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30. 20:51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5장. 깨달음
-- 깨달음 --
질문자: 아난다(Ananda. 지복, 즉 더없이 완벽한 행복을 일컽는 산스크리트어. 삿-칫-아난다, sat-chitananda, 라는 궁극의 본질을 이루는 세가지 요소중 하나 - 옮긴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고됩니다.
라메쉬: 집착하지 않으려는데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고되겠지요. 아난다도...
질문자: 여전히 개념이라고요?
라메쉬: 바로 그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질문자: 깨달음을 깨어있으면서 깊은 잠을 자는 상태에 비유들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은 사람은 더는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라메쉬: 그렇죠. 더는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서, 독립된 행위자로서, 독립된 경험자로서 인식하지 않아요.
질문자: 몸-마음이 기능하는 것을 인식할 뿐이군요?
라메쉬: 옳은 말이예요. 자신의 몸-마음 구조체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마치 어떤 다른 몸-마음 구조체에서 일어나는 행동인 것처럼 목격하지요. 자신을 독립된 존재라고 전혀 의식하지 않아요.
질문자: 시간을 걸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과 일들을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연속해서 겪었다고 의식하지 않는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일을 겪는 누군가가 그냥 사라져 버리나요?
라메쉬: 그렇기 때문에, 누가 마하라지에게 "왜 화를 내십니까?"라고 물으면, 마하라지께서 "누가 화를 냈단 말인가?"라고 대답하신다고 제가 말했지요. 그분께는 주체 행동 의식이 전혀 없어요.
질문자: 마하라지께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 화를 낸 사람이 되었던 "나"를 심리적으로 기억하시지 않는군요.
라메쉬: 그럼요. 바로 그렇습니다. 화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죄책감도 없어요
-- 괴로워하는 자가 사라진다 --
질문자: 깨달음이 어떤 몸-마음에 일어나면 그 몸-마음이 투명한 창문이 되어서 신성한 참자아가 이 꿈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주나요? 신성한 참자아가 깨달은 몸-마음을 통해서 어떤 즐거움을 느끼고, 어떻게든 관여하나요? 아니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나요?
라메쉬: 목격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순수한 참의식 또는 참각성이 즐거움 따위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겠습니까?
질문자: 하지만 깨달은 몸-마음과 '나는'이 일어나기 전의 본연의 잠자는 인식 사이에 차잇점이 어떻게든 있어야하지 않나요?
라메쉬: 깨달음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일은 삶에 대한 걱정과 의문과 문제가 사라지는 일뿐이데, 이 까닭은 개인적인 "내"가 사라지기 때문이예요. 주체 행동 의식이 없어요. 어떤 유기체가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참전체성 또는 신 또는 '절대'가 그 유기체를 통해서 기능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질문자: 그럼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군요?
라메쉬: 개별 유기체에 관한 한은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이 차이는 얽매인 개별 유기체가 자신이 스스로 기능한다고 믿는다는 것뿐입니다. 깨달음이 일어난 뒤에는 모든 것이 참전체성이 기능하는데 쓰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이런 이해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참전체성은 그렇게 기능합니다.
질문자: 그러면 그런 유일한 차잇점은 개별적이라는 것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괴로움도 사라집니까?
라메쉬: 그렇습니다만, "괴로움이 사라진다."라는 말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부처가 말하기를, "괴로움은 있으되 괴로워하는 자는 없다. 행위는 있으되 행위하는 자는 없다."라고 말했어요. 괴로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가 괴로워한다고 반응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괴로움이 있다', '고통이 있다'라고 반응해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몸이 갑자기 완벽해지지는 않아요. 몸은 여전히 질병 따위에 취약하지요.
질문자: 탈 정체성과 집착의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라메쉬: 그 차이를 이해하는데는 고통을 예를 들어보는 것이 제격입니다. 직접적인 경험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고통이라면 보통 사람은 "나는 고통스럽다."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깨달음 이후에 고통이 있으면 언제나 "고통이 있다."라고 느낍니다. 누가 마하라지께 고통스러우시냐고 물었을 때 마하라지께서는 "그래 큰 고통이 있네."라고 바로 대답하셨죠. 다른 말로하자면, 큰 고통이 목격된다는 뜻이예요.
질문자: 느끼지 못하는군요?
라메쉬: 아니죠. 확실히 고통을 느끼죠!
질문자: 누가 느낍니까?
라메쉬: 그 유기체가 느끼죠.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는 아파서 신음해요. 고통이 목격되고 유기체가 고통에 반응하는 것도 목격됩니다. 고통이 있고 고통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도 있어요. 반응이 신음하는 것이나 비명을 지르는 것이 될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이 목격됩니다. 고통과 유기체의 반응 모두가.
-- 이원론이 사라지다 --
질문자: 몸-마음은 죽을 때 분해되고, 죽기 전에는 깨달음을 통해서 분해되는데, 맞습니까?
라메쉬: 아니죠. 깨달음 때문에 몸이 분해되지는 않아요.
질문자: 제 말은, 깨달음이 일어나면 이중성에서 자유로워 진다는 말입니다.
라메쉬: 분명하게 말해드리죠. 깨달음이 일어나면 개체에서 이원론이 떨어져나가요. 개체는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몸-마음이 계속되는 한은 이원성은 반드시 있어요. 몸-마음이 시공간 안에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는 모든 것은 이원성안에 있어요. 깨달음이 일어날 때 사라지는 것은 이원론이죠. "나"를 독립된 개체라고 여기고 너를 또 다른 독립된 개체라고 여기는 것이 이원론입니다.
질문자: 그게 제가 생각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원론이라는 부분이 분해되며서 거기서 자유로워 지는 거죠.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몸과 그 특정 존재에 있던 모든 속성이 죽으면서 동시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 깨달음의 결과는 다양하다 --
질문자: 선생님께 깨달음이 일어나면서 하시던 일에 흥미를 잃으셨나요?
라메쉬: 정반대였죠! 흥미를 잃지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해둡시다. 제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라고 물었어요.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모든 흥미를 읽어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저는 이전에는 작가가 아니었지만 책을 계속 내게 되었지요. 책, 지침들(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지침들, Pointers from Nisargadatta Maharaj. 라메쉬가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요약한 책으로 1982년 뭄바이 체타나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한국에는 '담배 가게 성자'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 - 옮긴이)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마하라지께서 책이 나오는 것을 알고 계셨는데, "한 권이 아니야. 일곱 여덟 권의 책이 나올 거네."라고 말씀하셨어요. 글쓰기는 제 직업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지만 그냥 일어납니다. 제 책들의 원고를 보시면 보통 글 쓰기로 여러 장을 계속해서 쓰는데 교정이 거의 없어요.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한 장짜리 편지만 쓰더라도 얼마나 많이 고치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때는 생각하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여러 장을 자연 발생적으로 써내려 가는 일이 일어나면서, 제가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도 7, 8년 정도 안에 6, 7권의 책들이 나온 거죠. 그래서 제가 "내" 책이라고 말할 때마다 조금은 민망해요. 마음 속 깊이 이 책들이 나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리고 또, 저는 말을 잘 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어요. 사실 제 아내는 "사교 모임에 가서 모두들 얘기를 나누는데, 왜 말을 안해요?"라고 늘 불평했어요. 아무 할 말이 없었죠! 전 잡담도 잘 못해요. 그런데, 이러고 있어요.
질문자: 모든 것이 하나라고 체험하고 이해한 뒤에 어떤 사람들은 신에 도취해 있거나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스승들은 신에 도취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한 상태인가요? 이에 관해서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라메쉬: 그렇죠. 제가 방금 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비개별적 사건이 일어날 때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 몸-마음 유기체가 어떻게 행동할지 또는 그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크게 다르고 엄청나게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고 글 쓰던 사람이 말하고 글쓰기를 그만 둘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을 전혀하지 않던 사람이 그런 일을 시작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안 할 수 있죠. 사실 어떤 사람은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은둔하기도 해요.
질문자: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환희와 같은 상태에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라메쉬: 그런 종류의 환희는 아주 잠깐 동안만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런 말들이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켜요. 환희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머물지 않고 고요히 가라 앉습니다. 솔직히 저는 지복이라는 단어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예요. 진정한 지복은 지복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복이예요. 저는 평화나 고요함이라는 말을 선호해요. 사실 깨달음은 지복이든 뭐든지 간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입니다. 완전한 받아들임이지요. 이것이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한 단어로 된 만트라를 가져야 한다면 신뢰라는 단어가 되겠군요.
라메쉬: 그래도 되죠. 하지만 제가 쓰는 단어는 '받아들임'과 '항복'이라는 말입니다. 둘 다 같은 것이죠. 어쨌든, "신뢰"라는 말을 써도 됩니다. (12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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