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12

2021. 10. 6. 21:5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본문]

또 묻는다. 

"작(作)할 수도 없고, 작자(作者)도 없는데 받음(受)은 있습니까? 

답한다. 

"인(人, 我), 법(法)의 성품을 떠났는데 누가 작(作)하고 누가 받겠는가? 

[해설]

능(能:주관)과 소(所:대상)를 떠난 일심(一心)이고, 당념에 즉함이 즉 일심이니

어떠한 상(相)에도 머무름이 없어 받음(感受)도 없다. 

일심(一心)이니 작자(作者)가 따로 없되 일체의 행상(行相)이 없지 않기에 일심에 작자의 뜻이 없지 않다. 

 

[본문]

또 묻는다.

"비록 있지는 않다 하여도 각지(覺知)함이 없지는 않겠지요?"

답한다.

"비록 지(知)한다 하더라도 아(我)를 세울 수 없는데 어찌 지(知)함이 없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해설]

심성(心性)이 본래 지(知)함이 없고, 견(見)함이 없으며, 분별함이 없음을 요지(了知)하니 당처(當處)에 즉하게 되어 

지(知)함이 없음도 얻을 바가 없다. 당념(當念) 뿐이며 일심(一心)인 까닭이다. 

이를 하나의 법상(法相)으로 잡으려 하면 어긋난다. 

당처에 즉한 자리에서는 분별을 떠난 지(知)가 없지는 않으나, 

당처 뿐이라 능(能 : 주관)인 아(我)의 자리가 따로 없고, 무엇을 따로 세우거나 얻을 바가 없다. 

 

[본문]

또 묻는다. 

"이미 아(我)가 없는데 어떻게 지(知)함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한다. 

"아견은(我見으로 있다 하는 我는) 비아(非我)이니 아(我)가 있어 지(知)함이 아니다. "

[해설]

당처에 즉하면 지(知)함이 있다 없다, 아(我)가 있다 없다 등, 그 어떠한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분별을 떠나 지(知)함이 없이 지(知)함인 까닭이며, 인식주관(能)의 자리가 따로 없이 각(覺)되는 신증(身證)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본문]

또 묻는다. 

"아(我)가 있다 하는 것이 왜 방해가 됩니까?"

답한다.

"지(知)함에는 아(我)를 세워도 무방(無妨)하나, 

단지 아(我)가 있다 하는 것은 거기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여겨질 염려가 있다"

[해설]

지(知)를 말하니 아(我)를 세울 수는 있으나 자칫 아가 실제로 있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그 아가 무엇을 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지(知)하니 아를 말할 수는 있겠으나 무엇을 하는 바가 없으니 무아(無我)이다. 

그 지(知)함은 주관이 대상을 지(知)함이 아니니 지(知)함을 떠난 지(知)인지라 아(我)가 대상을 지(知)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

또 묻는다.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왜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까?"

답한다.

"방해되는 것이 없다면 일이 없을 텐데, 왜 방해가 되느냐고 묻는 것인가?"

[해설]

방해되고 안되고도 모두 당처에 즉하였는가, 아닌가에 의한 것일 뿐이다. 

아(我)가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한량없는 장애가 나오게 된 것이 분명하거늘, 

왜 아가 있다는 것이 방해거 되느냐고 물었으니 딱해서 그러게 답하였다. 

 

[본문]

또 묻는다. 

"인연이 있다면 살생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들에서 번진 불이 산을 태우고, 맹풍이 나무를 부러뜨리며, 절벽이 무너져 짐승을 덮치고,

흘러 넘친 물이 벌레를 표류시키듯이 마음도 이와 같다. 

사람이 살생을 하되 유예(猶豫, 이럴까 저럴까 하는, 이리저리 걸리는) 마음이 있어 살리고 죽이는 가운데 마음이 다하지 못하면(無心하지 못하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도 또한 명업(命業)을 짓는 것이 된다." 

[해설]

당념 당처를 떠나 한마음이라도 일으키면 들에서 번진 불이 산을 태우고, 

맹풍이 나무를 부러뜨리듯이 온갖 업을 연이어 일으킨다. 

하나의 파도가 연이어 한없이 파도가 이어짐과 같다. 

그러나 산을 태우는 불도, 나무를 부러뜨리는 바람도 무심하다. 

무심하기에 그 불과 바람에 죄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처 당념에 즉하면 그대로 무심(無心)이어서 무엇을 짓는 바가 없고, 

일체 행에 걸릴 바 없으며, 시비(是非) 선악의 문제가 문제되지 않는다. 

무심을 억지로 지어서 지니고자 하여 무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래 무심임을 요지(了知)하여야 당처에 즉하게 되어 무심이 된다. 

그렇지 아니하고, 무심을 흉내내거나 가장하여 살생한다면 큰 죄업을 짓게 된다.  

 

                                                     -박건주 역주 <절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