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4. 20:46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질문 :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궁극적인 실재를 깨닫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하리쉬 : 궁극적인 실재가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을 손에 넣는 사람은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실재는 얻고 말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가 찾고 있는 진아가 진정 그대 자신이다.
궁극적인 실재를 깨닫지 못했다고 슬퍼하는 그대의 슬픔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리지도 않은 친구를 잃어버린 줄로 알고 슬퍼하는 바보와 같다.
바보 열 명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건넌 다음 그 중 한 명이 숫자를 세어 보더니 '아홉 명 뿐이네. 한 명이 없어졌어.' 하면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다시 한번 정확하게 세어 보라고 했다.
그가 세어 보더니 역시 아홉 명 뿐이라고 했다.
결국 열 명이 다 세어 보았으나 아홉 명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빼고 세었던 것이다.
그들은 누가 없어진 것이냐고 야단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누가 없어졌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중에 감상적인 한 친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빠져 죽은 게 틀림없어.'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나머지 친구들도 엉엉 따라 울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강둑에서 울고 서 있는 바보들을 보고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바보들은 일행이 열명이었는데 강을 건넌 다음에 보니 한 명이 없었졌다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무리 세어 보아도 아홉 명 뿐이라는 것이다.
바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행인이 세어 보니 그들 일행은 틀림없이 열명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내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열 명 모두가 무사히 강을 건너 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나뭇가지 열 개가 있소. 이 나뭇가지를 한 사람에게 하나씩 줄테니 어떻게 되나 봅시다.
아마 잃어버린 열번째 친구를 찾을 수 있을 거요'
바보들은 잃어버린 친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그 행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행인은 바보들에게 나뭇가지를 받을 때마다 큰 소리로 자기 번호를 외치라고 시켰다.
'하나! 둘! 셋! 넷! - --'
이렇게 하여 아홉 명의 바보가 나뭇가지를 하나씩 받아 쥐었다. 그런데 아직 한 명이 남아 있었다.
행인은 열 번째 나무가지를 남은 바보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열!'하고 자기 번호를 외쳤다.
그제야 바보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어, 열 명이 맞네!'하면서 기뻐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슬픔을 없애준 행인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머리 숙여 감사했다.
열 번째 바보를 어디서 새로 데려왔는가?
정말로 그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인가?
바보들은 열 번째 친구가 자기들과 계속 같이 있었다는 것을 안 다음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운 것인가?
바보들이 슬퍼했던 까닭은 실제로 친구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잃어버리지도 않은 친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무지 때문에 슬퍼한 것이다.
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비참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대는 그대의 무한한 본성에 스스로 제한을 가한 다음, 자신을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영적 수행을 하면서 발버둥친다.
그러나 이미 제한 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하는 수행이라면, 그런 수행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뜻에서 나는 그대 자신이 무한하고 순수한 진아임을 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항상 진아이며, 그 외의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대 자신이 진아이기 때문에, 그대가 진아를 모른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아를 모르는 것은 진짜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화에 나오는 바보들처럼 모른다고 착각하는 무지일 뿐이다.
바보들은 실제로 친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에 슬퍼했다.
진정한 지혜는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무지 만을 제거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그대의 본성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이 이미 지복이며, 깨달음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대의 슬픔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진아를 알고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왜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질문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신이 진아임을 아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새로 얻을 것이 없다.
그대가 곧 진아이다.
그대는 항상 존재한다.
진아는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진아라고 하든지, 그것은 모두 그대의 진아, 혹은 진정한 그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떻게 해야 진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이 이곳으로 가는 데에는 어떤 길이 있으며 그 중에 어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생각과 외적인 대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무지만 버리면 된다.
즉 '진아가 아닌 것'들만 제거하면 된다.
-데이비두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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