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사 금강경 강의(21)

2021. 1. 4. 22:09성인들 가르침/금강경

非說所說分(비설소설분) 第二十一(제이십일)

 

[본문]

須菩提(수보리)야 汝勿謂如來作是念(여물위여래작시념)하되 我當有所說法(아당유소설법)이라하여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若人(약인)이 언(言)하되 如來有所說法(여래유소설법)이라하면 

即爲謗佛(즉위방불)이라. 不能解我所說故(불능해아설설고)일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說法者(설법자)는

無法可說(무법가설)이 是名說法(시명설법)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함은 어찌한 연고이냐. 만약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설한바 법이 있다 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능히 나의 설한 바를 알지 못하는 소이 이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가히 설할 법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니라. 

[해설]

설법이라는 것은 먼저 깨친 자가 아직 깨치지 못한 자를 위하여 깨치도록 말로 일러 주는 것을 설법이라 한다. 

그리하여 석가여래가 사십구년 간에 걸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야 팔만사천의 법문을 설하신 것이 불교의 경전이다. 이러하거늘, 이 대문에 와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요,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한 소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설법이란 것은 가히 설할 법이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

저 위에서도 말한 바가 있거니와, 불법은 다른 학문이나 지식과 달라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요,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요, 아는 것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배워서 얻을 수 없고, 가르쳐서 얻을 수 없고, 아는 것으로써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이 법은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한 물건도 없는 , 이 자리에 무슨 법이 있고, 법을 설할 자가 있고, 법을 들을 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또 이 자리는, 구태여 말하자면, 성현이니 범부니 부처니 중생이니, 내지 개미 벌레까지도, 더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그러하거늘 누가 깬 자이고, 누가 못 깬 자이며, 누가 제도하고 누가 제도 받을 자인가.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다. 

이러하므로 석가의 사십구년 설법이, 어떠한 일정한 법이 있어 설한 것이 아니요, 구태여 설법이라는 이름을 부치자면 가히 설할 법이 없다는 말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 사람마다 주리면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찌 사람만 이러할 것인가, 짐승이나, 새나, 벌레도, 다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어찌 설법을 입으로만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인가. 보라, 산과 물은 입이 없어도 상주(常住) 설법을 하고 있고, 꽃과 새는 말이 없어도 때를 따라 설법을 하지 않는가. 

옛날 현사(玄沙)스님은 법을 설하려고 법상에 올라 앉았는데, 마침 들보 위에서 제비가 지저귀는 것을 듣고 말없이 그대로 내려 오셨다 한다. 

그리고 구지선사(俱秪禪師)는 천룡(天龍) 스님에게 한 손가락 선(禪)을 얻어 가지고, 일생을 두고 손가락 하나로써 중생을 교화하고도 남았다 한다. 이것이 모두 설법인가. 아닌가는, 독자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두거니와, 여래의 설하신 법은 천언 만언을 하실지라도 상이 없고 함이 없어, 종일 설하여도 설이 아닌 것이어늘, 상에 속는 부처인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하나 하나의 법을 삼아 병을 만들므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망각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본문]

爾時(이시)에 惠命須菩提(수보리)이 白佛言(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이시여 頗有衆生(파유중생)이 未來世(미래세)에 聞說是法(문설시법)하고 생信心不(생신심부)이까. 佛言(불언)하시되 須菩提(수보리)야 彼非衆生(피비중생)이며

非不衆生(비불중생)리니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衆生衆生者(중생중생자)는 如來說非衆生(여래설비중생)이요 是名衆生(시명중생)이니라. 

저때에 혜명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단지 중생이 오는 세상에 있어,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희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다. 어찌한 연고냐.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의 말로는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니라. 

[해설]

수보리는 후세 중생들이 이러한 심심 미묘한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는지 걱정되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이 중생도 아니오, 중생 아님도 아니라고 하시고, 이 까닭은 중생 중생이라고 여래가 말한 것은,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 만이 중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중생이 아니라 함은, 사람마다 본래 성불하였으므로 중생이 아니라는 것이오, 중생 아님도 아니라는 것은, 자기 자성이 틀림없이 부처인 줄 알았으나, 마치, 죽순이 대 구실을 못하듯이 부처가 부처 노릇을 못하고, 육진경계(六塵境界)에 속아 탐진치(貪嗔痴)의 번뇌를 이르키므로 중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닌 자는 부처이니 부처가 부처를 믿거나, 구할 필요가 없고, 중생은 중생이니, 부처가 되기 위하여 부처의 말을 믿고, 육바라밀(六婆羅密)을 닦아 아뇩보리(牙耨菩提)를 성취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므로 아니라는 중생이나 옳다는 중생이나 다 이름만 중생이지 중생이 아닌 것이다. 

 

                                               -해안 선사 강의<금강반야바라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