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 21:55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生無生相, 生照一同
欲得心淨, 無心用功
縱橫無照, 最爲微妙
如法無知, 無知知要
생(生)이라는 상(相)이든 무생(無生)이라는 상이든
조(照)함을 생함은 (잘못됨이) 마찬가지이나니
마음 청정함 얻고자 하거든
마음을 억지로 부리는 행을 하지 말라
종횡으로(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나) 조(照)함이 없는 행이
가장 미묘하나니
여법하게(心性의 뜻에 따라) 지(知)하는 바 없어야 하리니
지(知)함 없이 지(知)함이 요체이다.
[해설]
무생(無生)이라고 설하니 자칫 무생이라는 상(法相)을 붙잡고 관(觀)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일체법이 무생이라 하였는데 무생(無生)이라는 상(相)을 일으킨다면
생(生)이 있게 되어 무생의 본의에 어긋난다.
그래서 <능가경<(7권본,대승입능가경)에 설한다.
분별을 분별함은 (分別於分別)
이견(二見,분별함과 분별되는 것의 二法을 見하게 됨)이어서 열반이 아니니(是二法涅槃)
만약 무생(無生)을 종(宗)으로 세운다면(若立無生宗)
곧 환법(幻法)에 떨어지리(則壞於幻法)
일체법이 무생(無生)이라 함도 하나의 분별이다.
그런데 무생이라 하였으니 그 뜻에 따른다면 당연히 일체법에 대한 분별을 떠나야 한다.
즉 무생이라는 뜻은 일체의 분별을 떠나라는 것이다.
일체의 분볋을 떠나는 것이 곧 무생의 뜻을 올바로 행함이다.
그런데 오히려 무생이라는 상을 관하거나 붙잡고 잇으면 이는 또 다른 새 분별을 하고 있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무생이라는 법을 세워 지니고자 한다면 이는 환법(幻法)을 붙잡고 있는 것이 된다.
유심(唯心)이고 일심(一心)인지라, 무생이라는 이법(理法)은 <능가경>에서 자주 강조하는 요의(要義)이다.
또 같은 <게송품(偈頌品)>에 설한다.
만약 불생론(不生論) 세운다면(若立不生論)
이 인(因)으로 다시 생(生)을 (不生이 生함) 생하게 되는 것이니,(是因生復生)
이와 같이 무생 세우는 것은(如是立無生)
오직 허망한 설일 뿐이니라,(惟是虛言說)
불생(不生,無生)이라는 법을 세우면
이로 인해 다시 무생(無生)이라는 법이 생(生)하였다는 것을 생하게 한 셈이 되어 버린다.
미망의 중첩일 뿐이다.
그래서 본문에 생상(生相)이든 무생상(無生相)이든 잘못됨은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무생이라 하였지만 그 뜻에 의해 일체의 분별로부터 떠날 뿐,
마음에서 힘을 들여 어떠한 상념이나 법상을 일부러 일으키는 행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종횡으로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나) 억지로 힘들여 조(照)하는 행(行)을 함이 없다.
이 행이야말로 가장 수승하고 미묘하다.
심성(心性)이 공적(空寂)하고 무생이라 그 심성의 뜻에 따라 여법(如法)하게 지(知)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심성이 바로 지(知)함이 없는 것임을 지(知)하여 지(知)함 없이 지(知)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의 요체다.
-박건주 역주 <心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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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하는 것이든,아무 것도 없는 무(無)이든 간에 모양이 생긴 것이므로
비춤(주시)이 일어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라네.
生無生相 生照一同
깨끗한 마음을 얻고자 하려면
생각이 전혀 없는 무심만이 쓸모가 있다네.
欲得心淨 無心用功
이것 저것 비추어 보는 것이 없어져야
가장 미세한 경지이고, 가장 신묘한 깨침이니,
從橫無照 最爲微妙
만법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앎이 없는 것이며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 앎의 요체이니라.
知法無知 無知知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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