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22)

2020. 11. 20. 20:30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질문자: 그동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군요? 

 

라메쉬: 또 한 번 맞는 말입니다. (웃음) 그리고 제 경우에는 깨달음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를 압니다. 빛의 축제라는 뜻의 디왈리 날이라고 하는 매년 찾아오는 명절 날인데, 인도 전역에 걸쳐서 열리는 축제예요. 이 빛의 축제는 그릇된 것에 대한 옳은 것의 승리, 악에 대한 선의 승리, 라바나(인도의 2대 서서시 중 하나인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란카섬의 왕으로 라마에게 죽임을 당했다. - 옮긴이)에 대한 라마(라마야나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라바나를 죽이고 개선해 왕이 된다. - 옮긴이)의 승리를 뜻해요. 마하라지가 계신 곳에서는 이날은 그분 다락방을 청소하는 일명, "봄 맞이 청소"를 하는 날이라서 대담이 열리지 않았어요. 제가 마하라지를 처음 찾아 뵌 해에는 그랬지요. 그때가 1978년이었어요. 그 다음해 디왈리 하루 전날, 이런 이유로 다음 날 대담이 없을 거라는 공지가 있었는데 한 동료가 마하라지께서 괜찮으시다면 자기 집에서 대담을 열자고 제안했어요. 이 친구의 집은 마하라지의 집에서 아주 가까웠고 참석자 대부분이 이 사람 집을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다음 날 저희는 이 친구의 집에서 대담을 했지요. 이 친구도 대담을 통역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날은 자기 집에 오는 사람을 자기가 돌보겠다고 하면서 제게 자기가 통역해도 되는지 물었어요. 저는 괜찮다고 했지요. 마하라지께서 말씀을 시작하시던 순간,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마하라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아주, 아주 명확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 마하라지는 치아가 하나도 없으셔서 보통은 제가 그분 말씀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하지만 그날 아침에는 마하라지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지만 이전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명확해서 전혀 집중할 필요가 없었어요. 통역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사실상 제가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역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이건 마치 마하라지께서 직접 영어로 통역하시고 전 그냥 거기 앉아서 지켜보는 것 같았지요. 통역이 끝나자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어요.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몸은 단지 그런 체험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반응했을 뿐이죠. 나중에 제 동료가 와서 "라메쉬, 자네 오늘 아주 대단해 보였네!"라고 말했어요. "어찌 그러나?" 동료는 "자네, 평상시 하는 말보다 훨씬 큰 소리로 말했고 대단히 권위있게 이야기하면서 전에는 한번도 하지 않던 몸짓까지 하더라니까." 그래서 전 그 일을 그냥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뭔가가 일어났다는 확신이었어요. 하지만 그 일어난 뭔가는 내적으로 일어난 완벽한 변화, 완전한 변화였어요. 밖으로 제가 느낀 유일한 변화는 이상하게 몸 무게가 전혀 안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어요. 뭐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니 진정이 되더군요. 제게 깨달음이 언제 일어났냐고 물으면 그때 이렇게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제 말대로 이것은 아주 조용히 일어난 일이고 물론 갑작스러웠는데, 어떤 일보다 갑작스럽고...전혀 예상치 못한...완전히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 이후로 통역은 늘 그런 식이었고 마하라지께서도 알아차리셨죠. 마하라지께서는 영어를 모르셨지만 통역히 엄격하게 정확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셨어요. 통역할 때 누가 통역하든지 간에 자주 마하라지께서 "뭐라고 통역했나?"라고 물으셨어요. 그렇게 통역한 것을 마라티어로 반복해보게 하시고 맞다고 확인해 주시든지, 아니면 "아니지.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지. 틀렸잖아. 자주 틀리는군."라고 말하셨지요. (웃음)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는 전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더는 신경쓰지 않았고, 그래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통역이 일어났어요. 어느날 아침, 마하라지께서 평상시처럼 제가 태워드리는 차를 타고 나가시려고 준비하시는 동안 저는 마하라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하라지께서는 유난히 차분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일어나서 기쁘네." 마하라지께서 그때 책 '지침들'이 출판되는 사실을 알고 계셔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일어나서 기쁘네. 그냥 책 한 권이 아니야. 책이 여러 권 나올 거네. 책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한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될지는 나는 모르지. 자네 조차도 모르지."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각성이 일어났을 때 몸에 이상한 느낌, 뭔가 불편하고 혼미한 느낌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참의식이 더는 그 몸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 

 

라메쉬: 그래요. 

 

질문자: 깨달음을 체험하신 말씀을 하시면서, 마하라지께서 "그래 그것이 일어났네."라고 말씀하신 순간에 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선생님 스스로 "그래 그것이 일어났군."이라고 생각하신 특정 순간이 있었나요? 

 

라메쉬: 하루 이틀 뒤에 제가 물리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이 일어났음을 알았고 이에 대해 전혀 의심이 없었어요.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전 마하라지께 인정 받을 필요를 전혀 못 느꼈지만 그렇게 인정을 받았을 때는 기뻤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누구에게서 어떤 인정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자: 그렇게 이틀이나 삼 일이 지난 뒤에 그 순간이 선생님께 찾아온 것처럼 들리네요. 

 

라메쉬: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은 그래요. 일어난 일을 인식한 때, 일어난 일을 의식한 때는 그렇습니다.

 

-- 있는 그대로의 삶을 즐겁게 살아간다 -- 

 

질문자: 오늘 저녁 석양이 참 아릅답더군요.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석양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실 때 온갖 자동차 소음도 같이 체험하실텐데, 저는 소음이 석양처럼 아름답지 않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즐거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시나요? 

 

라메쉬: 저는 석양을 언제까지나 즐길 수 없고 소음도 피할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석양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거나 소음이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아요. 다른 말로하자면, 무엇이 있든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운 석양이 있으면 즐깁니다. 석양이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죠. 보통 사람은 기쁨을 즐길 때 이런 즐거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어요. 즐거운 순간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데, "언제 내가 이처럼 좋은 식사를 했던가? 언제 내가 다시 해볼까? 이런 성관계를 언제 다시 해보려나?"라고 생각해요. 즈나니는 언제 다시 그런 순간을 갖게 될지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즐거움을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좋고 아니라도 신경쓰지 않아요. 이 때문에 즈나니를 최상의 즐기는자라는 뜻으로 마하보기라고 불러요. 식물인간과는 엄청 거리가 멀죠. 이런 즐거움에는 즐기는 자가 없고 오직 순수한 즐거움만이 있습니다. 

 

질문자: 자신의 존재 전체가 그것으로 변하는군요. 

 

라메쉬: 그것이 자연 발생적인 생활이예요. 자연 발생적인 삶에는 살아가는 자는 없고 오직 자연 발생적인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 목격과 비목격 -- 

 

질문자: 선생님께서 쉬고 계실 때, 즉 참의식이 쉬고 있을 때가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씀하셨듯이 이 모든 것이 관련된 순간인데,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순간이죠. "나"에게서 벗어나는 순간이 사토리에 가까운가요? 

 

라메쉬: 의식이 일시적으로 부재하는 것을 일컫는 상태인 사토리 또는 삼매(三昧) 또는 살비칼파 삼매라는 이런 상태가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말씀하신 자연스러운 상태와 가장 비슷하기는 하지만, 비목격 상태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측면에서 보면 그런 상태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라고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비목격 상태에서 목격하는 상태로 마치 자동차 자동 변속기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합니다.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비목격 상태에 있지요. 누가 자신을 부르든지, 누가 들어오거나 문에서 벨 소리가 울리거나 하면 목격하는 상태로 돌아와요. 여기에 어떤 방해도 없고 어떤 방해도 못 느낍니다. 이 두 상태를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해요. 

 

질문자: 선생님, 그런 과정을 마음이 작용한다는 뜻으로 치타(마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옮긴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말하자면,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치타의 본성이고 마음이 하는 일인데,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폐가 자기 일을 하듯이 마음도 자신의 일을 한다는 말이죠. 

 

라메쉬: 그래요. 

 

질문자: 그럼 마음이 환상을 만들어 내는군요. 

 

라메쉬: 정말 그렇죠. 

 

질문자: 하지만 저희는 폐가 하는 일을 보듯이 마음이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지켜 볼 수가 있어요. 

 

라메쉬: 정말 그렇습니다. "삿-칫-아난다"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삿"은 존재 또는 '있다'는 뜻이예요. "칫"은 존재를 의식하는 참의식이고, "아난다"는 지복입니다. 존재와 참의식 그리고 지복이죠. 이 말이 참주체의 상태인 니르바나를 설명한다고 잘 못 알고 있어요. 그럴 수 없는 까닭은 참의식이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않는 니르바나의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예요. 이 상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삿-칫-아난다라는 말은 본체가 아닌 현상세계 안에 있는 설명이예요. 모든 설명은 현상세계 안에 있어요. 

 

질문자: 노자가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군요.

 

라메쉬: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사라집니다. 쫓고 잡으려하면 사라져요. 여기 이 문장이 참으로 멋지기에 제가 계속 읽어주는데요. "오직 찾아 헤맬 때만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없앨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고요히 머물면 그것이 말한다. 당신이 말하면 사라진다. 박애의 위대한 문은 앞에 어떤 장애도 없이 활짝 열려있다." 

 

질문자: 목격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목격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예요. 

 

질문자: 누군가가 한 번은 목격하는 자가 목격되는 대상 속으로 무너질 때가 참의식의 가장 높은 상태라고 말하더군요. 선생님께서 그냥 존재하는 것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인가요? 

 

라메쉬: 그렇지요. 목격할 어떤 것이 있을 때 목격은 참의식의 상태예요. 새들이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 따위를 목격해요. 이런 것이 멈추고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더욱 깊은 상태로 들어가는데, 라마나 마하리쉬께서는 이것을 "자연의 상태"라고 부르셨어요. 

 

질문자: 자신이 새들이 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될 때를 말하십니까? 

 

라메쉬: 말로 표현하고 싶다면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질문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군요. 

 

라메쉬: 그럴 필요가 없죠. 

 

질문자: 선생님께서 지금 설명하시는 것은 목격을 너머서 있군요? 

 

라메쉬: 그럼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얽매임이 있어요. 어느정도 이해가 있으면 얽매임이 흐려지면서 목격만 남게되는 상태가 되지요. 제가 말하고 행동할 때는 목격하는 상태지만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비목격 상태로 깊어져요. 비목격 상태에서도 의식은 있어서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지만 아주 수동적으로 무관심한 형태로 일어나요. 이것이 자연의 상태, 비목격 상태지요. 비목격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면 삼매의 상태로 좀 더 깊어집니다. 

 

질문자: 그러다 늘 목격이 다시 일어나나요? 

 

라메쉬: 목격은 늘 일어나요. 목격이 바로 참의식이예요. 

 

질문자: 하지만 목격이 멈추고 더 깊은 상태로 들어가신 뒤에 늘 다시 돌아오시나요?

 

라메쉬: 아 그럼요. 물론 그렇죠. 비목격에서 목격으로 돌아오지요. 마치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기어를 바꾸는 것과 같지요. 자동으로 일어나요. 생각조차도 안해요. 이런 상태를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럽고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요. 

 

질문자: 가장 깊은 비목격의 상태가, 즈나니에게는 각성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보통 사람의 깊은 잠의 상태와 같나요? 

 

라메쉬: 그렇죠. 보통 사람이 깊은 잠을 잘 때의 상태에서 사라지는 것은 "나"라는 동일시된 의식이지요.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다시 태어나는 일과는 다르기 때문에 동일시되지 않은, 비개인적인, 보편적인 참의식이 거기 있어야만 해요. 깊은 잠에서도 존재하고 자고 일어날 때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은 비개인적 참의식이예요. 깊은 잠에서 부재하는 것은 동일시된 개인의 의식이지요. 깨달음 이후에는 어느 상태에서든지 언제나 비개인적 참의식이 바로 '현재 있는 그대로'라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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