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18

2022. 5. 13. 22:18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묻는다.

"세인(世人)이 수학(修學)하여 득도(得道)할 수 있습니까?"

답한다. 

"(世人은) 수학 실행(實行)하여 성취할 수 없다. 세인은 모두 처음에는 (修學의) 마음을 이어가나 오랜 후에는 오만해지는 까닭이다. 

실행이라 하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되, 득도(得道)하는 길이다. 또 이르길, '병법에서는 적(敵)을 흉내내지 말라'하였고,

'馬가 형편없으면 걷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본문]

묻는다. 

"왜 명상(名想)의 법(法)이 없습니까?"

답한다.

"마음 속으로 구하는 바는 인아(人我, 我相 또는 너와 내가 있다는 見)가 없음을 증득하는 것인데, 

설한다면 명언(名言)을 빌려야 하고, 그렇게 하면 그것은 가상견(假相見이다. 듣고 지각(知覺)함에 어떻게 명상(名想)이 있겠는가."

[해설]

명(名)은 곧 상(想)을 수반하고, 상(想)이 있으면 곧 명(名)을 수반한다. 그래서 함께 명상법(名想法)이라 하였다. 이 명상(名想)은 언어문자에 의지한 것으로 가상(假相)의 것이다. 

그러나 듣고 지각(知覺)하는 등의 사(事:현실)는 본래 명상이 아니고, 명상으로 드러낼 수도 없다. 

그래서 명상의 법을 버려야 한다. 

 

[본문]

묻는다.

"어떠한 행을 하여야 무색계(無色界)에 생할 수 있습니까?"

답한다.'

" 이 사람들은 방법을 모르고, 모두 망견(妄見)을 지식(止息)하여 마음이 비록 고요함에 이르렀으나 오랜 후에는 다시 망견(妄見)이 생긴다.경에서 말하길, 당래(當來)의 비구는 개가 뼈다귀를 쫓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뼈다귀를 던져 주면 그 뼈다귀가 사람에게서 온 줄 알고, 개는 뼈다귀를 물지 그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바로 그와 같아서 (개가) 사람이 던져준 뼈다귀를 물면 곧 저절로 잠잠해진다. 수도인(修道人)도 심량(心量: 일체법이란 自心이 나타난 바이고, 그래서 無生임)을 깨달아 오래 되면 다시 이와 같이 된다. (망견이 저절로 멸진됨) "  

[해설]

사람들이 방법을 모른다 함은, 앞의 답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망견(妄見)이 본래 불생(不生)임을 깨달아 알고 수행해야 멸진(滅盡)되는 것인데, 망견이 생겨서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멈추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망견이 있다 하고 닦는 것은 어느 정도 망견이 쉬어 고요함에 이르기는 하나 그 뿌리가 아직 잠재되어 있어서 결국 언젠가는 망견이 다시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망념이 본래 生함이 없음을 요지(了知)하여 이 무명력(無明力)이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되어 영원한 해탈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해탈은 선정의 행만 가지고는 안된다. 지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불교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길이다. 

무색계(無色界)는 선정력(禪定力)으로 이르며 유지되는 차원이다. 

그러나 그 선정력이 약해지면 언젠가는 다시 밑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선정의 힘을 키워 무색정(無色定)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여래의 법은 무명(無明)을 지혜의 빛으로 사라지게 하여 영원히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어 잠잠하게 하듯이, 

일체법은 자심(自心)이 나타난 바이고, 마음일 뿐이어서 무생(無生)임을 알게 하는 심량(心量)의 가르침으로 이끄니 망견이 저절로 멸해진다. 

여기에서 '깨달아 오래가면'이라 하였다. 

심량의 가르침을 요지하였다 하더라도 온전히 사(事)에서 구현되는 데는 시간을 요한다. 

남은 습기(習氣)의 여세(餘勢)가 있기 때문이다. 

요지함에도 돈(頓: 단박에 됨)과 점(漸: 점차로 됨)이 있고, 사(事)에서도 마찬가지이나 등각(等覺)보살의 최후 일념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은 습기(習氣)의 여세(餘勢)가 있다는 점에서 점(漸)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점(漸)에서도 지혜는 이미 돈법(頓法)이다. 

 

[본문]

묻는다.

"부처께서 서원하시길, 중생들 모두 다 제도한 후에야 성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이 아직 제도되지 않았는데 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셨습니다."

답한다. 

"부처님은 스스로 아신다. 비유컨대 어떤 객(客)이 실내에 앉아 있는데 주인이 등불을 켜는 것은 그 뜻이 객을 비추는데 있으나 불을 붙였을 때 주인을 먼저 비추는 것과 같다. 보살의 뜻이 중생을 제도하는데 있으나 공덕이 구족되어 먼저 성불한 것이다. "

 

[본문]

묻는다. 

"중생 본래의 법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한다. 

" 무불(無佛)이며, 무중생(無衆生)이고, 인아상(人我想)을 불견(不見)함이 곧 중생 본래의 법이다. 

관행(觀行)하는 법은 중생 각자의 연(緣)이 있다.(그 緣에 따라 한다.)"

[해설]

중생이란 본래 어떠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중생이란 본래 견(見)함이 없고, 지(知)함이 없으며 분별함이 없는 것이다. 

중생이 見하고 知하며, 분별함은 꿈 속의 일과 같아 깨고나면, 

그러한 일이 없어 중생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리(理)를 자심(自心)에서 깨달아 알았다면(了知), 관행(觀行) 할 바도 없다. 

즉 절관(絶觀)이 된다. 

그러나 아직 개오(開悟)하지 못한 중생에게는 각자 인연 따라 적합한 방편의 관행을 통해 개오를 유도한다. 

                                     무명상사(無名上士)가 집(集)함.     절관론(絶觀論)   - 終 -

 

                                                                -박건주 역주 <絶觀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