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3. 22:49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나"는 상이한 수준(현시와 비현시)에서 나타나는 항존하는 실체인가?
이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이한 말로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마하리지에게 제기되지만,
그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가끔 대담한 방문객이 모임의 초두에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마하리지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자신은 한 개인으로 다른 개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서 다른 의식에게 의식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마하리지에 의하면, '나'는 마음의 수준에서 세 가지 양상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첫째, 비개안(非個我, 현시되지 않은 존재) : 모든 감각적인 인지 또는 경험의 너머에 있는,
그리고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절대의 "나".
둘째, 초개아(超個我, 현시된 존재) : "나는 존재한다"는 의식 안에 절대의 반영.
셋째, 개아(個我, 현시된 존재의 파생물): 육체적이고 생명적인 과정의 구조물이고 의식이 현시된 몸-마음으로 이루어진 기관(육체)
그러나 마하리지는 이러한 구별은 단지 개념적인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반복하고 강조했다. 본질적으로 현시(Vyakta)과 비현시(Avyakta) 사이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마치 일광과 광선 사이에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처럼, 우주는 일광으로 꽉 차있지만, 광선으로서 무언가의 표면에 부딪쳐 반사되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광선이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개체이다.
인간이라는 육체의 형태 안에서의 개인은 언제나 대상이다.
목격하는 자로써의 의식은 주체이며, 그들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즉, 의식은 신체기관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고,
신체는 의식없이는 지각력을 가질 수 없다.
그것들이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것과 함께 하는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정체적이라는 증거이다.
그 둘은 서로 같은 의식이며 하나는 움직이는 다른 하나인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각각의 의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나타난 전체적 우주는 단지 의식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마하리지는 말한다.
개념화의 과정은 어떠할까? 그것은 이와 같다.
의식은 그것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특별한 원인이나 이유없이 순수한 존재 안에서 그저 생겨날 뿐이다.
마치 바다 표면의 파도처럼 세상은 의식 안에서 나타나고 의식 안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도, 또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때에도,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나"는 거기에 있다.
개체로서의 '나', 당신, 그 등은 단지 의식의 나타남일 뿐이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나"이다.
세상이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근본의 잠재성에서
의식을 통하여 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알려진 모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출현된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출현의 지속은 시간의 다양한 척도에 따라 서로 다르다.
세상이 깊은 잠 속에서는 사라지고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속됨은 허용된 삶의 기간에 따라 아주 다양한 것이다.
곤충에게는 몇 시간이, 그리고 브라마, 비슈누,마헤슈와라의 삼위일체에게는 영겁이!
그러나 몇시간이든 영겁이든 의식 안에서 출현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간에 끝나야만 하는 실재성이 없는 것들이다.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마하리지의 설명방식은 근본에 머물며 완벽히 여여한 가운데 의식의 세계를 사용하는 그 다양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마하리지는, "자각은 절대적인 근본으로부터 비롯되어 내면의 자신으로 스며들며,
외적인 자신은 깨어있지 않은 존재의 일부이다."라고 말한다.
외부의 자신(Vyakti)은 육체적인 몸에 의해 그려지고,
내부의 자신(Vyakti)은 의식에 의해, 그리고 순수한 자각에서만이 그 지고함(Avyaka)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순수 그 자체의 주체성인 절대적 근본에는 어떠한 객관도 있을 수 없다.
이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절대적 근본으로서의 어떠한 "경험"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밝혀준다.
모든 경험의 수단은 내면의 자신-의식이다.
절대적 근본에서는 경험을 가능케하는 잠재력만 제공하고
자신 -의식은 경험이라는 실제 움직임만을 할 뿐이다.
개인의 절대적 근본의 자각과의 접촉은 오직 마음이 끊어진 적멸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그때에만이 개념화가 멈추기 때문이다.
마음이 적멸에 들어 지극히 고요해질 때,
완벽한 흔들림없음의 상태에 들게 될 때 실체에 녹아 실체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마하리지가 의식과 함께 존재할 필요가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음이 동하면 실체는 가려져 사라지고 마음이 끊어졌을 때 실체에 든다.
마하리지는 이렇게 말한다.
자각(自覺)이 대상이나 물리적 형태와 접할 때는 관찰자가 되고,
대상을 자기로 생각하는 자기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면 "개아(個我)"가 된다.
실체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상태만 있을 뿐이다.
만일 자기동일시에 의해 타락되면 개아(Vyakti)가 되고,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으로 색칠되면 "목격자(주시자)"가 되며,
더렵혀지지 않고 색칠되지 않아 본래의 순수성으로 남게 될 때는 지고함, 절대성이 되는 것이다.
개념적일지라도 절대적 자각과 그 안에서 우주가 나타나는 의식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마하리지가 반복해서 경고하듯이 하나는 다른 하나의 반영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슬방울 안의 태양의 반영은 태양일 수 없다.
깊은 잠에서 처럼 대상화가 없을 때도 깨어 있는 때처럼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
우주는 나타나고 따라서 우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히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가 사라진 절대적 자각과 잠든 상태처럼 흐릿한 의식없음(실은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상화 시키는 상태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둘이고 현시와 비현시가 둘이지만,
알고 이해하는 것까지 모두 놓아진 본래적 상태에서는 그 둘이 모두 하나이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 < 담배가계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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