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19. 20:43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 자아탐구 --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제가 "나"라는 개념을 잊어버린다면... (웃음) 겸손해지는 순간이 아주 미묘하고 부드럽게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데, 제가 충분히 뒤로 물러난다면 이런 순간들이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계속될 것처럼 보이는데요. 바라는 것이 문제일까요? 누가 10억 원짜리 보트를 갖기를 바란다면 이 사람의 관심이 배에 집중되자마자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과정이 멈춰요. 이렇게 바라는 것 때문에 아주 부드럽게 늘 일어나고 있는 그 과정이 가려져 버린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질문자: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보려면 아주 고요해야겠군요
라메쉬: 그렇게 "고요한" 과정을 지속시키려하는 것도 여전히 마음이죠. 실제로 보면, 마음이 침범하기 전까지는 이런 평화나 고요가 늘 있다는 사실이예요. 이해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침범하는 일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고요한 상태가 마치 있었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고요한 상태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예요.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이 상태를 사하자(sahaja) 상태, 즉 자연의 상태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지능 때문에 개인으로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정상이 아니죠. 이 때문에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생각은 개념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사람의 진정한 본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마음의 본성이 개념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해요. 에고, 즉 마음과 싸우는 것은 정확히 에고가 바라는 바예요. 당신은 마음과 싸울 수 없어요. 에고를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싸우고 마음에 저항하고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예요. 여기서 꼭 필요한 것은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자세예요. 순종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겁니다.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예요. 에고와 싸우는 대신, 누가 알고자 하는지, 누가 하고 있는지, 누가 필요해 하는지를 살펴보세요.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예요. 답을 구한다는 것은 마음이 의문을 일으키고, 마음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마음이 합리화하려고 노력하고, 마음이 자신이 얽매여 있는 틀 안에서 발버둥친다는 것을 뜻해요. 자아탐구의 목적은 이런 얽매임을 깨트리는 것이예요. 누가 알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마치 큰 몽둥이로 정신을 내려치는 것과 같아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지능밖에는 없다는 말이예요. 그렇게 물으면서 얽매임이 잘려나가죠.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이런 자아탐구는 명상도 아니고 만트라도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으셨어요. 이런 자아탐구의 과정은 늘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죠. 그럴 수 없죠! 밥은 먹고 살아야죠. 자아탐구는 일종의 부정하는 과정인데, 어떤 질문을 하든지 질문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목격과 같아요. "10억짜리 요트를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은 곧 바로 여기에 얽매이기 시작해요. "어떻게 요트를 가질 수 있지? 부탁하나, 빌리나, 훔치나? 그만큼 돈을 벌 수 있을까?" 이 모두가 얽매임이예요. 처음에 이건 마음이 끼어드는 것일뿐이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이해해도 이런 얽매임은 어느 정도 잘려나갑니다. 이런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은 좀 더 빨리, 일어난지 얼마 안 되서 잘려나가요. 결국에는 이 이해가 진정으로 완성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나도 수평적인 얽매임 없이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수직적으로 잘려나가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해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요. 이해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자기에게 질문하거나 이해가 수평적으로 얽매이는 일을 수직적으로 잘라내도록 그냥 놔두면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겠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이해는 시작됩니다. 이런 이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수평적 얽매임을 그 순간 바로 수직적으로 잘라버리는 목격이예요. 이런 이해가 스스로 얼마나 빨리 자리잡고 습관이 되는지를 보면 정말 놀라워요.
질문자: 목격을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가네요.
라메쉬: 목격은 아주 간단해요. 목격은 늘 일어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창 밖으로 차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정말 일어나는 일은 목격이고 이런 목격은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 주의를 끌리면서 "저거 흥미롭네."라고 하든가 "아, 이건 좋고 저건 싫군."라고 할 때까지 계속되다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되던 목격의 과정이 멈춥니다.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갑자기 어떤 장면에서 멈추는 것과 같지요. 목격의 과정은 이런 얽매임이 일어나면서 끊겨버려요. 그래서 목격의 과정은 늘 계속되고 있는데 마음이 끼어들면서 끊어지는 거죠.
질문자: 얽매임이 시작되면 어떻게 다시 목격을 시작하나요?
라메쉬: 마음이 끼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과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 자체로 목격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죠. "좋아, 이제 나는 목격할 테다. 어떻게 시작하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예요. 목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부재한다는 것입니다. 목격은 수직적이며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예요. 그래서 목격하는 "나"란 있을 수가 없어요. 목격에는 "얽매이지 말아야지."와 같은 생각이 없고 무엇과도 비교하는 일이 없어요. 비교하고 판단하는 일이 부재하는지가 목격의 진정한 척도죠. 생각은 그냥 목격되면서 비교하거나 판단하거나 결정할 일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끊어집니다.
질문자: 저와 그 진정한 경험 사이에 있는 이런 장벽을 깨뜨리는데 쓸만한 도구가 있나요?
라메쉬: 누가 무엇을 깨뜨립니까? 이것을 이해하면 되요. "누가"도 없고 깨질 "무엇"도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면 궁극적 이해가 일어납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누구?"라고 묻는 것도 조건에 길들여진 마음이 맞죠? 답이 있다고 전제하고 물으니까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그러면 모두가 조건에 길들여진 마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면 자유로워질 수 있군요.
라메쉬: 그래요. 어느 단계에 가면 그렇게 구별하는 것 조차도 견딜 수 없어집니다.
질문자: 탐구하는데 답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도 견딜 수 없어진다고요?
라메쉬: 물론이죠. 그래서 탐구하기를 멈추게 되는데, 비록 탐구를 그렇게 시작했다 하더라도 마찮가지예요. 이 때문에 제가 늘 "찾음은 개인으로 시작하고 그 개인이 소멸하면서 끝난다."라고 말하지요.
찾음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개인으로 시작되요. 이 "나"라고 하는 것은 아주 아주 강력해요. 그러다 중간 단계에 이르러서는 "나"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나는 그것이다'라고 이해하게 되요. 하지만 '나는 그것이다'라고 할 때의 나에게도 여전히 "나"의 그림자가 남아있고 "내"가 남기는 흔적이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나도 없고 '그대'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죠. 아시겠습니까?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예요. 나타나면 참의식이고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잠자는 참의식이죠. 개별적인 존재로서 찾는 자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누가 무엇을 찾는단 말입니까?
질문자: "누가 질문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것인데, 제가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면 어느 시점에 가서는 완전히 돌아버릴 것같은 지경에 이릅니다. 더는 갈 데가 없고 이것 뒤에, 이 질문 너머에 아무것도 없어요. 답을 찾으려고 해도 거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라메쉬: (웃으며) 그것이 바로 핵심이죠!
질문자: 이건 마치 공안(公案) 같은데, 아시다시피, 선(禪)에서...
라메쉬: 바로 그겁니다.
질문자: 그럼 그것에 관해서 이런 토론은 도대체 왜 합니까? (웃음)
라메쉬: 왜 이런 토론을 하느냐고요? 제가 당신에 묻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만일 당신이 마하라지께서 하신대로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다'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누구에게 무슨 토론이 필요하겠어요? 하지만 이것이 마음에게, 지능에게, "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토론하고 싶어하지요.
질문자: 마음을 쥐어짜지요. 이 모든 것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위해서 머리가 아프도록 쥐어짰군요! (웃음)
라메쉬: 저 같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진 않을 겁니다.
질문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요?
라메쉬: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죠.
질문자: 그럼 그 뒤에 무엇이 있습니까?
라메쉬: 모든 것이죠! (웃음) 보시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입니다. 사실상 본체의 아무것도 아님은 진정 충만하게 꽉 차있는 것이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뭔가 부정적이고 죽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충만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님은 잠재적인 에너지예요. 바로 이 잠재적인 것이 자신을 활성화시켜서 이런 세상으로 나타나게 한 거예요. 자신을 나타낸 것은 바로 그 나타나지 않은 그것이예요. 자신을 객체로 표현한 것은 바로 주체지요. 자신을 활성화시킨 것은 바로 잠재적인 에너지입니다. 모든 일은 이렇게 일어났어요. 이들은 두 가지 다른 상태가 아니예요. 다시 말하자면, 신비주의자는 이들이 두 상태가 아니라고 말할 거예요. 있는 모두는 잠들어 있거나 움직이는 참의식입니다.
질문자: 잠들어 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같은 상태군요?
라메쉬: 물론 그렇지요. 이런 까닭에 라마나 마하리쉬나 여러 스승들이 반복해서 이렇게 말하지요. "정말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조도 없다. 파괴도 없다. 목표도 없고 길도 없다. 자유의지도 없다. 운명도 없다."
질문자: 활동도 없고 부동(不動)도 없군요.
라메쉬: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다는 이런 기본적인 진리가 받아들여지면, 각각의 몸-마음 구조체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체 모습의 일부로 나타나는 하나의 모습으로 목격하는 일만 일어날 뿐이예요. 그리고 의문없이 오직 목격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있는 그대로를 목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질문자: 그럼 누가 목격하나요?
라메쉬: 참의식이죠. 참의식이 이 연극을 제공해요. 참의식이 대본을 썼어요. 참의식이 연극 속의 모든 인물을 연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참의식이 연극을 목격하고 있어요. 완전 원맨쇼죠. (웃음) 참의식의 연극이예요. 그 원맨쇼를 하는 사람을 빼고나면 남는 것은 참하나, 참독자성입니다. 그래서 이 모두가 참독자성의 연극이죠.
질문자: 라마나 마하리쉬가 결혼식 잔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결혼식 잔치에서 음식을 다 먹어 치우면서 폐 끼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 측 사람들은 그 사람이 신랑 측 친척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신랑 측 사람들은 그 사람이 분명 신부 측 친척일 거로 생각했어요. 마침내 누가 그 사람에게 물었죠. "누구 십니까? 누구 측 하객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어요. 들켜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아탐구는 진실을 가리고 있는 생각들을 들추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진실은 공공연한 비밀같지만 마음이 그런 진실을 흐린다고 말씀하셨어요.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그렇게 흐리는 것들이 자아탐구를 통해서 깨끗이 사라진다고 말씀하신 것 같네요.
라메쉬: 자아탐구는 어떤 방법이 아니예요. 그랬다면 자아탐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어야 하겠죠.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하신 말씀은 자아탐구가 처음에는 명상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하신 말씀이 전부예요. 그리고 명상을 처음 시작한다면 자아탐구가 제일 좋은 방법이기는 하죠.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반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길, 자아탐구는 특별한 장소에서 특정 시간에 수행하는 명상같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자아탐구는 그냥 하고있는 일을 통해서 일어나고 늘 일어나고 있는데, 이 까닭은 당신의 본 모습인 '참 그것'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예요. 처음에는 명상이나 사다나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위험이 여기 도사리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는 이것을 "헛된 반복"이라고 불렀어요. 이런 헛된 반복은 마음을 무디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반복하든지, 어떤 다른 만트라를 반복하든지, 무엇을 반복하든지 간에 이런 헛된 반복은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되지요. 그래서 처음에 "누가 알고자 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묻지만,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질문을 하고 답을 기대하는데 답을 얻지 못하면 얽매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나는 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 아니다."라고 하다가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와요. 결국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질문자: 그럼 답이 뭔가요?
라메쉬: 어떤 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답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자아탐구의 목적이 뭔가요?
라메쉬: 자아탐구의 목적은 마음이 그 질문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멈추는데 있고, 이는 정확히 목격이 뜻하는 바예요. 처음에는 "누구에게 이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누가 걱정하는가? 누가 알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생각이나 일 때문에 이런 의문이 일어나다가 끊어지는 것을 보게될 겁니다. 나중에는 그런 질문들 조차도 불필요하게 되요.
질문자: 그럼, 자아탐구는 덧없는 것이군요?
라메쉬: 어느 길을 따라가든지 그 길은 탈정체성의 과정으로 이끄는 길이예요. 모든 길은 다 관념적이죠. 마하라슈트라 주(인도에서 세번째로 큰 주며, 라메쉬가 사는 뭄바이가 주도다 - 옮긴이)에서 가장 유명한 박타, 즉 헌신자는 투카람(Tukaram, 1608~1649)이라는 성자였어요. 투카람은 5천 여 구절에 달하는 즉흥 시를 썼어요. 처음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 비토바(Vithoba)에게 말해요. "당신을 비개인적인 신의 형상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게 하시되, 다만 저에게는 생과 생을 이어서 당신을 숭배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당신의 형상으로 남아있어 주소서." 그런데 이처럼 열정적인 박타가 나중에는 시에서 이렇게 썼어요. "비토바, 당신은 사기꾼이요! 나를 속여왔소! 당신은 자신이 신이며 내가 당신을 경배해야 한다고 말했소. 이제 나는 우리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소! 아무런 차이가 없소! 당신은 나를 속였소!" 그러고는 투카람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헌신은 무지한 자를 위한 것이오." (웃음) 신기하게도, 바가바드기타에서도 신 크리슈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박타의 열정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나는 그에게 지식을 준다. 그가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도록 해준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이고, 그 방법이 항복에 의해서든지 받아들임에 의해서든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뜻해요. (20-2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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