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3. 21:58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질문자: 저 자신에게 계속 그렇게 말은 해요. (웃음)
질문자: 몽상이 일어날 때는 상상하는 마음이 자리를 차지하는지요? 몽상하는 것에 어떤 가치가 있나요? 왜 몽상이 일어나지요?
라메쉬: 몽상은 정말 그냥 또 다른 종류의 생각하는 마음인데, 객체화하면서 마음 속에 형상을 그려보는 일일 뿐이예요. 여전히 생각하는 마음이지요. 과거의 기억에 기대고 미래의 희망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몽상을 일으키면서 다른 길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예요. 여기서 요점은 몽상이 일어날 때는 일하는 마음은 없다는 점입니다. 일하는 마음이 할 일이 없어요. 일하는 마음이 할 일이 있어도 이 생각하는 마음이 돌아다니면서 간섭해요. 몽상은 그냥 일하는 마음을 방해해서 효율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측면의 생각하는 마음일 뿐이예요.
질문자: 생각하는 마음은 백 퍼센트 얼토당토 않는 것이군요. 이런 생각은 완전히 요점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군요.
라메쉬: 정말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생각하는 마음을 억누려고 하면 일하는 마음을 방해하게 되나요?
라메쉬: 물론이죠. 생각하는 마음을 억누르려 하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억누르려 하는 꼴이 됩니다. 자신을 억누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요.
질문자: 잠시동안은 억누를 수도 있겠죠.
라메쉬: 그렇지만 그때는 힘이 배가 돼서 돌아올 겁니다.
질문자: "깨달음이 일어나면 깨달은 사람은 땅 위를 걷는 반면 깨닫지 않은 사람은 땅에서 두 치정도 떠서 걷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이 없다."라고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말한 것 같습니다.
라메쉬: 그 두치가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지요.
질문자: 저희 몇 명이서 쉬는 시간에 일하는 마음은 제쳐두고 생각하는 마음만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일하는 마음이 일하다가 문제가 일어나면 문제에 반응하는데, 반응하는 과정에서 마음 속에 형상을 그려보지 않습니까? 최종 결과물에 대한 형상을 그려보지 않습니까? 바라는 결과에 대한 형상을 그려보지 않습니까? 하는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 형상을 그려보지 않습니까?
라메쉬: 대부분은 그렇지요.
질문자: 그리고 그렇게 형상을 그려보는 과정이 결과나 일의 방향을 정을 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부분이 생각하는 마음과 일하는 마음이 겹치는 부분이 아닙니까?
라메쉬: 물론 그렇지요.
질문자: 생각하는 마음의 간섭없이 일하는 마음만 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참 어렵네요.
라메쉬: 궁극적 각성이 일어나고 주체 행동 의식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겹치는 부분이 늘 존재합니다.
질문자: 좋습니다. 만일 즈나니(깨달음이 일어난 현자를 가르키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신의 본성을 아는 지식인 즈나나를 깨우친 사람 - 옮긴이)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747 여객 항공기를 조종하고 있다면 일하는 마음에 근거해서 조종에 필요한 계산을 하겠죠. 그런데 만일 이 계산들 가운데 하나가 잘 못 되면서 비행기가 기울기 시작한다면, 이렇게 비행기가 기울면 결과적으로 비행기가 추락해서 수 백 명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형상이 즈나니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라메쉬: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반대로, 이해가 별로 없는 사람에게 조차도 일하는 마음은 가능한 최대한 집중해서 그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할 겁니다.
질문자: 하지만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비행기가 추락할꺼야."라고 예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종사가 비행기 추락을 막을 행동을 해야할지 알게 됩니까?
라메쉬: 그런 모든 생각은 일하는 마음의 일부로써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의 관점에서 그 순간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지, 결과에서 보는 관점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죠.
질문자: 하지만 이런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미리 예상해 봐야지만 이 예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지만 그런 예상에는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는 형상은 담기지 않을 겁니다.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을 거예요.
질문자: 차를 운전하다가 길 모통이를 돌다가 운전대를 충분히 안 돌린 것을 알게 되면, "아이고 신이시여, 난 도랑에 쳐박혀서 죽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그냥 운전대를 조금 더 돌리겠죠. 바로 이 말씀이신가요?
라메쉬: 바로 그렇죠. 바로 잡는 행동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으로 일어나요. 사고를 일으킨다면 생각하는 마음이 만드는 형상이 방해하기 때문일 겁니다.
질문자: 대부분은 바로 연결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딱딱 맞지 않는 상황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대안을 심사숙고 해야할 때도 있어요. 저는 외과의사인데요. 수술중에 "글쎄, 내가 이렇게 하면 환자가 저렇게 느끼겠지만 내가 뭔가 다르게 하면 다른 결과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여러 대안들도 고려해서 그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마음이 때로는 긍정적으로 일하는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나요?
라메쉬: 당신이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일하는 마음이예요. 그렇게 형상을 그려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예요. 일하는 마음도 형상을 그려보겠지만 이것은 당장 하고 있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겁니다.
질문자: 그럼, 형상을 그려보는 일이 꼭 생각하는 마음의 일이 아니군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제가 말했듯이 일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마음 모두 기억을 이용해요. 생각하는 마음은 과거의 기억을 꺼집어내서 미래에 어떤 두려움을 비출 겁니다. 하지만 일하는 마음은 당장 하고 있는 일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 기억을 이용할 겁니다.
-- 생각 --
질문자: 상념체(想念體)에 관한 책을 막 다 읽었습니다. 책에서는 상념체가 세상에 나타나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상념체를 만나게 되기 때문에 왜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되는지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라메쉬: 정말 솔직히 말해서, 생각은 그냥 일어나는 것인데 개인의 마음이 이 생각을 부정적인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버려요. 바로 그 마음이 "나는 부정적인 생각은 원치 않고 오직 긍정적인 생각만을 원해."라고 결정하는데, 이것이 얽매임이죠. 생각이 일어날 때 목격되면 바로 잘려나가요. 생각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전혀 판단하지 않아요.
질문자: 그럼 상념체라는 것도 그냥 또 하나의 개념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물론 개념이죠! 일단 우리가 의논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 개념이지요. 이 때문에 궁극적인 가르침이 침묵인 겁니다. 그냥 말없이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예요. 누가 "아, 오늘은 침묵해야겠군." 하고서 질문과 답을 글로 주고 받는, 이런 침묵이 아닙니다. 이것은 침묵이 아니지요. 그냥 목이나 쉬어 주는 거죠. 이것은 침묵이 아니예요.
질문자: 그냥 소음이죠. 마음이 활동하는 것이죠.
라메쉬: 그럼요. 돌아다니면서 재잘대는 것이 원숭이 마음의 본성이지요.
질문자: 불교에서 이르듯, 시끄러운 것은 마음이죠.
라메쉬: 마음이 바로 소음이죠! 마음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소음입니다.
질문자: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마음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마음을 억누르는 꼴 밖에는 안됩니다.
질문자: 언제 마음이 소음이 되지 않나요?
라메쉬: 이해가 있을 때입니다. 이때가 마음이 침묵하는 때가 될 겁니다.
-- 개념 --
질문자: "내"가 없다는 개념이 쓸모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차라리 신이라는 "참나"가 없다는 개념이 더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라메쉬: "나"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참나"라는 개념이 일어납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신이라는 개념이 일어나지요.
질문자: 마하라지께서 "참의식은 당신에게 달라붙은 거머리와 같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라메쉬: 그분은 많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분 말씀 모두가 다 개념입니다. 실수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마하라지께서 말씀하셨든지, 부처가 말했든지, 그리스도가 말했든지 다 똑같습니다.
질문자: 공안 같은 것인가요? 전 이 공안을 깰 수가 없군요.
라메쉬: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씀이 개념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는 최고라고 생각해요. 마하리쉬께서 "개념은 자신의 발에 박혀있는 가시를 빼기 위해서 쓰이는 다른 하나의 가시처럼 쓸 때만 쓸모가 있다. 일단 박혀있던 가시를 뽑고 나면 가시 둘 다를 버려 버린다." 개념이 쓸모있는 때는 이때밖에는 없어요. 방해하는 개념을 제거할 때뿐이죠. 이해가 일어나면 이런 말과 개념들은 다 버려집니다. 이런 말과 개념들을 붙들고 있으면 이것들은 암적인 존재가 되지요.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어요.
질문자: 그럼 우리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핵심만 새겨듣고 세부적인 것에는 매달리지 말아야겠군요?
라메쉬: 그렇고 말고요! 뭄바이에 저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종종 한, 두 시간 대화를 나눈 뒤에 돌아가면서 "이제 이해했습니다. 정말이예요! 이제 전 여기를 떠나는데, 전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요. 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아주 간단해요. 여기서 들은 것에 관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자신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 이해가 꽃을 피울 기회가 올 겁니다. 하지만 이해한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기회는 더 줄어들 겁니다."
질문자: 제 노트를 던져 버리겠습니다. (웃음)
라메쉬: 좋아요.
-- 에고 --
질문자: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위해서 에고가 꼭 필요하나요?
라메쉬: 개인의 일상 생활을 말하는 건가요?
질문자: 에고는 불가피하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에고는 아주 끔찍한 것이죠. 모든 문제의 원인이 에고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계획한 그 전체 계획 안에는 에고도 포함되어 있어야하지 않나요?
라메쉬: 에고와 생각하는 마음을 혼동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일어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나 예수나 부처를 보면 그들의 몸은 깨달음이 일어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기능을 했어요. 그렇기에 이들의 몸-마음 유기체는 확실히 의식적 기능과 무의식적 기능 모두를 계속 이어갔어요. 이들 몸-마음 유기체에 의식이 있으려면 몸과 동일시하는 어떤 에고가 있어야만 해요. 누가 이 사람들을 부르면 돌아보고 대답하겠죠. 그러니 에고는 분명히 이들에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에고라는 단어를 크게 비난해왔어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몸과 동일시된 에고는 일하는 마음이고 몸이 기능하려면 꼭 필요해요. 깨달음이 일어날 때 사라지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인데, 생각하는 마음은 절대 현재의 순간에 살지 않아요. 일하는 마음은 늘 현재의 순간에만 살고 필요한 일만 해요. 생각하는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 살아요. 에고를 말할 때는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바로 이해해야 해요. 일하는 마음이라는 기능에 필요한 요소로써의 에고는 꼭 있어야만 해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결과를 생각하고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바로 이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에고뿐입니다.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저 새가 이쪽을 보고 있습니까? 저쪽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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