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한다(32)

2021. 1. 29. 21:22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기억하고 얽매이고 -- 

 

질문자: 제가 생각하고 있을 때는 생각과 완전히 하나가 되요. 목격자가 없어요. 꼬리를 무는 생각이 지나가고 나서야 전 그 생각들을 기억으로 관찰하고 판단해요. 

 

라메쉬: 그래서 이것을 지적으로라도 이해하면 마음이 얽매여 왔다는 사실을 문득 깨우치는 시점이 있을 겁니다. 그 순간 얽매임이 잘려나가요. 잘려나가지 않는다면 얽매임은 계속되겠죠. 이런 이해가 없거나 이해가 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얽매임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오직 아주 드문 경우에만 마음이 정말 지치고 마음이 정말 텅 비는 순간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인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개념화하고 관념을 만드는 일만 해요. 하지만 이런 이해가 일어나면 얽매임은 어느정도 수준에서 불현듯 잘려나가요. 

 

-- 영적 진화 -- 

 

질문자: "영적 진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시간과의 연관성을 전제하는 것인데요. 

 

라메쉬: 물론 그렇지요. 과정 전체가 시공간의 현상세계 안에 있지요. 

 

질문자: 무엇이 시간에 얽힙니까? 몸-마음 구조체인가요? 

 

라메쉬: 아, 아니죠. 시공간에 얽혀있는 것은 동일시된 참의식인데 참의식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개별 유기체와 동일시했어요. 

 

질문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라메쉬: 이런 릴라, 이런 놀이, 이런 우주적 꿈이 일어날 수 있게 하려고죠. 이런 정체성을 일으키는 과정은 계속되고 있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들이, 새로운 인간들이 창조되고 이들 안에 정체성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정체성은 영적 진화의 과정으로 이어져요. 어느 순간 마음이 내면을 향하면서 탈정체성의 과정이 시작되지요. 이런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수 많은 생을 거쳐서 일어나요. 정체성이 일어나고 마음이 내면으로 향한 후에 탈정체성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 놀이의 전체 과정이예요. 이 모두가 개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다만 이런 개념이 궁극적 이해를 일으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질문자: 그럼, 진화라는 단어는 동일시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군요?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도대체 개념이 왜 필요한가요? 

 

라메쉬: 이런 정체성을 통해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개인이라는 개념이 일어나는 순간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고 비개인성이 받아들여지면 개인이나 신이라는 의문이 일어나기나 하겠어요? 

 

질문자: 내면을 향하는 것이 에고를 무시한다는 뜻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내면을 향하는 일은 그냥 일어날 수 있을 뿐이예요. 내면을 향하는 것은 바로 영적 진화의 과정이예요. 모든 것은 진화해요. 물리적 진화가 있고 음악의 진화가 있고 예술의 진화가 있고 과학의 진화가 있듯이 영적 진화도 있지요. 처음 정체성이 일어나고 수천의 몸-마음 유기체를 거치면서 영적 진화는 계속됩니다. 제 말은, 십만이 됐든, 백만이 됐든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이 과정이 일련의 몸-마음 유기체들을 거쳐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 몸-마음 유기체에 이르러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는 일이 일어나겠지요. 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뭔가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는 확실한 계기가 생겨요. 더욱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바라면서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대신에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고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싶어하면서 "나는 누구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인생의 의미가 뭐지?"라고 물어요. 그러다 정체성에서 탈피하는 과정이 시작되지요.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영적 찾음은 마음이 내면을 향하고 개인이 찾음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요. 그리고 탈정체성의 과정인 이런 찾음은 다양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진행되지요. 이런 저런 여러가지 찾음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엄청난 좌절을 겪는데, 이런 과정은 마침내 어떤 "개인"도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이해하면서 멈춰요. 깨달음은 비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한 객체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어요. 어떤 일이든지 일어나려면 객체가 꼭 필요해요. 그래서 깨달음이 막 일어나려고 할 때 이런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몸-마음 유기체가 이 진화의 과정에서 창조됩니다. 이 몸-마음 유기체는 깨달음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되도록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기질적인 특징들을 가지죠. 그리고 이런 몸-마음 유기체 자체가 진화의 과정이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음이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이 이해가 시작됩니다. 찾는 이가, 즉 개인으로서의 찾는 이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예요. 하지만 이렇게 받아들이는 일은 이원성 안에서 진행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획기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예요. 이때 "놓아 보내는 일"이 일어나고 엄청난 해방감이 일어나요.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객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뭘 찾고 있는가?" 그렇게 이런 "놓아 보내는 일"이 일어나고 몸-마음 유기체와 동일시하던 정체성, 바로 이 "내"가 약해져요. 그러다 과정 속에서 비약적 도약이 일어납니다. 깨달음 바로 직전에 일어나는 궁극의 비약적인 도약은 이렇습니다. 더는 찾음이 없고 더는 깨달음이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든지 신경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찾는 자는 몸-마음 유기체가 아니고 "나"였기 때문이예요. 몸-마음 유기체 그 자체는 비활성 물체일 뿐이지요. 하지만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필요해요. 

 

질문자: 찾는 이가 있는 한은 "나"는 "나"죠. 그렇죠?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그렇죠. 그래서 찾음이 사라질 때 그 "나"라는 찾는 자도 사라져요. 

 

질문자: 그러면 이 "내"가 진화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핵심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그 "내"가 진화되는 것이지, '이' "내"가 아니죠. 

 

질문자: 그렇죠. 제 말은 집합적인 "나"들 말입니다. 

 

라메쉬: 그래요. 제가 말했듯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나"는 상대성 이론을 위해서 진화되었어요. 하지만 상대성 이론까지만 이었어요. 과학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 다른 몸-마음이 창조 되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뒤 따라서 발전한 양자이론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 되어 있었어요.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의 원리는 "신이 세상을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어요. 아인슈타인은 "신이 세상을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어요. 닐스 보어는 이렇게 맞받았죠. "신은 세상을 놓고서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아요. 우리가 신이 세상을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신이 가진 그 모든 정보가 없기 때문이죠!"

 

질문자: 제 생각에 닐스 보어는 "알버트, 감히 당신이 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고 여기나?"라고 말한 것 같은데요. 

 

라메쉬: 그렇죠. 그랬을 수도 있어요. 

 

질문자: 이 모든 진화에 계획이나 궁극적 목표나 최종 결론이 있나요? 

 

라메쉬: 최종 목표는 없어요. 참전체성의 비개인적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죠. 요즘 과학자들은 이것을 "자기 발생적" 과정이라고 불러요. 저는 잠재적 에너지가 자신을 방출한다라는 말을 더 선호해요. 여기서 의문이 일어나죠. "왜 에너지가 자신을 활성화했지? 왜 이런 현상세계가 있어야 하지?" 한 가지 답은 "왜 아닌가?"예요. 또 다른 한 가지 접근 방법은 "잠재적인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언젠가 자신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이 아니죠. 죽은 것이죠." 

 

질문자: 책 '아이 앰 댓'과 선생님의 책들을 읽다 보니 선생님과 마하라지 두 분 모두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평범하고 이원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분들 같아요. 

 

라메쉬: 물론이죠!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차이는 있어요. 마하라지께서는 그분의 구루께서 "이 모두가 꿈이고 비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너는 참전체성이 기능하는데 쓰이는 도구일뿐이다.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너'는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처음 듣고 바로 받아들이셨어요. 그 말씀에 의문이 없었어요. 이런 일은 극히 드물죠. 제 경우에는 이 정도까지의 수용성은 없었지요. 

 

질문자: 즉각적으로요? 

 

라메쉬: 라마나 마하리쉬와 마하라지의 경우에는 즉각적이었죠.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하는 말인데,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여러 경우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 있어요. 사람들이 아는 것과 실재로 일어나는 일은 전혀 상관이 없어요. 어떤 한 유기체에 일어난 깨달음의 경우가 이런저런 이유들로 널리 알려지게 되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일들이 아주 쉽게 흘러가요. 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요. 그 사실을 알지만 신경쓰지 않는데, 더는 "내"가 전혀 없기 때문이예요. 이 사람들은 어떤 명성이나 부나, 이런 어떤 것에도 신경쓰지 않아요. 제 경우에는 과정이 마하라지 만큼 빠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좀더 부드럽고 다른 경우들 보다 단순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처음부터 이 모두가 꿈이고 그래서 살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과정을 재촉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이런 직관적인 느낌이 늘 있었어요. 

 

 

-----"나"의 소멸 -- 

 

질문자: 제 경험상 보면 마음 속 깊이 "내"가 있다는 밀접한 느낌이 있는데, 이 느낌이 사라지나요? 

 

라메쉬: 물론 사라지지만, 누가 있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합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물론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것은 "나" 그 자신입니다. 누가 있어 "내"가 사라진 것을 알겠어요?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예요. 

 

질문자: 그러면 "내"가 왔다갔다 하다가 사라지는군요? 

 

라메쉬: 그렇죠! "내"가 왔다 갔다하는 동안 목격하는 상태가 일어나요. "나"는 마음인데, 마음은 자신을 지켜볼 수가 없어요. 마음이 자기 자신이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저것은 어떻다."라며 늘 비교하고 판단할 거예요. 이것은 목격이 아니죠. 목격이란 일어나는 사건이나 생각이나 감정을 그냥 지켜보는 것일 뿐이며 비교하거나 판단하는 일이 전혀 없이 그냥 지켜볼뿐이지요. 목격은 비개인적이고 수직적이기 때문에 수평적인 얽매임을 잘라내요. "내"가 작아지면서 목격은 좀더 자주 오랫동안 일어날 겁니다. 어느새 일이나 생각에 반응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와 행복이 있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는 없어요. "내"가 갑자기 "아, 내가 없어졌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누가 있어 사라졌다고 말하겠습니까? 

 

질문자: 그렇지만 사라지기는 하는군요? 

 

라메쉬: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이 사라지기를 '원하면' 사라지지 않아요. (19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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