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한다(13)

2020. 9. 18. 22:3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3장. 구속되어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 서론 -- 

 

질문자: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누가 구속되어 있습니까? 누가 찾고 있습니까?"라고 물으시는데, 저도 선생님께 같은 질문을 묻고 싶습니다. 

 

라메쉬: 자신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은 개인 또는 개인의 의식이예요. 찾는 일은 자신을 개인적인 "나"와 동일시 했던 참의식이 이제 자신의 비개인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일어나는 일은 이게 다죠. 그리고 찾는 과정은 마음이 간섭하지 않을 때, "내"가 없을 때, 오직 참나, 즉 참주체인 나만이 존재할 때 빨라집니다. 현자 아시타바크라(Ashtavakra. 아시타바크라 기타는 현자 아시타바크라와 비데하왕국의 왕 쟈나카와 간의 문답을 담고있다. 라메쉬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아시타바크라 기타를 영어로 번역하고 설명한 책 Duet of One: The Ashtavakra Gita Dialogue의 저자이다 - 옮긴이)가 구속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마음이 어떤 것을 바라거나 어떤 것에 비통해하면, 이것이 구속이다. 마음이 바라거나 비통해하지 않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행복해하거나 불행해하지 않으면, 이것이 자유다." 그러면 지금처럼 숙달되고 길들여진 인간의 마음은 곧바로 "난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야지. 난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을테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싶어하는 바람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마음은 깨우치지 못해요. 바란다는 것은 어떤 사물을 바란다는 것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바라는 것 까지도 포함하지요.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싶어하는, 그 알고자 하는 욕구 조차도 바람이고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뭔가를 바라든가 뭔가에 비통해할 때 구속된다는 말이죠. 마음은 깨달음을 바라고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며, "10년, 20년, 25년을 이러고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다니!"라고 말해요. 마음은 이렇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통해하지요. 마음은 뭔가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바라는데, 이렇게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비통해하지요. 마음이 원하거나 바라거나 비통해하지 않을 때, 마음이 비어있을 때, 마음이 열려있을 때, 이것이 자유가 뜻하는 바입니다. 마음이 비어있다는 것은 멍청하게 마음이 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려있고 최대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상태인데, 이는 마음에 제약이 없기 때문이예요. 이때 마음은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아요. 아무도 집에 없죠. 마음은 텅 비어 있어요.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행복해하거나 불행해하지 않아요. 아시타바크라는 이어서 말하길, "마음이 어떤 감각적 경험에라도 집착하면, 이것이 구속이다. 마음이 어떤 감각적 경험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이 자유다."라고 했어요. 다시한번 아주 짧게 표현했죠. 아시타바크라는 수준을 낮추어서 설명하지 않았어요. 현자는 이른바 찾는 이라는 사람들이 그 뜻을 스스로 알아내기를 원해요. 아시타바크라는 감각적 경험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는 말하지 않아요.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감각적 경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아요. 경험은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는데, 깨달음이 일어났든지 아니든지에 상관없이 그 몸-마음 유기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예요. 그래서 현자가 감각적 경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죠. 경험은 일어납니다. 다만 감각적 경험이 일어나지만 마음이 그 경험에 집착하지 않지요. 감각적 경험은 일어나고 그것으로 끝이예요. 그리고 모든 경험은 언제나 현 순간에 있어요. 좋든 나쁘든, 즐겁든 불쾌하든, 모든 경험은 언제나 바로 그 순간에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개인과 전혀 상관없는 비개인적인 경험이예요. 그런데 마음지능이 이런 비개인적 경험을 자기 자신의 경험이라고 여기고 경험이 좋거나 싫다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서 경험 자체의 비개인적인 면을 잃어버려요. 즐거운 경험이면 자주 일어나기를 바라고, 나쁜 경험이면 원하지 않지요. 그래서 보면, 경험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시간 속에 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어나지요. 현자가 경험하는 비개인적 경험은 언제나 바로 그 순간에 있고 경험이 끝나면 마음은 더는 경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마음은 전혀 집착하지 않아요. 일어나는 경험이 비개인적 경험인 것을 알고 그 순간 그것으로 끝이지요. 마음이 모든 감각적 경험에 집착하지 않을 때 자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시타바크라는 ""내"가 있으면 이것이 구속이다. "내"가 없으면 이것이 자유다. 이 사실을 알기에 현자는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것에 열려있다."라고 말합니다. 

 

-- 독립개체성 -- 

 

질문자: 선생님의 책에서 특별히 제게 도움되고 쓸모있는 내용을 찾았는데, 정체성과 탈정체성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거기서 "독립개체성"이라는 단어를 쓰시더군요. 

 

라메쉬: 그래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면서 독립된 개체라고 여기는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가 "독립개체성"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어요. 깨달음이 일어난 이후에도 몸-마음 유기체가 남아있는 삶 동안 일상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정체성이 남아있어야 해요. 그래서 몸에 대한 정체성은 계속되지만 독립된 개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독립개체성은 사라지지만 몸에 대한 정체성은 독립된 행위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계속돼요. 

 

질문자: 그럼 이 단어에서 중요한 것이 "개체"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질문자: 이 단어를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셨나요? 

 

라메쉬: 예, 그랬어요. 

 

질문자: 아, 이 단어가 선생님 자신의 개인 창작물이군요. 

 

라메쉬: '그 단어는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말하겠습니다. 그 단어가 아니면 저는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면서 독립된 개체라고 여기는 정체성"이라는 말을 매번 반복해야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대신 "독립개체성"이 짧고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질문자: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멋지군요. 

 

라메쉬: 보시면, 깨달음이 일어난 뒤라도 누가 라마나 마하리쉬를 "바그완"이라고 부르면 그분은 돌아보시겠죠. 누가 마하라지를 부르면 대답하실 겁니다. 이 말은 몸에 대한 정체성은 있지만 몸이 기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작동 요소로써의 정체성이죠. 이런 종류의 작동요소는 "내"가 행위자라는 의식 없이 기능하는데, 예를 들어서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가 그래요.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 보면 꽤 자주 어떤 거리를 운전하는 동안 "내"가 거의 없지요.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어느덧 도착했다고 알아채지요. 이렇게 운전하는 것이 운영 요소입니다. 운전을 한 사람이 운영요소지요. 운전하는 동안은 운영요소로써의 정체성이 자신이 기능한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래서 정체성은 계속되지만 자신을 독립된 행위자라고 여기지 않아요. 사라지는 것은 독립개체성이지요. 독립된 행위자가 더는 없어요. 유감스럽게도 "독립개체성"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못 찾을 겁니다. 

 

-- 정체성 -- 

 

질문자: 주체이고 잠재적인 참의식은 동일시하는 능력이 있나요?

 

라메쉬: 아닙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어요. 잠재적인 상태로 있든지 움직이는 상태로 있든지,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누가 누구와 동일시한다는 말입니까? 

 

질문자: 그럼 이런 정체성은 어디서 일어나나요? 주체의 수준입니까? 아니면 객체의 수준에서 입니까? 

 

라메쉬: 정체성은 오직 현상세계의 객체 수준에서만 일어나는데, 개인과 개인의 분리된 마음이 있기에 이 객체가 자신이 신의 주체성을 가진다고 여기고 "내가 주체다. 나는 사고할 수 있다. 나는 지적이다."라고 여기면서 정체성이 일어나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개인은 자신을 나머지 세상과 분리하지요. 

 

질문자: 저번에는 분리된 개인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참의식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라메쉬: 맞아요. 이렇게 현상세계가 나타나서 기능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이렇게 기능하게 하려고, 이런 놀이 또는 릴라가 일어나게 하려고, 이런 사랑과 증오라는 관계가 일어나게 하려고 참의식은 개별 유기체와 자신을 동일시해요. 자, 당신이 연극 극본을 쓴다고 가정해봅시다. 당신이 여섯 등장 인물을 만들고 이 여섯 등장 인물 모두를 연기하는 겁니다. 당신이 그 중 한 인물이 되어서 다른 인물에게 말하고 있을 때는 조명이 말하는 그 인물인 당신에게 비춥니다. 그런 뒤에 조명이 잠시 나가고 당신은 다른 인물이 됩니다.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당신은 두번째 인물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말하고 있어요? 여섯 명의 인물들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당신'이 다른 부분들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죠. 연극을 연출하고 등장 인물 모두를 연기하는 것은 여전히 바로 당신이예요. 만일 이런 여섯 등장 인물 각자에 감지력과 지능이 주입되면 이들은 누가 더 중요하네, 누가 더 매력적이네 하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겠죠. 꿈이라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똑 같아요. 각성이 일어나면 오직 지켜보기만 합니다. 오직 지켜보고 목격하기만 한다는 말입니다. 

 

질문자: 그런데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여전히 주체 참의식이군요. 

 

라메쉬: 그 모든 인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주체로 여기고 서로 서로 비교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은 지능이예요. 참의식은 자신의 객체적 표현을 재미있게 지쳐볼 뿐이지요. 

 

질문자: 그러면 정말로 동일시하는 것은 지능이지 순수한 참주체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라메쉬: 비개별적 참의식이 자신을 각각의 몸-마음과 동일시해서 "나"를 만들어요. 동물도 물론 "내"가 있지만 동물은 이런 문제와는 전혀 상관 없어요. 이런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는 지능이예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객체인데, 몇몇 객체에 감지력이 만들어져요. 이렇게 곤총과 동물같은 감지력을 가진 객체가 되지요. 그러다 몇몇 감지력을 가진 객체에 지능이 주입되면서 인간이 됩니다. 

 

질문자: 동물에게도 "내"가 있군요. 

 

라메쉬: "내"가 있지요. 그럼요. 

 

질문자: 문제의 원인이 "나"라는 의식이 아니군요? 

 

라메쉬: "나"에 지능이 더해지면서 문제를 일으켜요. 감지력에 지능을 더한 것이죠. 기본적으로, 지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질문자: 동물은 괴로움을 안 겪나요? 

 

라메쉬: 동물은 심리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아요. 

 

질문자: 그러면 동물은 깨달을 필요가 없겠군요? 

 

라메쉬: 보시면, 동물이 위험에 처하면 온 몸이 반응할 준비를 해요. 하지만 위험이 사라지자 마자 동물은 긴장을 풀겁니다. "위험이 또 일어나면 어떻하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능이 끼어들기 때문이예요. 동물은 직접적인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긴장을 풉니다. 인간이 "이런 위험이 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막아야하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능이죠. 

 

질문자: 어떤 측면에서는 동물이 우리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들리는군요. 

 

라메쉬: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당신이 좀 더 행복해진다면 기꺼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주겠지만,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다른 모습들로 나타난 참의식일 뿐입니다. 

 

질문자: 어떤 면에서는 이런 대화 조차도 에고가 걸어가는 여정이 되어버리죠. 

 

라메쉬: 에고의 여정이 맞아요. 

 

질문자: 제가 질문했을 때 선생님께서 "사실입니다."라고 말씀해주시면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아주 좋아요. 어떤 때는 이런 말을 자주 들을수록 에고가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라메쉬: 도대체 누가 알고 싶어하는지 알아내 보세요. 이 찾는 이라는 것이 누구일까요? 찾는 이가 있기는 할까요? 

질문자: 찾는 이는 "나"죠. (8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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