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마 이루(Summa Iru,침묵을 지키라)- 4

2021. 10. 1. 23:06성인들 가르침/슈리 푼자

 슈리 푼자와의 대담 : 대담자 , 데이비드 가드먼, 1993년 럭나우 

 

가드먼 : 빠빠지, 당신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주 말씀하시기를, 자기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방법은 실패하는데 이것은 왜 효과가 있습니까? 

 

슈리 푼자 :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들은 단지 가지를 잘라낼 뿐이지만, 탐구는 뿌리, 즉 마음의 뿌리를 칩니다. 가지를 잘라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자라납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서 그것을 뿌리 뽑아 버리면, 그것은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탐구는 마음을 뿌리 뽑습니다. 그대가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할 때, 그대는 마음의 뿌리를 쳐서 그것을 영구히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탐구를 통해서 그대는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나'는 마음입니다. 그대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나'는 마음의 참된 성품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는 누구입니까? 그녀는 누구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지 않습니다. 

그대가 처음으로 그대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때, 그대는 마음의 뿌리를 칠 뿐 아니라, 모든 창조계의 뿌리를 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즉 마음이 모든 창조물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탐구를 해 나가면 사라지는 것은 '나' 뿐만 아닙니다. 창조계 자체도 사라집니다. 

그대는 어떤 창조주도 없고, 어떤 창조계도 없으며, 어떤 존재도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나는 누구인가?'는 그렇게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것은 그대를 진아의 깊은 속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도 창조계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드먼 : 많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해 왔지만 정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물어야 합니까? 

 

슈리 푼자 : 아닙니다. 단 한 번이면 됩니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만 하면, 단 한 번만 물으면 됩니다. 만약 그것을 제데로 하면, 그 물음은 바로 정확한 자리를 칩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을 때, 어떤 답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어떤 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그대는 어딘가에 도달한다거나, 어떤 답을 얻는다는 의도를 가지고 탐구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 질문의 목적은 어떤 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강이 바다에 합일되듯이 그렇게 합일되기 위한 것입니다. 강은 바다로 들어가고 나서도 강으로 남지는 않습니다. 강이 바다에 들어가면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에 있어서는 신성(神性) 속으로, 혹은 진아, 즉 공(空) 그 자체 속으로의  합일이 있습니다. 그저 침묵을 지키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이 탐구를 하는 동안에는 어떤 답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 질문이 끝나고 나면 '나' 또한 끝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 다음에 뭐가 올 수 있습니까? 그대는 그 속으로 '나'가 합일되는 그것이 됩니다. 

그 자리는 공(空)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가드먼 : 빠빠지, 당신께서는 자주 '진리는 성스러운 사람을 고양시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성스러운 사람은 그의 마음이 오점이 없고, 순수하며, 순결한 사람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당신께서는 누구에게도 자기 마음을 오점없고 , 순수하며, 순결하게 만드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고 오점없고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리가 성스러운 사람을 고양시키겠습니까? 

 

슈리 푼자 : 그대는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마음 자체가 먼지입니다. 먼지를 가지고 먼지를 청소할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때묻은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청소하고 싶다 합시다. 그대는 먼지를 더 가져와서 원래 있던 먼지 층에 보태주겠지요. 이것이 마음을 청소한다고 하는 것인데, 먼지에 먼지를 보태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서 마음을 청소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봐야 이미 있던 먼지에 먼지를 보태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침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침묵을 지키면 그대는 거울 자체를 치워버려서, 먼지는 어디에도 내려 앉을 곳이 없게 됩니다. 제가 성스러움이라고 한 뜻은 이런 뜻입니다. 

진리는 성스러움을 고양시킵니다. 그리고 그대는 마음이라는 거울을 치워버림으로써 성스럽게 됩니다. 

만약 그대 안에 거울이 있으면 그대의 얼굴이 거기에 반사됩니다. 이 반사가 하나의 오점이며, 하나의 불순물입니다. 그 오점이 있는 한, 그대는 성스럽지 않습니다. 그 반사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간단합니다.

거울을 던져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반사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그대의 얼굴로 되돌아 갑니다. 만약 그대가 단 1초간이라도 마음을 던져 버리면 성스러움이 그 자체를 드러낼 것이며, 그대는 그 성스러움 안으로 다시 합일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가 성스러운 사람을 고양시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대 주위에서 보는 모든 대상은 그대 마음의 거울에 비친 반사입니다. 모든 대상이 먼지입니다. 

거울을 던져 버리면 아무 마음도 없고, 아무 대상도 없고, 아무 먼지도 없을 것입니다. 

 

가드먼 : 빠빠지, 무심(無心), 죽은 마음 그리고 침묵하는 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슈리 푼자 : 침묵하는 마음은 일시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속에서 대상들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지만,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고요한 마음 역시 일시적입니다. 명상이나 집중을 하면 고요한 마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촛불의 불꽃과 같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그 불꽃은 고요합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오면 촛불은 깜박거리다가 꺼져 버립니다. 

고요한 마음은 새로운 생각이라는 바람을 만나자마자 날려가 버립니다. 

무심(無心)에 관해서 보자면, 저는 이런 질문을 처음 듣습니다. 인도에서건 서양에서건 전에는 아무도 저에게 이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이 질문을 다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무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때때로 그대는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보려고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은 때때로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그 자신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의식 안에서 하나의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습니다.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이 파도는 그 자신이 바다와 별개라고 상상합니다. 이 파도가 '나', 즉 개인적 자아가 됩니다. 일단 그것이 별개가 되면 이 '나'는 더욱 하락하여 창조를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공간, 즉 방대하고 경계가 없는, 무한한 공간의 텅 빔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공간과 더불어 시간도 창조됩니다. 왜냐하면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시간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윤회라는 것입니다. 윤회는 시간을 뜻합니다. 즉, 윤회는 끝없는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시간 안에서 태어나고. 시간 안에서 머무르는 것은 무엇이든 시간 안에서 죽어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마음입니다. '나'가 일어나서 공간을 창조하고, 시간을 창조하고, 윤회를 창조합니다. 이 '나'가 지금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나'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유를 향한 강렬한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욕망은 의식 그 자체로부터 일어납니다. 본시 의식으로부터 하나의 하강- '나'로부터 공간으로, 시간으로 윤회로 내려오는 - 이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승이 있게 됩니다. 그대가 상승함에 따라,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집착들이 사라지고, 그 다음은 생기의, 그 다음은 마음의, 그 다음은 지성의 대상에 대한 집착들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그대는 '나'에게로만 돌아 갑니다. 이 '나'가 고요한 마음입니다. 

이 '나'는 일체를 물리칩니다. 그것은 아무런 집착없이 홀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집착의 세계, 즉 윤회계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의식으로부터 일어난 이 '나'가 이제는 의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무심(無心)이 되자'하고 결심합니다.  이 결심과 더불어 '나'가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집니다. 

마음인 이 '나;가 물리쳐졌습니다. 그러나 그 '나'와 의식 사이에 여전히 뭔가가 남아 있습니다. 이 사이에 있는 것 바로 무심(無心)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있는 것이 의식 안으로 합쳐지고, 그런 다음 의식 그 자체가 됩니다. 

이 컵을 보십시오(탁자 위에 컵 하나를 가리키며). 컵의 안과 밖에 모두 공간, 즉 공(空)이 있습니다. 

안의 공간을 우리는 ' 안 공간'이라 하고 바깥의 공간을 '바깥 공간'이라고 합니다. 왜냐? 컵의 이름과 형상이 안과 밖을 구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과 형상을 없애버리면 안의 공간과 대공(大空), 즉 큰 공간은 하나가 됩니다. 사실 그것들은 항상 하나입니다. 공간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안이나 밖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름과 형상이 안과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은 이러한 인의적인 구분에 의해 결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명상(名相)이 바로 '나'입니다. 이 '나'가 사라지면 의식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던 벽들이 제거됩니다. 

이것이 이것이 됩니다.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의식으로 이행할 때, 그대는 이 무심(無心)의 단계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나는 이제 무심이다'하는 느낌, 혹은 지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천천히, 이 무심은 '저 너머' 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데이비드 가드먼 엮음, 대성 번역<빠빠지 면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