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25)

2021. 1. 5. 23:04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에고는 하나의 형상(몸)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고, 그 형상을 붙듦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관을 통해) 형상들을 자신이 먹고 살 음식으로 취함으로써 점점 더 커집니다.

'나'와 동일시하던 한 형상을 떠나면 또 다른 형상을 '나'로써 붙듭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찾아볼 때만 그것은 소멸하고 사라집니다. 

'나는 몸이다'라는 형상으로 일어나는 이 에고는 이처럼 형상이 없고, 상상적이고, 공허한 유령같은 겉모습이며. 

아런 실재적 존재성이 없습니다. "라고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나서 그 가공적인 '나'의 구원을 얻고 싶다면,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요가의 길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수행 자체가 그 존재하지 않는 에고를 살아있게 하는 수단이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소멸할 수 있습니까? 자아탐구 외의 다른 수행을 하려면 마음(개아)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마음이 없이 어떻게 그런 수행들을 할수 있겠습니까? 자기 탐구 아닌 어떤 수행으로 에고를 소멸하려고 하는 것은 도둑이 경찰관으로 변장하여 바로 자기 자신인 도둑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탐구만이 에고(마음 혹은 개아)는 어떤 존재성도 없다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

그러니 여러분이 아직 면밀한 탐색으로 그것의 진리를 알아내지 못한 이 에고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것의 존재성을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부인하고, 어떻게 혹은 무엇에서(어디에서) 그것이 일어나는지 주시함으로써 그것을 뿌리 뽑고 불태워 버리십시오 ! 

그러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여 알아내기도 전에 (즉,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내기 전에)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하나의 족쇄가 되어 실재하지 않는 많은 장애를 만들어 내개ㅔ 될 것이고, 그런 다음 여러분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앞서 말한 불필요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 라고 스리 바가반은 말한다. 

 

우리가 먼저 진아 아닌 것을 진아로 받아들이게 되면, 

거기서 부터 또 다른 어떤 실재와 결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요가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이런 식으로 뭔가를 면밀히 탐색해 보기 전에 잘못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무지이다!

그 자체가 속박이다 !

그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떤 것 - 실은 존재하지 않는 속박 - 을 먼저 받아들이고 나서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불행을 제거하려고 분투하기 보다, " 그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나라고 하는 '그것'은 누구인가? 를 탐구하여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더 현명하고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업(karmas), 비헌신, 비합일,무지와 같은 결함들은 누구에게 있는가?"

라는 탐구 자체가 행위, 헌신, 합일, 지(知)라네 ! (어째서 그런가?)

이같이 탐구하면 '나'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이런 결함들도 존재하지 않네.

진리는, 우리가 (결함없는) 진아로 남아 있다는 것이네.

                                              - <실재사십송-보유> 제 14연.

 

만일 우리가 "이 네 가지 결함, 즉 무욕업을 행하지 않는 결함, 신을 사랑하지 않는 결함(비헌신), 신과 분리되어 있느 결함(비합일), 신을 모르는 결함(무지)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고 묻는 다면, 그 답변은 "나에게"일 것이다. 

그럴 때 " 이 나는 누구인가? "라고 탐구하면 그 자체가 참으로 행위 요가, 헌신 요가, 라자 요가, 지(知) 요가를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탐구하면 이 결함있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나'가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이 네 가지 결함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진정한 체험은, 우리가 결함없는 진아로서만 항상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로써 이 상태를 성취할 때, 

네 가지 요가 수행을 할 자가 누가 남아 있겠으며,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모든 요가의 정수이다. 

그것이 마하요가, 곧 모든 요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요가이다.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나는 누구인가?'하는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참된 존재의 상태인 진아를 우리의 기본적 앎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에고, 곧 개인성의 느낌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길들, 즉 요가에서는 우리가 면밀한 사전 탐색없이 받아들여 온 거짓 존재인 개인성의 느낌을 우리의

기본적 앎으로 간주하고 가르침을 준다. 

그래서 경전에서 그 과정을 일러 '합일(yoga)'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의심 할지 모른다. "모든 베단타 경전이 발못되었고.구도자들을 속여왔단 말인가? 

경전 말씀이 거짓일리가 있나? 

아니면 우리는 바가반 스리 라마나가 경전을 비난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경전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가반 스리 라마나가 경전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

사실은 이러하다. 즉 세월이 가면서 경전들의 생명이라고 할 절대적 진리가, 문자적 의미만 터득했지 경전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한갓 책벌레들의 그릇된 설명때문에  마치 생기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경전의 참뜻은 진인들(Jnanis), 즉 실재에 대한 직접 체험을 가졌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배울 수 있다. 

그 누구든 언어에 통달했거나 지성이 예리하고 뛰어난 것만으로는 어느 한 경전 이면의 참된 정신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예로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대가 그것이다'(tat twam asi) 라는 큰말씀을 예를 들어보자.

구도자가 이 같은 신성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듣는 즉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스리 바가반의 판정과 학식있는 빤디트들의 판정 간의 차이는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경전에 통달하여 그들의 특수한 해석을 가지고 재가자들에게 강의하는 이 학자들은 '그대가 그것이다', '나는 브라흐만이다(aham brahmasmi), '나는 그대(soham)' 와 같은 큰 말씀들의 염송(japa)을 하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생각하기(명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또한 남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염송을 하거나 명상을 하라고 가르친다. 

 

앞서 '나는 사람이다, 혹은 개아다'라고 하던 생각 대신, 

그들을 이제 '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것은 한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아안주의 무념상태가 아니다!

 

이와 같이 큰 말씀들을 듣는 즉시 해야 할 올바른 수행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에 대한 염송이나 명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릇된 수행은 설사 그것을 여러 해 동안 계속한다 해도 결코 진지(眞知)의 체험을 안겨주지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을 아신 스리 바가반은 이와 같은 가르침으로 즉시 그 구도자를 올바른 길 위에 올려 놓는다.  

 

경전에서 " 그대가 곧 지고자라고 불리는 그것이다"라고 선언하므로, 

그리고 그것 자체가 늘 진아로서 빛나므로,

"나는 무엇인가?"하는 탐구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고 진아로서 안주하지 않고, 

"나는 그것이지, 이것(몸 따위)이 아니다"라고 명상하는 것은 실로 (마음의)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네

                                                                -<실재사십송, 제32연>-

 

경전에서 "그대가 그것이다"라고 선언하자마자 구도자의 즉각적인 반응은 자신의 주의를 진아 쪽으로 돌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구도자에게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저 브라흐만이다'를 명상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경전에서 "그대가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목적은 구도자로 하여금 주의를 진아 쪽으로 돌려서 '나는 누구인가?'를 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그것이다', '내가 그다', '나는 브라흐만이다' 같은 큰 말씀을 염송과 명상으로 바꾸어 놓으면 경전들의 목적 자체가 무산 될 뿐 아니라, 구도자들은 경전에서 응당 얻었야 할 적절한 이익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스리 바가반이 구도자를 곧바로 자기 주시로 데려 갈 때, 

당신은 경전들의 목적을 참으로 성취하면서 경전들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이 경전과 모순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명코 그럴 수없다. 

 

                                                           -스리 바가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