 

결국 앞의 문장은 일상의 논리에 따라 동과 정, 암과 명을 서로 분별하여 말한 것인데 반해, 

여기 이 문장은 동-정의 근원이 하나이고 암-명의 근원이 하나라는 근원적 관점 내지 포섭의 관점에서 

정이 동을 수용하고 명이 암을 수용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예를 들어 물과 파도에 대해 분별의 관점에서 보면 동파(東派)와 서파(西派)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포섭의 관점에서 보면 동파와 서파는 둘 다 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같다. 

중생의 본성인 불성과 중생의 드러남인 차별적 모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천겁을 두고 윤회하는 어리석은 중생은 현상적으로 보면 깨달은 부처와 다르지만,

심층마음의 본래 자리에서 보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어리석은 중생과 본래 고요한 부처가 둘이 아닌 것이다. 

행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앞에서는 포섭의 수(收)를 생략하고 분별의 간(揀)을 논하므로 어둠과 움직임을 그르다(非)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분별의 간(揀)을 생략하고 포섭의 수(收)를 논하므로 산람함과 어리석음을 모두 옳다고 하였다. 

중도의 묘한 도리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 두 문(門)을 갖출 수 있겠는가? 

여기서 포섭(收)은 근본이 말단을 거두어 수용함을 말하고 분별(揀)은 근본과 말단을 가려내어 분별함을 말한다. 

현상 내지 일상의 논리에 따라 분별하여 말하자면 고요함과 밝음은 움직임과 어둠에 대비되지만, 

근원적 차원에서 보자면 움직임이 고요함으로부터 일어나고 어둠이 밝음으로부터 나오므로 고요함과 밝음이 움직임과 어둠을 포함하고, 결국 선정과 지혜가 산란함과 어리석음을 거두어 포괄한다는 말이다.

 

[본문]

이와 같은즉 어둠과 움직임의 근본이 차이가 없어 고요함과 밝음이 이로부터 도(道)와 합하고, 어리석음과 산란함의 근원이 다르지 않아 선정과 지혜가 여기에서 종(宗)을 같이 한다. 

[해설]

여기에서 어둠과 움질임의 근본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어둠이 그 근본인 밝음과 차이가 없고, 움짃임이 그 근본인 고요함과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즉 어두운 움직임(暗動)과 고요한 밝음(靜明)이 근본에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현상은 도와 합치(合道)하여, 이로써 진속불이(眞俗不二)가 성립한다.

이것이 <중도1>이다. 

그다음 어리석음과 산란함의 근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리석음이나 산란함이 모두 근본무명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근원이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음과 산란함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그 산란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선정과 어리석음을 벗어나고자 하는 지혜 또한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선정과 지혜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의 종지인 동종(同宗)이라고 말한다. 

즉 앞 장에서 각각 논한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함께 동종으로서 중도를 이루니, 

이것이 <중도 2>이다. 

우필차송에서 지금까지 어둠과 움직임이 고요함과 밝음에 근거하고 그 안에 포섭된다는 <중도 1>의 의미를 논하였다면, 이하에서는 그러한 중도에 기반하되 동, 정을 포괄하는 선정을 닦는 사마타와 암, 명을 포괄하는 지혜을 닦는 비파사나가 서로 중도로서 합치한다는 <중도 2>를 밝힌다. 

행정은 위의 문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둠과 움직임이 고요함과 밝음에 사무치고 고요함과 밝음이 어둠과 움직임을 갖추고 있어,

우필차(중도)의 도에 합치하고 무연(無緣)의 종(宗)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현수법장은 '동정이 서로 사무치고 진속이 함께 융합한다'고 하였다. 

어두운 움직임이 고요한 밝음과 분리되지 않고 고요한 밝음이 어두운 움직임을 포섭한다는 <중도 1>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자경 지음 < 선종영가집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