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6. 21:24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경청술(傾聽術) --
질문자: 목격은 어떻게 하나요?
라메쉬: 질문이 맞지 않아요. 목격에서는 "당신"이란 전혀 없어요. 이것이 기본이죠. 오직 얽매일 때만 "당신"이 있지, 목격에서는 없어요.
질문자: 하지만 전 얽매이지 않을 거예요.
라메쉬: 바로 그거죠. 당신은 깨달음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나는 찾는 사람이다. 나는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얽매여서는 안된다."라고 말해요. 하지만 이것 자체가 얽매임이죠.
질문자: 전 선생님 말씀을 이렇게 알아들었는데, 모든 것이 하나의 문인데, "내가 이것을 해야 하나? 저것을 해야 하나?"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 순간에 준비가 되어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인 것같네요.
라메쉬: 그렇죠. 자비의 문은 활짝 열려있어요.
질문자: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제가 여기 있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여기 말고 다른 어디에도 절대 있을 수가 없어요.
라메쉬: 저도 마찬가지죠! (웃음) 요점은 당신이 여기 있고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이예요. 어느 정도 경청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완전하고 기본적인 경청이 일어난다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수준의 경청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겁니다.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 ~ 1986)가 봄(David Bohm, 1917 ~ 1992, 양자 이론을 연구한 미국의 물리학자 - 옮긴이) 교수와 나누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크리슈나무르티가 처음에 한 말 중에서 그냥 즉흥적으로 한 말이 "나는 완전히 주의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당신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어서 시작하세요."라는 말이었어요. 이것이 심장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문이 활짝 열린 경청이예요. 그리고 경청하는 일이 세뇌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요. 이런 까닭에 경전에서는 경청한 것을 명상해야 한다고 말해요. 첫 번째는 쉬라바나(shravana) 또는 경청하는 일이예요. 그 다음은 마나나(manana), 즉 경청한 것에 대해 명상하고 심사숙고하며 동전이 진짜인지 팅 쳐서 소리로 알아보는 일이예요. 그러다가 경청한 것이 당신의 심장을 울리면 그때는 그냥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자신의 구루와 문제를 해결하면 됩니다. 일단 어려움이 해결되면 마지막 단계는 그것과 함께 머무르는 니디드호야사나(nididhyasana)입니다. 경청의 깊이가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토론을 끝내고 가실 때 여기 어떤 것도 마음에 담고 가시지 않으시죠? 오늘 토론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죠?
라메쉬: 그걸로 끝이죠.
질문자: 그럼 저희도 그렇게 해야하나요?
라메쉬: 그렇게 해야죠. 이건 아주 중요해요. 여기서 들은 것을 붙들고 있으면 이렇게 흡수된 경청한 것이 저절로 이해로 변할 기회를 얻지 못해요. 이런 이해는 직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이해여야만 해요. 그리고 경청한 것은 지능이 침범하지 않아야만 이런 이해로 변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지능이 침범한다면 이렇게 침범하는 것도 참전체성 기능의 일부예요. 직관적인 이해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걸려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여기를 떠날 때는 여기서 들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네요. 이것이 좀 전에 요약해주신 경청의 세 단계 중에 어디에 해당되나요?
라메쉬: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이런 경청이 스스로 변하면서 이해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의문이 남게될 겁니다. 경청한 것이 완전한 이해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경청하는 것 자체가 지능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예요. '경청-이해'는 가만히 남겨둘수록 더 깊어질 겁니다. 경청한 것이 스스로 어느 정도 이해로 바뀌고 나면 이해한 것을 지능으로 심사숙고 해야 하고 의도적으로 명상해야 해요.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지능으로 그런 의심들을 명상해야 합니다. 아마 이것을 당신이 묻는 것같군요. 전통적으로 구분하는 관념적이 차이는, 처음에는 경청하고 두 번째로 듣고 이해한 것에 대해 명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어난 의심들이 해결되고 나면 끝으로 궁극적인 이해로 자리잡게 되지요.
질문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기서 들은 것을 생각해야 하나요? 안 해야 하나요?
라메쉬: 그렇게 생각하면 경청한 것이 바로 깊어지는 것을 방해하게 되요.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내일이나 모래 즈음에 명상해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경청하는 일이 세뇌시키는 일과 뭐가 다르겠어요?
질문자: 정확히 맞는 말씀입니다.
라메쉬: 어떤 식으로든 세뇌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요.
질문자: 생각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경청해서 생겨난 실체가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죠.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경청한 것이 완전하지 않지요. 자연스러운 일이예요.
질문자: 그리고 저희는 실수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도 괜찮나요?
라메쉬: 그럼요. 물론이죠. 물론이고 말고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예요. 오직 아주 드문 경우에만 이렇게 경청한 것이 심장을 파고 들어가서 이해가 되요. 대부분은 이런 과정이 일어나지요. 완전히 경청하고 경청한 것을 명상하고 이해로 자리잡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
-- 명상 --
질문자: 명상을 하고 있으면 즐거움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경험이지 않나요?
라메쉬: 즐거움은 나중에 일어나죠. 그 경험에 관해서 생각할 때나 그 상태가 좋았다고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질문자: 그러면 그것도 얽매임인가요? 즐거움이요?
라메쉬: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은 얽매임이 아니예요. 즐거움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 얽매임이죠.
질문자: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내"가 사라지고 '참나'만 남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그런데 냄새는 맡을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라메쉬: 그냥 의식이 있고 감지력도 있는데 누군가가 요리를 하고 있다는 말일 뿐이예요. 의식이 있는 까닭은 감지력이 각각의 감각들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식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면 "나"도 사라져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참의식은 존재하지만 현상세계는 기능을 하지 않지요. 이런 의미에서 깊은 명상은 깊은 잠과 비슷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도교 스승들 가운데 한 명인 장자(莊子, BC396 ~ BC289년 추정)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인의 지식은 완벽했고, 너무나 완벽해서 처음에 고대인들은 사물이 있는지 몰랐다. 이것이 가장 완벽한 지식이다.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다. 그런 뒤에 그들은 사물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사물을 분별하지는 않았다. 사물들을 서로 절대 비교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 그들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하지만, 아직 판단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판단하는데 이르렀을 때, '도(道)'는 사라졌다." "고대인의 지식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들은 사물이 있는지 몰랐다." 이것이 우리가 고요히 앉아 있을 때, 두 눈을 감고 아무런 목적없이 고요히 앉아 있을 때 생기는 바로 그 지식입니다. 이런 일은 꽤 자주 저절로 일어나지요. 그리고 그런 순간들 속에 장자가 말하는 완벽한 지식이 있어요. 그 다음에 인식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이런 인식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면 비교하거나 판단할 일이 없어요. 이 고요함 속에는 자신을 찾는 이로 만들었던 바로 그 힘이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심장뿐입니다. 오직 마음이 고요할 때, 마음이 개념화하지 않을 때, 마음이 형상을 만들지 않고 심장이 열려서 수용적일 때, 바로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나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사라지고 주체적 참실재, 즉 "참나"가 밀려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길 때마다 어떤 동기나 목적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고요히 앉아 있는 일 밖에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특정한 시간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고, 십오 분 아니면 삼십 분 아니면 두 시간 반을 앉아 있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없어요. 등을 반듯이 펴고 매 2분마다 등이 제대로 펴져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어요. 마음에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이런 순간에는 당신이 참실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참실재가 당신을 찾습니다. 잠시만 그냥 고요히 앉아 있어 보세요.
질문자: 이런 명상이 에고를 강화시키지 않나요?
라메쉬: 명상을 의도적으로 할 때나 명상을 하는 "내"가 있을 때는 그래요. 명상이 그냥 일어날 때, 명상을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닐 때가 에고가 부재하는 진정한 명상이예요. 명상을 하는 "내"가 없어요. 에고가 있으면 행동에 따른 결과를 기대하는 "내"가 있습니다. 저는 명상이라는 수행을 반대하지 않아요. 제 말은 명상을 전체적인 안목에서 봐야한다는 것뿐이예요.
질문자: 종종 에고는 명상에 저항하는 것 같습니다.
라메쉬: 물론 그렇지요. 진정한 명상이란 에고의 소멸을 뜻해요. 에고는 소멸되기를 원치 않아요. 명상이 일어나면 마음은 즉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뭔가 쓸모있는 일을 해."라고 말하죠.
질문자: 명상처럼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기술들이 있기는 하지만, 고요한 마음은 결코 아무것도 안 받아들이죠. 마음은 완전히 텅 빌 수가 있고 절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죠.
라메쉬: 아니죠. 마음을 텅비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텅비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질문자: 전 명상 중에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마음이 텅비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텅 빔이 맞아요.
질문자: 하지만 아무것도 고요함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메쉬: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마음이 텅 비기 시작하는 일은 적어도 어떤 순간들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그런 순간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요.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텅비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이렇게 텅 비는 일이 지속되는 경우가 늘어날 겁니다. 요가나 명상과 같은 특정한 기술로 마음이 텅 비는 상태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얻은 것은 모두 잃어버리기 쉬워요. 깊은 이해의 결과로 일어나는 마음의 침묵이 바로 자연스럽고 자연 발생적인 명상이죠. 이런 명상은 그냥 일어납니다. 제가 처음 마하라지를 뵈었을 때 마하라지께서 제게 "명상을 하나?"라고 물으셨어요. 저는 "예. 저의 예전 구루께서 하루에 적어도 30분씩은 명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앉아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은퇴를 해서 30분씩 명상을 합니다."라고 대답했어요. 6개월 뒤에 마하라지께서 "명상은 어떻게 되어가나?"라고 제게 물으셨어요. 제가 "마하라지 선생님, 명상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물어보시니까 말씀드리는데, 죄송하지만 예전만큼 앉아서 명상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혔습니다. "제가 명상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때 꽤 자주 명상이 일어납니다." 저는 마하라지께서 제게 소리를 지르실줄 알았는데, 마하라지께서는 "훌륭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고는 마하라지께서 영적 과정에서 명상이 멈추고 의도적으로 명상하려 하지 않고 이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명상이 멈추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않으면 아주 큰 진전이라고 설명해주셨어요.
질문자: 저는 명상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거나 명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명상은 제게 아주 큰 기쁨이자 평화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명상에 중독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메쉬: 그렇기 때문에 제가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친구와 함께 골프를 시작했어요. 우리 둘 다 수업을 받았어요. 그 친구는 골프의 기교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러다 골프를 치기 시작했는데, 이 친구는 강사가 가르쳐준 것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까 골프를 잘 못 쳤어요. 얼마 안 가서 골프치기를 그만 두고 계속 연습만 하더군요. 연습하는 게 좋다나요. 골프 공을 한 동이 가져와서 계속 치기만 했어요. 하루는 친구가 말하더군요. "좀 느는 것 같네. 공이 좀 더 멀리 똑 바로 날아간다네." 그래서 제가 물었죠. "같이가서 골프 한 경기하지 않겠나?"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사양하겠네. 나는 연습하는 게 더 좋아." 어떤 경기든지 기교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으면 정말 최선을 다 할 수가 있어요. 자연스러움이 제일 중요하죠.
질문자: 어떤 일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밥 바커라는 게임 쇼 진행자가 있는데, 이 사람 부인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어요. 부인은 무슨 일하기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진공 청소기로 집 청소하기를 좋아해요. 전 카펫이 정말 좋거든요."라고 답하더군요. 전 그 말이 정말 바보같은 대답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 주에 제가 진공 청소기로 카펫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그 일이 아주 특별하고 아름답고 또 유익하게 느껴졌어요. 몇시간을 걸쳐서 얼룩 하나 하나를 지우고 먼지를 다 빨아들여서 쓰레기 통에 넣은 것을 생각하니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그냥 진공 청소기 하나 가지고 제가 여전히 들떠 있네요. 바커 부인에게서 제가 배우게 될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 경험을 하고나서 몇 년전에 한 스승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에 감사하게 되었어요.
라메쉬: 어떤 말이, 어떤 주제가 언제 자신에게 영향을 줄지는 절대 알 수가 없지요. 당신에게 일어난 그런 일을 저는 명상이 일어난다고 말해요. 명상이란 단어를 가지고 사람들은 너무 유난을 떨어요. 명상이 뭡니까? 어떤 일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일어날 때가 바로 명상이예요. 앉아서 등이 반듯이 펴져있는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죠. 이것은 명상이 아니예요. 그리고 이런 까닭에 명상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이 주는 선물입니다. (22-2jung)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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