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51)

2021. 10. 26. 22:0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제가 잠을 잘 때 의식은 어디로 갑니까? 

 

슈리 푼자 : 의식이 어디로 간다는 사실을 그대는 어떻게 아는가? 

그대는 잠에서 깨어나고, 말하고, 다시 잠들 때 이 수면의 의식은 거기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저는 단잠을 잤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없었습니다"라고 그대는 말한다. 

몸이 수면을 취할 때, 그것은 의식이 아닌가? 누가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깨어 있는 의식과 수면 의식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투사된 그림이 화면 위로 지나듯이, 의식의 여러 상태도 그대라는 화면 위를 지나간다. 

화면은 움직임이 없으며 변화하지도 않는다. 

활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 자신을 화면과 동일시하라. 

그대는 화면이요, 바탕이다. 화면이요 바탕인 의 의식 위에 여러 상태가 나타날 뿐이다.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보게되면, 화면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대가 화면을 보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화면이 보일 때,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가 의식이 될 때, 그대는 이름과 형상으로 된 투사물을 보지 않는다. 

이름과 형상을 볼 때면 언제나 그대는 실재를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기에 금으로 만든 조각상이 몇 개 있다고 하자.

하나는 신의 상이고, 또 하나는 개의 상이고, 나머지 하나는 돼지 상이다. 

각기 200 그램의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대가 그것을 금은방으로 가지고 간다면, 어느 것이 가장 값나겠는가? 

돼지인가, 개인가, 신상인가? 같은 값이다. 

본질을 따진다면, 같은 값이다. 본질은 같다. 

그대가 형상과 이름을 제거한다면, 그래서 이름도 형상도 없어진다면, 

그대는 무엇인가? 그대는 누구인가? 

 

방문자 : 금이 참나와 같다는 말씀입니까? 

 

슈리 푼자 : 그렇다. 그러나 이름과 형상에 마음을 빼앗기므로, 

우리는 단지 돼지나 신상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근원으로 되돌아 가서 본질, 금, 실재, 텅 빔을 자각한다면, 

이것이 깨달음(nirvana)이다 ! 

만일 우리가 이름과 형상만을 인식하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현상세계이다 ! 

이름과 형상을 제거하라. 

그러면 곧바로 깨달음이 온다. 

 

방문자 : 영적 장면에서 카르마가 없다는 관점이 묵인, 방종, 해로움 및 오해에 종종 이르게 하였습니다. 

 

슈리 푼자 : 나는 행위자 없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위자에게는 반작용이 따라 다닐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행한 행위자에 대하여 대가를 치르어야 할 것이다. 집착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개념들의 결실을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가 생각하는 바 그대로의 것이 된다. 

꿈 속에서 한 사람은 거지가, 다른 한 사람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둘 다 꿈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왕도 거지도 아니다. 일단 그대가 그 어느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자유롭게 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지연시키고 있다. 

우리는 십 년 간의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깨달을 수 있다. 자유는 지금 가능하다. 

 

*  *  *  *

 

방문자 : 이 모든 영적 여행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제 자신에게 물어 보았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개념을 버리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요? 

 

슈리 푼자 : 영성은 무엇을 버리라고 그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버려질 수 있단 말인가? 버리고는 그것을 어디에 두려 하는가? 이 세상에는 산, 강 및 동물이 있다. 그것들을 버린다면, 그것들은 어디로 가야겠는가?

그것들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거절도 수용도 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 그대 자신의 참나가 되어라. 이 모든 것들은 그대 자신의 참나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그대 안에 있다. 그대의 관점만을 변화시켜라. 이 모든 것들을 그대 자신의 참나로 알고 참나 안으로 받아들여라. 

이 모든 것들이 나라는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방문자 : 희망이나 개념조차도 그러합니까?

 

슈리 푼자 : 그렇다. 그대가 이것들을 그대 안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디에 고통이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다르다는 차이를 수용할 때에만 고통이 일어난다. 

모든 것들을 그대 자신의 참나로 알라. 모든 것들이 그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대의 참나를 텅 빔, 영원 등 그 무엇이라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이 그것 내에 있으며,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버릴 수 있겠는가? 이것들을 어디로 보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전체이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버리고는 그것을 어디로 보낼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존재이다."가 우파니샤드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이다. 

영성은 그대에게 무엇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자. 

그대가 모든 것을 버린다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대는 참나로부터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다. 

만일 그대가 버린다면, 그대와 참나 사이에 경계선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대가 "가 버려"라고 말한다면, 그대와 그대가 던져 버린 것 사이에 경계선이 생기게 될 것이다. 

진리 내에서는 어떤 제한이나 경계선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전부이다 ! 그대는 모든 것을 버리든가, 아니면 모든 것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고요히 하라. 

모든 생각을 비우고는 모든 것을 그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  *  *  *

 

방문자 : 스승님이 사마디 상태에 들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슈리 푼자 : 언제 그대는 이것을 생각하는가? 사마디 들기 전인가, 후인가? 사마디 중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대는 이 사마디를 늘 지속시켜야 한다. 

우선, 자유와 굴레라는 이 개념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것을 발견하라.

자유를 얻으려 하지 말고, 그대가 이미 행해오고 있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 발견하라. 

 

방문자 : 행하지 않음이나 포기함도 역시 행함입니다. 

 

슈리 푼자 : 텅 빔이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잡으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텅 빔에다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전에 행했던 것을 하지 않는다. 

(종이를 손가락으로 집었다가, 손가락을 풀자 종이가 바닥에 떨어진다) 

붙잡고 있던 것을 나는 버렸다. 

굴레라는 개념은 그대의 본성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은 늘 자유이다. 

 

방문자 : 저는 그 점을 지적으로 매우 선명하게 압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

 

슈리 푼자 : 아니다, 아니야. 그대의 본성 그 자체는 자유이다. 자유가 그대의 본성이 아니라면, 

그대는 자유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본성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자유가 그대의 본성이다. 불행하다거나 굴레에 묶여 있다라고 자신에게 첨가시켜 놓은 그 모든 것은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버려라. 그러면 그대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방안에 유령이 있다는 믿음을 그대가 갖고 있다고 하자.

유령을 물리치기 위해 사람이 온다. 이 사람은 유령을 물리쳤다고 말한다. 

사실은 유령도 유령을 물리침도 없었다. 

이것이 그대 본래 상태에로의 귀환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것은 그대의 문제였다. 

자 우리는 막중한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행하지 않음도 역시 행함이다. 노력하지 않는 편이 더 낮다. 

그냥 이 일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행하지 않음이란 그대가 읽었고, 들었고, 보았고, 느꼈던, 그 모든 것들의 잊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유에게로 되돌아 감이다. 온갖 것이 그대에게 강요되었다. 

온갖 지식이 사회로부터, 부모로부터, 교회로부터 그대에게 강요되었다. 

 

방문자 : 자유가 이미 여기 있기에, 제가 자유에게로 되돌아 갈 수조차 없습니다. 

 

슈리 푼자 : 그래 맞다, 그러므로 여기에 멈춰라. 자유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이 전부다. 

이해하려고 애쓴다면, 그때 그대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방문자 : 한 대 맞은 기분입니다. 

 

슈리 푼자 : 부드러운 한 대이다. 자유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라. 

 

방문자 : 생각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 들고, 욕망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환영입니다 ! 그것이 우리를 묶고 있습니다. 

 

* * * *

 

방문자 : 의문이 일어나면 저는 의문을 일으킨 그 생각의 근원을 추적합니다. 텅 빔으로부터는 아무런 질문이 없습니다. 

 

슈리 푼자 : 참나에 이르고 난 뒤에 돌아보면, 그대는 그대가 참나가 아닌 때가 없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아무 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이해하려고 애쓸 때, 마음 작용이 일어난다. 이 마음 작용이 그대를 그릇된 방향으로 안낼할 행함이 된다. 

 

                                                     -슈리 푼자 법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