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3. 22:17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문 : 에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에고는 참자아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마하리쉬 : 에고의식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무상한 것이다.
반면에 참자아는 영원하다. 그대는 실제로는 참자아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에고를 참자아인 것으로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문 : 그런 착각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건가요?
마하리쉬 : 착각이 있다면, 그 착각이라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조사해 보라.
문 : 에고를 참자아로 승화시켜야 하나요?
마하리쉬 : 에고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문 : 그렇다면 에고가 저희를 괴롭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누가 괴롭다는 말인가? 그 괴로움이라는 것도 그대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모두 에고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
문 :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무지에 휩싸여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대 자신이나 걱정하라. 세상일은 세상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그대는 그대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라. 그대가 육체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조악한 물질 세상이 존재하지만, 그대가 영혼이라면 세상 모두가 영혼일 뿐이다.
문 : 그렇게 되면 그 당사자는 좋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마하리쉬 : 먼저 그렇게 되어 보고, 그렇게 된 다음에도 그런 의문이 드는지를 살펴보라.
문 : 무지라는 게 있습니까?
마하리쉬 : 누구에게 말인가?
문 : 에고에게 말입니다.
마하리쉬 : 그렇다. 에고에게는 무지가 있다. 에고를 없애면 무지는 저절로 사라진다. 먼저 에고를 없애는 데 주력하라. 에고가 없어지면 참자아만 남는다. 무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전들도 무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 : 에고는 어떻게 생기는 겁니까?
마하리쉬 :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에고라는 게 있다면 그대가 둘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에고는 없다. 그러니 무지 또한 없는 것이다. 무지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는 에고의 부속물이다. 에고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와 고통 속에서 괴로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은 실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지라는 전제 위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무지는 에고의 무지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자아에 대한 망각이 곧 무지이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참자아 앞에는 무지가 없다. 그러므로 참자아를 깨달으면 모든 어둠과 무지와 슬픔은 저절로 사라진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어둠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태양이 빛나는 곳에는 어둠이 없다. 참자아의 빛 속에는 무지가 없다.
문 : 실재가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 겁니까? 실재가 아닌 것이 어떻게 실재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실재가 아닌 것이 어디에 나타난단 말인가? 오직 참자아만이 존재할 뿐, 실재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이 세상을 인식하는 근거로 에고를 상정해 놓고 있는데, 에고의 근원을 한번 추적해 들어가 보라. 그러면 에고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대가 보고 있는 이 세상도 에고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문 : 참자아를 아는 것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은 신의 유희가 너무 잔인합니다.
마하리쉬 : 참자아를 안다는 것은 참자아가 된다는 뜻이며, 참자아가 된다는 것은 본래 상태의 자기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눈을 볼 수 없어도 눈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듯이,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혼란은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눈을 바라 보는 식으로 참자아를 개관화시키려는 데에서 온다.
그대 자신, 그대의 참자아는 결코 객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참자아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지각능력이 없는 육체가 참자아를 알 수 있는가?
그대는 늘 '나'에 대해 얘기하고 '나'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나'가 누구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한다.
그대는 스스로 참자아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참자아를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사실이 이럴진대 어디에 신의 유희가 있으며, 무엇이 잔인하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참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경전은 마야(幻影)이니 릴라(遊戱)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문 : 저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마하리쉬 : 물론이다. 그대의 깨달음은 최상의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다른 사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오직 참자아만을 보기 때문이다. 금세공인의 눈에는 금으로 만든 여러가지 장신구들이 그저 금으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면 여러 가지 모습과 현상이 보이겠지만, 육체를 초월하면 그대의 육체 의식과 함께 그 모든 것들도 사라져 버린다.
문 : 그러면 나무나 식물들도 사라집니까?
마하리쉬 : 나무나 식물들은 참자아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가? 한 번 탐구해 보라.
그대는 그대가 나무나 식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의 생각 자체가 참자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대의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근원을 찾아 보라. 생각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생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궁극적인 근원인 참자아만이 남을 것이다.
문 : 이론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같은 것은 나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하리쉬 :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와 같다. 스크린 위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영상들이 지나갈 때마다, 관객들은 마치 자기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흥분하기도 하고 가슴을 졸이기도 한다.
그런데 만일 관객을 스크린 위에 나타나도록 장치해 놓는다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같은 스크린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 원리를 그대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 참자아가 스크린이며, 스크린인 참자아 위에 에고가 나타난다. 현상계의 사물은 에고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상이다. 따라서 에고가 나타남으로 인해 지금 그대가 묻고 있는 나무니 식물이니 하는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이 모든 것들이 참자아와 하나이다. 그대가 만약 참자아를 깨달으면, 현상계의 다양한 사물들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오직 참자아만이 존재한다.
문 : 선생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분명합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체험까지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마하리쉬 :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장애물이다. 천상천하에 참자아만이 홀로 존재한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자유이다. 우리는 늘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런 사실은 깨달은 다음에야 이해가 되리라.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하면, 이미 그러하고 이미 도달해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미친듯이 발버둥쳤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보다 분명히 이해를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여기 있는 누군가가 이 방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꾼다고 해보자.
그는 꿈 속에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때로는 사막을 헤메고 때로는 바다를 건넌다. 그는 이 나라 저 나라를 거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다. 여러 해 동안 피곤하고 힘든 여행을 마친 그는 결국 이 나라에 도착하여 이곳 아쉬람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서 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나, 잠이 든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고생고생하면서 이 방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항상 이 방안에 있었던 것이다.
'본래 자유로운데 저희들은 왜 구속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대들은 이 방 안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사막을 헤메고 바다를 건너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것은 모두 마음의 장난, 다시 말하자면 환영(幻影)일 뿐이다.'
문 : 참자아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째서 유일한 실재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일어나는 것인가요?
마하리쉬 :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가슴 자체는 모르는 채, 가슴에서 나오는 순수의식의 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한 마음만을 본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밖으로 향해 있어서 그 근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 :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에서 나오는 무한하고 차별없는 순수의식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마하리쉬 :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물은 무한한 태양 빛을 좁은 항아리 안에서만 반사한다. 각 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음의 경향성(傾向性)은 항아리와 같은 역활을 한다.
가슴에서 나오는 무한한 의식의 빛은 바사나(마음의 습)을 통과하면서 제한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제한된 형태로 반사된 의식의 빛을 마음이라고 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바사나를 통과하면서 제한된 형태로 나타난 반사광만을 봄으로써, 자신을 유한한 개체로 보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문 : 무엇이 참자아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인가요?
마하리쉬 : 마음의 습(바사나)이 장애물이다.
문 : 지금 선생님의 말씀은 끝없이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마하리쉬 : 지금 그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고가 장애물을 만든 다음, 스스로 거기에 얽혀 들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지금 질문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질문의 주체를 찾도록 하라. 그러면 참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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