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21)

2020. 11. 13. 20:5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6장. 깨달은 이의 관점

--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 -- 

질문자: 깨달은 몸-마음 유기체는 세상을 어떻게 보나요? 무엇을 보나요? 무슨 뜻으로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요? 

 

라메쉬: 샹카라(Shankara, 788~820. 인도의 현자이며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진다. 불이원론, 즉 아드바이타를 주창하였다. - 옮긴이)는 현상세계를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자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샹카라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썼던 그 내용 때문에 많은 오해가 일어났어요. 현상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현상세계가 햇빛을 가리는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라는 뜻입니다. 그림자가 존재하려면 뭔가 다른 것에 의존해야하죠. 그림자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예요. 현상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상세계가 본체의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참주체 또는 본체는 현상세계를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절대적 참주체와 세상에 나타난 객체는 둘이 아니예요. 나타나지 않은 참된 것과 세상에 나타난 것이 같은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이해 가운데 하나예요. 나타난 세상과 같은 것이라는데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세상과 같은 것이라는 증거가 있나요?"라고 물으면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남아요. 올바른 이해는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고 참의식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이 세상에 엄청나게 다양하고 각각의 개성을 가지는 객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겁니다. 지문만이 다른 게 아니라 각 개인의 목소리도 정교한 기계로 식별이 가능하고 심장 박동까지도 구분이 된다고 해요. 그렇지만 이런 다양성 속에서도 여전히 통일성은 존재해요. 참전체성으로 기능하는 이 참통일성은 모든 감지력을 가진 존재 안에 주체의 요소로서 공통적으로 존재해요. 이해가 일어나면 분리됨이 사라져요. 다양한 것들에서 보이는 다양성은 오직 겉에서만 보일뿐입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라메쉬: 저는 참의식이며 당신도 그래요. 그리고 동물과 곤충, 인간, 모든 몸-마음 유기체와 모든 감지력을 가진 존재를 구성하고 또한 이들을 통해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참의식입니다. 

 

질문자: 지금처럼 대화를 주고 받지 않았다면 깨달음이나 참의식 따위에 관한 개념이 선생님 마음에 떠올랐을까요?

 

라메쉬: 안 떠올랐을 겁니다.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모든 개념이 멈춘다는 뜻이예요. 모든 의심이 사라져요. 더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더는 개념이 필요없어요. 개념이 전혀 필요 없지요. "내"가 있을 때만 개념이나 의심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나"란, 주체와 객체로 논리와 이성으로 분리된 마음, 즉 생각하는 마음 안에서 이런 의심들이 뭉쳐져 있는 덩어리예요. 이런 "내"가 사라진다면, 누가 있어 의심을 품겠습니까? 오늘 제가 하는 말은 이전에 한 적이 없어요. 말은 그냥 흘러 나와요. 준비된 답은 없어요. 질문을 하면 답은 그냥 흘러나오지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니예요. 답을 해석하고 생각해서 준비하는 마음이 없어요. 

 

질문자: 그럼 선생님께서는 늘 자연 발생적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가시나요? 

 

라메쉬: 사실 산다는 것은 늘 자연스럽고 자연 발생적인 겁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지요.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일어나는 일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통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이해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수 많은 어려움과 변화를 겪는데, 이것을 불행하게 여겨요. 이렇게 불행한 시간을 겪는 동안 모든 일은 저절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변화가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대신에, 좀 더 행복해지려면 자신을 개선해 나가야만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 개발 과정을 수없이 거치지요. 이런 자기 개발 과정에서 오는 결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계속해서 좌절할 수밖에 없죠. 

 

질문자: 그럼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사는 방식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믿으시나요? 

 

라메쉬: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언제나 독립된 개체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요.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어 왔어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고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참해져요. 깨달음은 단순히 이 모든 것을 깨우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일어나면 무슨 행동이 일어나든지 간에 모든 행동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 받아들여요.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들까지도 다 같이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 받아들여요. 깨달음에 따른 변화는 태도의 변화이고 관점의 변화이며 이해가 일어나는 것일뿐이예요. 세상은 계속되고 같은 식으로 흘러 갈 겁니다. 깨달음에 따른 결과는 다양해요. 노자(老子)가 이런 자연 발생적인 삶을 아주 멋지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마하라지는 노자나 도교는 전혀 들어보신 적도 없으신데, 정말 놀랍게도 노자와 마하라지의 가르침은 일치해요. 물론 그래야겠지요. 깨달음이 일어난 이후의 삶은 그것이 2천년 전 중국의 노자에게든지 100년전의 라마나 마하라쉬에게든지 같아야겠죠.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보면 놀랄 겁니다. 마하라지는 뭄바이의 가장 번잡한 홍등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기거하셨고 노자는 중국의 산 속에서 살았지만, 이 두 분은 삶에 대해 똑 같은 태도를 지니고 사셨고 이런 태도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밝은 영향을 받았지요. 현자의 삶을 보통 사람들은 용감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용감한 삶"이란 삶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삶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뜻이예요. 용감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원칙을 이해와, 통일성을 다양성과, 질서를 자연스러움과, 사회성을 개성과 조화시킨다는 뜻이예요. 현자는 각양각색의 것들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세상의 다양성을 경이롭게 바라보지만 통일성도 함께 봅니다. 원칙을 이해와 조화시키거나 질서를 자연스러움과 합하는 것은 현자가 하는 일이 아니예요. 그냥 일어나는 일이죠. 이 때문에 매력적이고 경이로운 것이죠. 용감한 삶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데, 이 까닭은 "나는 원칙을 지켜야만 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원칙을 조정해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것을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요. 개별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 "나는 나 자신 삶을 살고싶다. 나만의 방식으로 먹고 운동하며 살고 싶다. 나는 나 스스로 살고 싶다." 그러나 삶은 혼자서 살 수 없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적응해야하는 것과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바람이 서로 상반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비참해지지요.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함께 작용해나간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둘을 조화시키는 자연의 질서가 자연히 따라와요. 용감한 삶은 자연과 맞선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즐겁게 협력한다는 뜻이예요. 실제 생활에서는 개념과 정해진 틀이 없이 자연스럽고 자연 발생적으로 매 순간 '있는 그대로'가 되는데 기꺼이 참여하는 형태로 나타나지요. "오 주여, 나의 것이 아닌 주의 의지로"라는 세상 가장 깊은 확신이 있어요. 이런 삶의 태도에는 어떤 행동을 하든지 자연히 주체 행동 의식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생활은 일부러 도덕적으로 청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덕(德)이 되지요. 

 

질문자: 선생님의 깨달음은 가르침을 목적으로 주어진 건가요? 치유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있나요? 

 

라메쉬: 그럼요. 일단 깨달음이 일어나면 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정해진 규칙이 없어요. 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아무일도 안 일어날 수 있어요. 기존에 하던 일을 똑 같이 계속해 나갈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겠지요. 전에 글을 써본적이 없던 사람이 책을 쓰겠죠. 밥 먹으면서 말하는 것도 싫어하던 사람이 강연을 하겠죠. 기적같은 일이죠. 

 

질문자: 선생님 말씀이 어찌 그렇게 술술 나오는지 놀랍네요. 

 

라메쉬: 말이 "술술 나온다"가 맞아요.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진데, 글이 술술 나오죠. 

 

-- 라메쉬의 깨달음 -- 

질문자: 선생님의 깨달음에 관해서, 어떻게 깨달음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 말씀 좀 해주세요. 

 

라메쉬: 글쎄요. 깨달음은 몹시 무딘 단어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깨달음이란 말을 들으면 마치 빛이 뿜어져 나오고 귀에서 지복이 흘러나오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인상을 주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제 경우에는 아니예요. 깨달음은 아주 부드럽지만 분명히 구분이 되는 일이라고 들었었는데, 노자와 그 제자의 이야기를 읽고서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 중에는 아마 이 이야기를 이미 들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시 듣는다고 나쁠 건 없겠죠. 어느날 아침 노자의 한 제자가 눈을 부릅뜨고 성취감에 들뜬 표정으로 노자를 찾아와서, "스승님, 제가 도달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노자는 아주 자비롭게 제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자여, 자네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았네." 그래서 제자는 돌아갔어요. 얼마 뒤에 그 제자가 다시 찾아와서 지극히 침착하게 "스승님,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노자가 제자의 눈을 들여다 보고 안아주며 말했어요. "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보게." 제자가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스승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저는 어떤 노력도 더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관한 생각을 접고 깨달음을 향한 모든 노력을 그만두고 일상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불현듯 그것이 제게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늘 거기에 있었더군요!" 무엇을 원하는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해가 확연해졌어요. 이 상태는 늘 있어요.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의 궁극적인 상태는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내"가 사라지는 상태입니다. 

 

질문자: 선생님 말씀은 때가 되야 도착할 거라는 말씀이네요. 

 

라메쉬: 그렇죠! '주의 의지'일 때죠. 일어날 '때'가 됐을 때가 맞습니다. (13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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