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 21:39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又問, "若如此者, 道應是有, 我應是無, 豈非有無之견?"
答曰, "道非是有, 有非是無, 何以故, 龜非先無 今有故, 不可言有,
我非先有, 今無故, 不可言無, "
또 묻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도는 마땅히 있다 할 것이고,
'아(我)'라는 것은 마땅히 없다 할 것이다.
만약 이렇게 유와 무가 있는 것이라면 어찌 유와 무의 이견(二見)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답한다.
"도는 있는 것이 아니고, '아(我)'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거북은 이전에 없었다가 지금 있게 된 것이 아니니 있다 할 수 없고,
털은 이전에 있다가 지금 없게 된 것이 아닌 까닭에 없다 할 수 없다.
도와 아(我)의 있고 없음도 이 비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해설]
도를 이룬다고 하지만 도가 언제부터 새로 있게 된 것이 아니어서
(본문에서 '거북은 이전에 없었다가 지금 있게 된 것이 아님) 있다는 분별을 할 수 없다.
'있다'는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 있게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도(거북)는 언제부터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니다.
거북의 털은 언제부터 있던 것이 갑자기 없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위와 같은 이유로 없다는 생각도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거북의) 털(我)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또한 아(我)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지만
그 실재하지 않는 아(我)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我) 그대로 실재하지 않는 아(我)인 까닭이다.
실재하지 않는 아(我)란 곧 비상(非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만약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알면 곧 여래를 봄이다."고 하였다.
본래 생기지 않았던 아(我)인 까닭에 언제 없어진 것이 아니니 아가 없다는 상(相)도 낼 수 없다.
그래서 유(有)와 무(無)의 견(見)에 머무름이 없다.
[본문]
又問曰, " 夫道者 爲當一人得之, 爲當衆人得之, 爲當各自有之, 爲當總共有之,
爲當本來有之, 爲當從修成也?"
答曰, "皆不如汝所說, 何以故, 若一人得者, 道不遍, 若有衆人得者, 道卽有窮,
若各有者, 道卽有數, 若總共有者, 方便卽空, 若本來有者, 萬行虛設, 若修成得子, 造作非眞."
또 묻는다.
"무릇 도란 1인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각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본래 있는 것입니까,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입니까?"
답한다.
"모두 네가 한 말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1인만이 얻는 것이라면,
도란 두루 어디에나 있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여러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란 다함이 있을 것이다.
만약 각자 따로 따로 얻는 것이라면
도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것이다.
만약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방편(가르침)이 쓸모없는 것일 것이다.
만약 본래 있는 것이라면
만행(萬行)은 쓸모없이 시설된 것일 것이다.
만약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면
조작된 것이 되니 진(眞)이 아니게 된다."
[해설]
도란 처소가 없되 없는 곳이 없다.
언제부터 있게 된 것도 아니되 없지 아니하고,
형상이 없되 형상을 떠나 어디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당처(當處)에 항상한지라 얻어지는 대상이 아니고,
도를 성취하였다 하나 얻은 바가 없다.
조작, 유위를 떠난 도가 조작 유위의 어떠한 수행을 통해서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건주 역주 <절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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