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13

2021. 11. 25. 22:24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또 묻는다. 

"인연이 있다면 훔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벌이 연못의 꽃분을 취하고, 참새가 뜰의 밤을 쪼아 먹으며, 소가 소택(沼澤)의 콩을 먹고,

말이 들판의 벼를 취하는 것은 필경 내 것, 남의 것이라는 분별없이 얻는 것이다. 

만약 너와 나라는 분별심을 내면 바늘이나 호리(豪釐.極小)의 조그마한 것을 훔치는 행위도 또한 

노비가 되는 업(業)을 짓는 것이 된다."

 

[본문]

또 묻는다.

"인연이 있다면 음행(淫行)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하늘은 땅을 덮고, 양(陽)은 음(陰)에 화합하며, 측간(厠間)은 위에서 떨어지는 오줌을 받아들이며,샘물은 도랑으로 흘러들어 가나니, 마음 또한 이와 같아 일체에 걸림이 없다. 

만약 정(情)을 일으켜 분별한다면 자신의 부인(婦人)에 대한 행위도 또한 너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본문]

또 묻는다. 

"인연이 있다면 망어(妄語)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말하되 말하는 주체가 없고, 말하되 무심(無心)이며, 말소리는 종소리와 같이 자연의 기(氣)이고 음(音)이다. 마음도 이와 같고, 도(道)와 불(佛) 또한 이와 같아 무엇을 한다 함이 없다(無事).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한다 함이 없이 하지 않으면) 염불하는 것도 또한 망어(妄語)가 된다."

 

[본문]

또 묻는다. 

"만약 몸이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행주좌와(行住坐臥)를 합니까?

답한다.

"단지 행주좌와 할 뿐인데 어찌 꼭 몸이 있다는 생각을 세워야 하겠는가?"

 

[본문]

또 묻는다.

"이미 마음이 없다면 의리(義理)를 사유할 수 있겠습니까?"

답한다.

"만약 마음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무사유(無思惟) 또한 있게 된다. 만약 무심(無心)임을 깨달으면 사유(思惟)를 시설(施設)하는 것 또한 없다. 왜냐하면 비유컨대 선사가 정좌(靜坐)하여 생각의 맹풍이 난동하여도 무심인 것과 같은 까닭이다." 

[해설]

무심(無心)을 허무의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거울이 공적(空寂)하여 만상을 비추듯이 마음도 무심하여 공적한지라 화도 내고 걱정도 하며 웃기도 한다. 마음이 본래 무심임을 깨달은 자리에서는 번뇌의 소용돌이가 쳐도 그대로 공적하여 무심일 뿐이다. 무심인지라 마음의 일체 공용(功用)이 있는 것이다. 

 

[본문]

이에 연문(緣門)이 다시 일어나 물었다. 

"만약 처음 도를 배우는 이가 홀연히 인연을 만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해치려 다가온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도(道)에 합당한 것입니까?"

답한다.

" 한 가지도 대처할 것이 없다. 왜 그러한가.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피할 수 없으면 그 자리에 있는다. 참을 수 있으면 참는다. 참을 수 없으면 웃어 넘긴다." 

[해설]

당처에 즉한 자리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 일정한 법이 없음)이 그대로 구현된다. 무엇이든 문제될 바가 없다. 

 

[본문]

또 묻는다.

"(그렇게) 웃어 넘기는 이가 저 아견(我見) 인견(人見)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 어떻게 구별되는 것입니까? "

답한다.

"몽둥이로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자연히 나오는데 왜 내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네가 만약 마음을 딱 붙들어 메어두고 치아를 악물며 참는다면 바로 여기에 크고 큰 아(我)가 있다." 

 

[본문]

또 묻는다.

"사람은 슬픔과 즐거움 속에 있을 때 정(情)이 움직이게 되는데 어찌 종소리와 같겠습니까?"

담한다.

"언어로 같다 다르다 하는 것은 단지 네가 망상의 사량분별을 많이 해오며 이러한 문(門: 같다 다르다 하는 분별의 문)을 지은 것일 뿐이다. 만약 마음에 분별함이 없으면 자연을 체달(體達)한다."

[해설]

사람은 정(情)에 따라 움직이니 종소리와 같이 때리면 무심히 자연히 나오는 것과 다르다는 질문이다. 정이란 것도 분별로부터 나온다. 분별이 없으면 정에 구애됨이 없어 참다운 자연의 자재(自在)함을 체달한다. 

 

[본문]

또 묻는다.

"성인(聖人)은 병기(兵器)에 다치지 아니하고, 고통으로 신음하지 아니하며, 색(色)에 끌리지 아니하여 마음이 흔들림 없는데 왜 그러합니까? "

답한다.

"일체법(一切法)이 무아(無我)임을 깨달으면 소리와 소리없음,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모두 리(理)에 합치하느니라." 

[해설]

있고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당념, 당처를 떠나 있지 않아 불이(不二)이다. 무아를 깨달음이란 곧 어디를 향할 바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디로 향함이 없음이 당념, 당처에 즉함이다. 당념 당처에 일체의 원만한 리(理)가 다 구족되어 있다. 

 

                                                                    -박건주 역주 <절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