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5. 21:00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다양한 가르침 --
질문자: 선생님께서 그러시듯이 개념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려고 개념을 사용하는데, 사용하시는 개념들과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쓰시는 방법이 선생님 자신의 삶의 경험과 개인적인 독창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다른 깨달은 사람이 같은 진리를 가리킬 때 개인적인 성향은 다르게 나타날까요?
라메쉬: 그럼요. 개인적 성향은 제가 말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제 말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나 그 반응에서도 나타나지요. 필요한 것을 일끌어내는 것은 모인 사람들이예요. 이 때문에 종종 모인 사람들에 따라서 다른 개념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마하라지께서 한 번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겉으로 보면 내가 말하는 것과 나의 구루께서 가르치신 것은 상관이 거의 없어. 그분께서는 다른 말과 다른 비유와 다른 개념들을 쓰셨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네가 가르칠 것은 사실상 내가 말해온 것과 전혀 상관 없을 거네. 무슨 말을 할지는 전적으로 자네의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에 달려있을 거네." 마라하리께서는 구루를 따라하려는 사람들을 정말로 무시하셨어요. 마하라지와 그분의 구루께서 담배를 피우시니까, 스무 명이나 담배를 따라 폈죠!
-- 언뜻 보아 아는 것 --
질문자: 선생님 의견은 선생님께서 어제 "공짜 견본"이라고 부르셨던, 그렇게 자연스럽게 언뜻 보아서 알게 되는 것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라메쉬: 그럼요. 그렇구 말고요!
질문자: 그렇게 신뢰하는 기준이 뭔가요?
라메쉬: 신뢰하는 기준은 당신이 언뜻보아 알게 됐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예요. 다른 사람들도 언뜻 보기는 하지만 인지하지 못해요. 그런 순간에 그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이나 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본 것을 거부하지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언뜻 보아 알게 된 것을 감사히 받아들여요. 이렇게 언뜻 보아 알게 된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일 조차도 은총의 일이예요.
질문자: 이길 방법이 없군요. 그렇죠?
라메쉬: 당연하죠! "당신"이 이길 방법은 없어요.
-- 비약적인 도약 --
질문자: 한 강의 중에 선생님께서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는 충격과 놀라움에 관해서 하신 말씀을 들었어요. 어느 정도 이해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계속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어요.
라메쉬: 보시면, 과정은 계속됩니다. 과정은 점진적이지만 궁극적인 이해는 늘 갑작스럽게 일어나요. 저는 이것을 주로 계단을 올라가는 일에 비유하는데, 당신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계단이 총 몇개가 있는지 몰라요. 계단이 150개인지, 300개인지, 아니면 3000개인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갑니다. 이야기 목적상 총 129개의 계단이 있다고 칩시다. 128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당신은 129개의 계단이 마지막 계단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128번째 계단에서 129번째의 마지막 계단으로 오르는 일은 늘 갑작스러워요. 128번째 계단을 오를 때까지는 과정이예요.
질문자: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충격이나 놀라움이 있겠군요?
라메쉬: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충격과 놀라움은 과정이 진행된다는 표시지요. 이렇게 놀라는 것은 마음이 수평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과정이 꼭 그렇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죠. 소립자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말하듯이 실제 삶에서도 과정 중에 비약적인 도약이 자주 일어나요. 비약적인 도약이 이전에 일어난 도약보다 크다면 놀랄 수 있겠죠. 하지만 놀라움이나 충격이 꼭 일어나야 하는 현상은 아니예요.
질문자: 찾는 이가 불행해진다고 말씀하시던데, 저는 불행하다는 느낌이 안드는데요.
라메쉬: 찾는 이가 불행해질 때는 찾음이 어느 정도 강렬해질 때예요. 찾음이 강렬해지지 않아도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날 수 있어요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단계에서 태어나는 몸-마음 유기체도 있지요. 이때는 전혀 불행하지도 않고 전혀 강렬하지도 않아요. 깨달음을 영적인 도표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 영적인 도표에서 각각의 몸-마음은 하나의 점으로 나타납니다. 정체성이 계속되는 한은 물질적인 부와 행복 이외에는 찾고자 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기 전까지는 영적 찾음에 전혀 관심이 없지요. 우리는 자신이 도표 위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몰라요. 당신이 어떤 한 점에 해당된다고 해서 백만 번의 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예요. 어느 순간, 어디에서나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날 수 있어요.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나는 일은 당신의 손에 달려있지 않아요. 그냥 일어날 수만 있어요. 그럼 우리가 자신의 점이 도표 위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모른다면, 신경쓸 까닭이 있겠어요? 당신은 신을 찾을 수 없어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곳에서 신이 당신을 찾을 겁니다.
-- 카르마 --
질문자: 선생님께서 예전에 몸-마음을 통해서 행동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참의식에 의해서 생각이 일어나고 몸-마음이 행동을 해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몸-마음을 통해서 결과가 일어나지요. 이 모두가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어떤 것도 현상세계를 초월하지 않아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어떤 것도 현상세계를 초월하지 않아요.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하나의 객체인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이예요. 참의식이 어떤 행동을 만들어 내려면 객체가 필요해요. 그래서 참의식은 그런 행동을 정확히 만들어내는 특정한 성격들을 가지는 객체를 만들어내지요. 특정 목적으로 제작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고하면 값을 입력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지요. 자신이 만든 컴퓨터를 잘 아는 참의식은 생각이라는 형태로 입력 값을 넣고 어떤 행동이 나올지 정확히 알아요. 그리고 그런 행동은 다른 수십 억 사람의 행동과 함께 그 순간에 일어나는 전체 작용을 이루게 되지요.
질문자: 그러면 그게 카르마네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카르마란 행동을 말해요. 카르마는 인과관계를 뜻하지요. 카르마는 개인이라는 행위자, 즉 개별 개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행위자로서의 개별 개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질문자: 선생님 말씀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천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는 이론 자체가 거짓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라메쉬: 당신이 하는 말은 카르마가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바탕을 둔다는 말이예요. 제 말은, 나쁜 행위가 그냥 일어날 수 있는 것과 마찮가지로 좋은 행위도 그냥 일어날 수만 있어요. 누구의 행위입니까? 좋은 행위도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고 나쁜행위도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 모두가 함께 그 순간 일어나는 참전체성의 작용을 이루어요. 오직 인간만이 "좋은 행위다. 나쁜 행위다."라고 말해요. 이 삶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타고난 성격에 따라서 움직이는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참의식이 실행하는 행위예요. 사이코패스는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예요. 누가 사이코패스를 만들었겠어요? 사이코패스도 참전체성이 창조한 현상세계의 일부예요. 오마르 하이얌(Omar Khayam,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천문학자이며 수학자다 - 옮긴이)이 쓴 아름다운 시가 있어요. 흠이 있는 도자기의 입장에서 이렇게 썼어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긴 내 모습 때문에 나를 꺼린다. 도공이 나를 빚을 때 손이 떨렸던 것일까?" 사이코패스가 사이코패스가 되겠다고 선택했겠어요? 성자가 성자가 되겠다고 선택했겠어요?
질문자: 과거 삶들에서 정해진 과거의 카르마죠.
라메쉬: 과거 삶들은 맞습니다만, "누구의" 삶들이란 말입니까?
질문자: 다시 태어나는 어떤 것의 삶이겠죠.
라메쉬: 어떤 행동이 일어나요. 그 행동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지요. 만일 그 결과가 좋아야 한다면 좋은 행동을 일어나게 하는 특징들을 가진 몸-마음 유기체가 창조되요. 만일 그 결과로 인해 나쁜 행동이 일어나야 한다면 참의식은 뭔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유기체를 창조할 것이고 이런 특징이 사이코패스로 불릴 수도 있겠죠.
질문자: 그러면 연속성을 갖는 개인적인 것은 없군요?
라메쉬: 연속성은 분명히 있지만 개인적인 것은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예요. 과정 전체가 비개인적이예요. 인과 관계인 카르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카르마와 관련된 개인이란 없어요. 개별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자: 궁극적으로 개인이란 없네요. 궁극적으로 이것이 지고의 진리인가요?
라메쉬: 부인, 그게 진리예요. 다만, 진리에는 등급이 없어요. 진리는 진리죠. 어떤 개인도 죄를 지은 사람은 없어요. 특정한 행동이 특정한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면서 어떤 유기체는 노벨상을 받고 어떤 유기체는 벌을 받겠지만, 독립된 개별 개체란 없어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예전에 현자는 이런 행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행동이 무효화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받아들임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고 행동은 무효화되지요.
질문자: 좋아요. 그럼 그때 하신 말씀은, 카르마를 초월한다는 뜻인가요?
라메쉬: 현자에게는 카르마가 없는데, 이것은 사이코패스에게도 카르마가 없는 것과 똑 같아요. 카르마를 너무 개인과 연관지어와서 카르마의 뜻이 완전히 왜곡되었어요. 모든 것을 비개인적으로 보면 문제가 없어요. 비개인적인 것을 개인과 연관 지으면 문제는 끊이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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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알코올 중독자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때 의지력은 어떻게 설명하시나요?
라메쉬: 알코올 중독자가 자신의 의지로 술을 끊으려고 100번을 시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질문자: 왜 꼭 그 알코올 중독자만 수많은 실패 끝에 마침내 성공하나요?
라메쉬: 그게 제말의 요점이예요. 같은 알코올 중독자가 같은 의지력으로 시도했는데 99번은 실패하고 100번째에 성공했어요.
질문자: 그 사람이 준비가 됐기 때문인가요?
라메쉬: 그 유기체가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거죠.
-- 환생 --
질문자: 정체성에서 탈피하는 일이 여러 생을 거쳐서 일어날 거라고 말씀하셨죠?
라메쉬: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실망하시기 전에, 당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과 오직 특정 유기체들만이 이런 공부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영적 진화가 이 유기체에 갑자기 이 정도 단계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이 정도 수준의 영적 진화가 이 유기체에서 일어나려면 분명히 영적 진화의 과정이 많은 유기체의 삶을 통해서 진행되어 왔어야 해요.
질문자: 헷갈리네요. 어젯밤에는 에고가 몸과 함께 죽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렇다면 한 육체에서 다음 육체로 옮겨가는 에고가 아닌 뭔가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있죠! 하지만 에고는 아니죠. 바로 참의식입니다. 새로운 유기체가 창조될 때마다 그 분리된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바로 참의식이예요.
질문자: 하지만 한 유기체에서 그 다음 유기체로 전달되는 어떤 유사성이나 뭔가가 있지요?
라메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개념이예요. 육체가 죽을 때 생각과 기억, 인상들의 묶음이 모두 참의식이라는 저수지 속으로 들어가요. 이런 생각과 기억, 인상들의 결과에 따라서 일어나는 특정 행동이나 일들이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려면 새로운 유기체들이 필요하지요. 필요한 유기체들이 창조되면서 그런 일들을 일으키는 행위들이 일어날 수 있게 되지요. 유기체에 벌이나 주고 보상이나 하려고 행위가 생겨나는 게 아니예요. 유기체는 자력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비활성 물체이고 감지력이 생기면서 갑자기 의식을 갖게 될 뿐이예요.(20.1sa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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